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삿 9:7-16
[사람들이 이 소식을 요담에게 전하니, 그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 서서, 큰 소리로 그들에게 외쳤다. "세겜 성읍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여러분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들은 올리브 나무에게 가서 말하였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나 올리브 나무는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래서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달고 맛있는 과일 맺기를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래서 나무들은 포도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나 포도나무도 그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 내는 일을 그만두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래서 모든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 그러자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이 일이 어찌 옳고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어찌 여룹바알과 그 집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이라고 하겠으며, 그가 이룬 업적에 보답하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설교문
- 맘에다 하는 칼질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잎은 난분분 떨어지고, 여러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납니다. 이 호시절에 마치 이명증처럼 영화 <서편제>에서 아버지 유봉이 눈먼 딸을 데리고 산길을 가며 부르던 '사철가'의 첫 대목이 자꾸만 들려옵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 봄이로구나/봄은 찾아왔건만 세상사 쓸쓸하더라". 사철가는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청춘에 대해 탄식하고 있지만 저는 다른 의미의 쓸쓸함을 느낍니다. 오늘 우리의 세태가 생의 본질적인 것을 도외시하고 지엽말단에 속한 것에만 눈길을 주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슴이 울울할 때마다 함석헌 선생님의 시집 <수평선 너머>를 읽곤 합니다. 그때마다 몸과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그는 머리말에서 지금 책으로 엮고 있는 자기 글이 시 아닌 시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라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함석헌저작집23, <수평선 너머>, 한길사, 2009년 3월 13일, p.15) '내 맘에다 칼질을 했다', '그것을 님 앞에 바친다'는 말이 그의 태도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습관에 이끌리는 우리 마음은 어지간한 충격이 아니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함선생님도 그것을 알기에 자꾸만 굳어지려는 자기 마음에 칼질을 하는 겁니다.
"독자여, 여기 껍질이 있거든 스스로 아낌없이 벗겨버리라. 찌끼 있거든 스스로 어려워함 없이 짜내버리라. 만일 진주라고 믿어지는 것이 있거든 나와 같이 울자. 그것을 눈물로 다시 씻어 우리 님께 바치자. 네 맘 따로 내 맘 따로가 아니니라."(앞의 책, p.15)
그는 자기 시에 있는 군더더기가 있거든 서슴치 말고 벗겨버리라고, 찌꺼기가 있거든 짜내버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주처럼 귀한 것이 있거든 눈물로 씻어 우리 님께 바치자고 제안합니다. 그의 시는 시를 위한 시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영롱한 진주를 다시 발견해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 마음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는 세상에 한눈을 파느라 우리 마음을 살피지 않습니다. 세상의 값진 것에 마음이 팔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귀한 것들을 잊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빈곤해졌습니다. 내면의 빛을 잃은 이들은 늘 어떤 결핍감에 허덕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우리 마음에 칼질을 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우리의 상처입은 마음, 일그러진 마음을 내려놓고 치유해주시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느슨하게 풀어지거나 너무 팽팽하게 긴장된 마음을 받으시어 조율해주십니다. 개인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4.13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후보들이 막바지 유세에 한창입니다. 후보자들은 저마다 자기야말로 나라를 위해 일할 적격자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그 후보자들의 인물됨이나 정책 지향보다는 속해 있는 정당을 보며 선택을 하곤 합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점점 대립과 갈등의 현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분별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그릇된 권력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 변덕스런 우리 마음
오늘 우리의 본문은 사사 시대의 위대한 영웅 기드온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벌어진 사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 이야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와 더불어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 아주 사랑받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닙니다. 겨우 삼백 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적진에 접근한 기드온의 용기는 장엄한 느낌을 자아내기까지 합니다. 그의 부하들은 한손엔 항아리에 숨긴 횃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나팔을 든 채 적진에 은밀하게 접근하여 일시에 항아리를 깨뜨리고 나팔을 붊으로써 적들을 교란시켰습니다. 자중지란에 빠진 적들은 서로를 죽였고 기드온의 용사들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기드온은 이후에도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했고 백성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그 청을 뿌리칩니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삿8:23)
'오직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이 고백이 이스라엘의 청년기라 할 수 있는 사사시대의 에토스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가나안의 토착신인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고, 야훼 하나님은 잊혀졌습니다. 위기가 해소되자 슬그머니 다산과 풍요의 신에게로 돌아섰던 것입니다. 그들은 타자들을 진심으로 환대하며 살라는 야훼 하나님의 요구보다는 자기들의 욕망의 부름에 충실했습니다. 환대란 무엇입니까? 다른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기의 안일한 평안이 방해받는 것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변덕스럽습니다. 서경과 중용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위태롭고, 참을 지키려는 마음은 희미하니,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로지 그 중정을 꼭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게 마련이고, 그 순간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그 총명하고 신심깊던 기드온도 어느 순간 자기 성공에 도취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달라는 청은 단호히 뿌리쳤지만 거의 왕적 존재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내가 많아 친아들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아비멜렉은 권력욕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로부터 상당히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날 그는 세겜에 터잡고 살던 외가에 가서 자기 꿈을 실현할 지지기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후, 그곳에서 얻어낸 돈으로 건달과 불량배를 고용하여 자기를 따르게 합니다. 아버지의 본가가 있는 오브라에 가서 그는 자기의 배다른 형제들을 한 바위 위에서 다 도륙했습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처럼 잔혹합니다. 살아남은 것은 막내아들인 요담 뿐이었습니다.
