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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21 "이름 없이도 모두에게 내리는 은총"

정재현의 신앙성찰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2.3. 포괄주의(7) 라너: '익명의 그리스도교'

가톨릭교회의 자체적 종교개혁이라 할 만 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이념적 대부였던 칼 라너(Karl Rahner)는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의 관계에 대해 나름대로 독특하면서도 너그러운 듯이 보이는 입장을 개진했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라는 그의 논문 제목이 가리키듯이 다른 종교들을 '익명의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교와 가깝게 연관 짓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익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역사적이며 공동체적인 현상은 제외되[지만]"(칼 라너, "익명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선교적 사명,"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 1, 김승철 편저 [나단, 1993], 108) 본질의 차원에서는 익명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종교들과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라너가 이렇게 '익명'이라는 표현을 과감히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어떤 대상이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부르는 것이 그 대상의 본질을 올곧이 드러내지 못한다는 언어와 사유의 한계, 그리고 더 나아가 이름붙이기(naming)의 횡포에 대한 깊은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익명'이라는 표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그의 예비적인 언술이 이 논문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논문 전체를 관통하는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작하는 대목에서 눈여겨보는 것은 의미 있을 것입니다:

'익명'이라는 말 자체는 특별한 오해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하는 익명이라는 말의 정의는 어떤 대상의 이름을 말할 때 그 이름 속에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의 본질을 정확히 말하고 반영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익명이란 어떤 존재하는 것(Seiende)의 이름에 이것의 본질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 분명히 표현되지 않은 채 받아들여짐을 말한다. (라너, 110)

그러니까 어떤 무엇이 그 무엇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그 무엇이 어떤 무엇의 본질을 제대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없으니 익명이라는 표현이 결코 무리가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본질에 대한 논의를 확대할 필요성마저 일깨워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급기야 '그리스도교'라는 말도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을 에누리 없이 담아내거나 드러낸다고 할 수 없는데 이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역사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훌륭한 수식어를 동원하여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의 본질이 완전히 드러난 것도 아니며 또 역사적이며 공동체적으로 표현되고 파악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익명이라는 것이다"(라너, 111).

이렇게 본다면 라너는 이미 현대 언어철학과 해석학이 공유하고 있는 인간 사유와 언어의 한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 공감하는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라는 특정종교를 지칭하는 이름이 그 특정종교를 본질과 역사의 차원에서 모두 온전히 담고 드러내지 못하니 서로 다른 이름들로써 대상들 사이의 차이를 확연하게 갈라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입니다. 나아가 이를 근거로 이름이 대상을 모두 드러내지 못한다면, 서로 다른 이름들이 지칭하는 대상들이 이름만큼 다르게 구별되거나 분리된다고 할 수 없다는 데에까지 뻗어 나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있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있는 것을 재단할 수밖에 없다는 칸트의 인식론적 종합을 받아들이면서 이 테두리 안에서 아는 것으로서의 이름이 지닌 한계가 익명성을 말할 수 있는 인식론적 근거가 된다고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라너에 의하면 '익명성'이라는 표현은 이보다 더욱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름이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가 이름들의 다름이 지닌 구별을 무시해도 좋은 구실이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름이 바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의 본질을 에누리 없이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가 다른 종교인에 대하여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소극적 근거라면 이제 그 표현은 다른 종교인들도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리고 세례를 받기 이전에도 성화케 하는 은총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너, 111)는 것입니다. 사실 라너가 익명성이라는 표현을 도입하여 다른 종교인들에게 과감하게 뒤집어씌우는 듯이 이 용어를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행은총(gratia praeveniens)입니다. 은총은 세례를 받기 전에, 명시적인 개념의 관련성이 없는 곳에서도, 그리고 가시적인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이미 들이닥치고 있고 여전히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어도, 그래서 이름을 붙이기 전이라도 모두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은총 말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은 특정종교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총이란 과연 그런 것이더라는 말입니다. 일찍이 은총이라는 것에 대해 이토록 자비로운, 그래서 '은총다운' 묘사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천당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지요? 은총이란 도무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이토록 황당무계한 이중예정설을 영구불변의 진리인 줄로 알고 금과옥조로 붙들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마당에 은총의 가없는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려는 이런 통찰은 그 자체로 큰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를 들어, 불교도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이미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안 쓰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익명입니다. 익명은 그 마땅한 이름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이름을 쓰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종교인, 무종교인들이 다 다른 이름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은총 덕분에 다른 종교에도 낮은 단계로나마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는 은총입니다. 은총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 업적, 심지어는 믿음과도 상관없이, 그리고 현실적으로 종교 체제나 제도와 무관하게 주어집니다. 그러한 것들이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은총은 무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조건성이 전개되는 방식은 당연하게도 인간의 그러한 온갖 것들에 앞서 펼쳐지니 그것들보다 앞선다는 점에서 선행입니다. 굳이 새긴다면 있음의 차원에서 무조건이요 앎의 차원에서 선행입니다.

그런데 무조건이나 선행은 우리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경험영역에서는 그러한 것을 도무지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무조건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감지할 수 있을까요? 어림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조건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혹시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조건적인 틀에서만 받아들이고 새기며 겪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원으로만 보고마는 종교적 태도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종교적 욕구 충족만을 추구하는 종교적 이기주의가 더 크게 도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끝없이 조건화시켜야만 직성이 풀리고 욕구가 충족되는 것으로 경험하는 인간의 생리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면 우리가 은총에 대해서 '무조건'이라고 말은 하지만 얼마나 왜곡시켜 새기고 있는지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의 은총이 가시적인 그리스도교 밖에 주어질 수 있냐고 시비하는 것은 은총의 무조건과 선행을 거스르고, 나아가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제한시키는 인간의 오류일 뿐입니다. 은총은 그리스도교에 한정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하느님을 제한하는 것이니 신성모독입니다. 복음주의적인 패턴, 그리고 좀 더 솔직히 배타주의적인 사고의 언어에 우리가 익숙하다보니까 이러한 논의 자체가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총에 대한 라너의 통찰은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무의미한가요? 이런 의문을 지닐 수밖에 없는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인의 입장에서 지녔던 일말의 걱정을 의식한 라너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줍니다:

따라서 최소한 일단 성인이 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책임 이외의 다른 한계를 갖지 않는다. 물론 그 책임은 그 생애의 전 과정 속에서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으로는 아마도 입증되지 않을 것이다. (라너, 113)

여기서 핵심은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책임'입니다. 익명성이라는 표현으로 본질을 주목하자고 우리를 초대했을 때 라너는 바로 이것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임의 눈으로 볼 때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주체적 책임이 보편적으로 부과될 가능성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니 특정한 이름이 에누리 없이 다 드러낼 수 없다는 본질이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러한 본질인 주체적 책임을 인간들이 모두 공유한다고 판단합니다. 익명의 은총이 바로 이를 가능케 하고 또한 요구하니 가히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은총에 대한 범종교적-범문화적 예찬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체적 책임이 가능성으로만 깔려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입증되어야 하는데 바로 역사에서 가시화되어야 하고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에 소속됨으로써 입증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그리 주장하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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