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도행전 10:39-43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심판자로 정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3:1-4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24:1-12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나간 것을 보았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섰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이다. 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설교문
1.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 그리고 이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굴려져 나간 것을 보고, 무덤 안으로 들어갔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혹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는 않았는지 당황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 말합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놀란 여자들이 열 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을 알렸으나, 사도들은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말', 헬라어 성서 원어, '레로스 타 헤마타'(leros ta hemata)는 '공허한 허튼 소리'(leeres Geschwaetz)라는 의미입니다. 마틴 루터는 '동화 같은 말'(Maerchen)로 번역했고, 영어성경인 ESV-study bible은 'idle tale'(근거 없는, 헛된, 꾸민 거짓말)로, 국제가톨릭성서공회가 편찬한 해설판 공동번역은 '부질없는 헛소리'로 번역하였습니다. 우리 말 사전에 따르면 '어처구니'는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의미하는데, 주로 '없다'의 앞에 놓여, '어처구니없다'는 말은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여자들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았던 유대 사회의 전통은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현실의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현실경험에서 보아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이 때의 부활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육체, 시간과 함께 늙어가고, 병들고, 언젠가 죽으면 부패하여 없어질 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같은 형태의 육체로 부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부활이라면, 정중하게 이런 부활을 사양할 사람이 아마도 더 많을 것입니다.
2. 성서는 과연 이런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승을 전해주는 사도 바울은 씨앗과 열매의 비유를 통해서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며, 뿌리는 씨의 형태와 꽃과 열매의 형태가 다르듯이(고전 15,35-41), 죽을 몸과 부활할 몸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이 몰라 본 것은 부활한 몸의 비연속성을, 후에 제자들과 음식을 드실 때에 알아 본 것은 몸의 연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락방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몸은 비연속성을, 못과 창에 찔린 상처를 도마에게 만져보도록 허락한 몸은 연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부활한 몸은 어떤 몸이란 말일까요?
사도 바울은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고,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나고,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난다'(고전 15,43-44)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첫 아담, 곧 죄 가운데 있는 인간과 마지막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으므로 하늘에 속한 그 분의 형상을 입을 것(고후 15,49)이라고 말합니다.
썩지 않을 몸,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몸과 부활한 몸이 '비연속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죽은 후, 하늘나라에 갔을 때, 우리 조상들이 우리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으며, 우리는 어떻게 우리 조상들을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성서는 과학책이 아닙니다. 아니 성서 기자들은 과학적 입증에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 사이에 부활에 관한 논쟁이 있었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그 후의 삶에 성서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성서는 죽음을 물리적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산 자 같으나 죽은 자, 살아 있으나 산 것이 아닌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죄 안에 있는 사람, 죄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본래 부활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아나스타시스'(anastasis)는 '아니스테미'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아니스테미'는 '아나'(다시)와 '히스테미'(서다)의 합성어로, '다시 서다, 일어서다, 일어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서다'라는 동사가 명사화하여 '부활'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타동사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일으키다, 일으켜 세우다, 깨우다'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우신'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고,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23-24, 36)고 설교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셔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을까요?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사라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요한계시록 2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고전 15,57). 우리가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전 15,58). 주님을 위한 우리의 모든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전 15,58).
3. 정확한 어원은 모르지만 설에 의하면 어처구니는 맷돌의 손잡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궁궐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세워진 잡상(雜像) 또는 작은 토우를 말하는데, 이 토우들은 액운을 막고 악귀나 요괴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처구니가 없으면'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맷돌을 갈지 못하면 맛있는 두부도 만들 수 없고, 어처구니가 없으면 악귀를 쫒아내지도 못 할테니 말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끝난다'는 말은 '끝에서 난다'라는 말로, 끝과 시작은 같은 것이며, 동시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지어 인간이 죽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창세기 2,17) 물리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은 순간 죽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을 막기 위해 굳이 낙원에서 아담과 이브를 추방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창세기 3,22). 죽음은 이미 창조의 질서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물리적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서가 주목하는 것은 물리적 죽음이 아니라, 죄 안에서의 죽음, 죄에 사로잡힌 삶으로서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죄로부터 해방된 삶, 구원받은 삶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죽은 것 같으나 살아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임을 믿으면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로마서 14,17).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는 사람(로마서 12,9),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는 사람(로마서 12,12),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로마서 12,21)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산 사람들이 테러로 무차별적으로 죽어가고,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 아닐까요?
지구 전체 인구의 6분의 1, 그러니까 10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 평균 1달러로 살고 있는 것이(2014년 현재)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나라 음식물 쓰레기는 연간 500만 톤 이상 발생하고, 이를 처리하는데 드는 비용은 연간 9천 억 원이 든다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인데, 음식물의 수입, 유통, 요리 등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기후변화 문제를 감안하면 연간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20조 원을 넘는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어처구니없는 일 아닐까요?
그런데 다른 어처구니도 있습니다. 이 어처구니가 없이는 맷돌을 갈 수도 없고, 악귀를 쫒아내지도 못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말, 죽은 자의 부활 없이는 죽음이 극복되고,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삶의 모순인 죄 안에서의 죽음은 부활을 통해 극복되고, 부활은 죽어야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 세상'(죽임의 현실)에서 '어처구니없는 말'(부활의 미래)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경동교회 성도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시어 어처구니없는 이 세상을 어처구니없는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이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