- 불의의 연대
세겜 사람들은 세겜에 있는 돌기둥 곁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이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한 이들이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과 밀로의 온 집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실의 절반만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한 이들은 그 성읍의 유력자들이었습니다. '밀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뭘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고대 그리스 도시의 아크로폴리스와 비슷한 것으로, 도시 안에 돋우어 올린 지면 위에 건축한 성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이들은 세겜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친족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아 그를 지지한 것입니다. 벌거벗은 이익만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득권자들의 탐욕과 한 야심가의 정치적 야망이 결합되어 그러한 참극이 빚어진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요담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을 향해 외칩니다. 그게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리심 산은 요단강 서쪽에 있는 산이지만, 그 지리적 위치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큰 산입니다. 그리심 산은 에발 산과 더불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선포되었던 곳입니다. 요담은 상징성이 큰 그곳에서 세겜 성읍 사람들, 곧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했던 유력자들을 향해 우화 하나를 들려줍니다. 우화는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나무들은 먼저 올리브 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올리브 나무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포도나무에게도 부탁하지만 역시 거절당합니다. 기름을 내고, 달고 맛있는 과일을 맺고, 포도주를 내는 등 각자에게 맡겨진 아름다운 일을 포기한 채 다른 나무들 위에서 거들먹거릴 수 없다는 것이 이 세 나무의 공통된 대답이었습니다. "내가 어찌......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 나무들은 자기들에게 품부된 역할을 벗어날 생각이 없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가서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라고 제안합니다. 가시나무는 망설임없이 그 청을 받아들이겠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15). 이 대목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폭력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는 사람들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유혹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의 의지를 누군가에게 강제할 수 있다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매우 달콤한 유혹임이 분명합니다.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에게 자기 그늘 아래로 피하라고 말합니다. 가시나무 그늘 아래 머무는 자는 날카로운 가시에 찔릴 수밖에 없습니다.
황석영 선생은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살려 <무기의 그늘>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작가는 전쟁의 이면에서 작동되는 사람들의 더러운 열정을 그려 보여줍니다. 가시나무 그늘이든 무기의 그늘이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곳에선 누구도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지배의 열정 뒤에는 타자에 대한 맹목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높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 자기 형제들을 도륙했습니다.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입니다. 그러나 세겜의 지도자들은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자기들의 특권을 잘 지켜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 멜렉과 몰렉 사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땀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생명이 자기 몫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고, 모든 피조물들이 조화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정치의 본질도 그러합니다. 정치인들은 대개 특정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권자들의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불의한 이해관계에 따라 결합한 권력은 언제나 파국을 맞게 마련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제일 먼저 등을 돌린 이들은 그를 왕으로 세웠던 세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내전 끝에 아비멜렉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망대 위에 있던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절명 상태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나무들 위에 거들먹거리던 가시나무가 피할 수 없었던 운명입니다.
우리는 샬롬의 세상, 안식의 세상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소망은 어느 유능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 세상은 지금 여기에서 그런 세상을 시작하는 이들을 통해 도래합니다. 언제 결실을 보겠느냐며 아무 일도 안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울면서라도 씨를 심어야 하고, 어떤 이는 물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역사의 소명입니다. 아비멜렉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 속에 있는 '멜렉' 곧 '통치자' 혹은 '왕'이라는 단어는 모음만 다를 뿐 인신제물을 요구하는 '몰렉'을 연상시킵니다. 권력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을 때는 영광의 도구이지만, 스스로 자존망대하여 신적인 자리에 올라서려 하면 '몰렉'이 되는 법입니다. 몰렉은 무정합니다. 사람들을 도구로 삼을 뿐 목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2년이 됩니다. 아직도 진상은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가족들의 눈물은 여전히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투명인간 취급을 받거나, 추잡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로 매도당하기도 합니다. 그 아픔, 그 눈물을 외면하고는 우리가 진정한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오늘 이 땅의 정치인들이 그 아픔에 반응할 줄 아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또한 아픔이 없는 세상을 열기 위한 주님의 꿈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