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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민과 연대

2016년 4월 17일 청파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막 2:1-12

[며칠이 지나서,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예수가 집에 계신다는 말이 퍼지니,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문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고,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설교문

  •  어떤 이야기에 이끌리는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월호 참사 2주기였던 어제는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우중에도 분향소마다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이 간절했습니다. 희생자 유가족들의 아픔과 한이 속히 치유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제는 정말 우리 사회가 생명 살림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위험 사회'에서 우리가 진정한 안식을 누릴 날은 언제나 다가올까요? 주일 아침 예배당을 찾아오는 교우들을 맞이하다 보면 어느 목사님이 들려주신 등불 이야기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1950년대 말 연천에서 서울까지 장장 이백 리 길을 기차로 통학하고 있었습니다. 눈 쌓인 수복지구의 싸늘한 겨울밤, 기차에서 내리면 으레 볼을 저미는듯한 매운 하늬바람이 불어쳤습니다. 그 때 저 멀리 산중턱에서 깜박거리며 비치는 등불이 눈에 들어왔고 그것이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그의 아버지는 날마다 9시가 넘어야 돌아오는 아들을 위하여 등불을 밝혀 쪽마루 끝에 있는 기둥에 걸어놓곤 하셨던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등불을 내건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라고 목사님은 말합니다(최완택, <아름다운 순간>, 당그래, 1990년 12월 9일, p.52-53). 그런 등불 하나가 우리 마음에 밝혀져 있다면 우리는 어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우리 교회가 그리고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소박하게 내걸린 희망과 위로의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빚어가는 신앙생활의 이야기가 우리 인생의 등불이 될 때가 참 많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야기 또한 사람을 만듭니다. 저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말을 늘 명심하고 지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로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앞선 질문이 해명될 때에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 짤막하지만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혹은 사랑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말과 통할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 널려 있는 성공 이야기에 매료되는 사람이 아니라, 적대의 세상을 환대의 세상으로 바꾸려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이끌려 사는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가 우리 삶의 지향을 새롭게 하는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낯선 존재 예수

오늘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가 놓여 있는 전후의 맥락을 잘 살펴야 합니다. 1장의 마지막 단락은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주님께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1:40). 그는 '고쳐달라'고 하지 않고 '깨끗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병을 '더러움' 곧 '죄'로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이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아무에게도 이 사건을 알리지 말라 이르셨습니다. 하지만 내면에 일고 있는 감동을 주체할 길 없던 그는 자기에게 벌어진 그 놀라운 일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실 수가 없었고, 동네 바깥 외딴 곳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일단 '동네 바깥 외딴 곳'이라는 구절에 유의하시면 좋겠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다루는 본문 바로 직후에는 몇 가지 논쟁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불퉁거립니다.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2:16) 사람들 또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2:18)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던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을 보면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불쾌한 내색을 하며 묻습니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24)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시의 주류 세계에 속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에 익숙한 이들로부터 낯선 이들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몸짓 하나하나는 사람들에게 '왜, 어찌하여'라는 반응을 낳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 일행은 사회가 설정해놓은 금기를 넘나드는 사람들, 사람들이 애써 구축해놓은 사회적 합의를 깨뜨리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까 예수님이 '동네 바깥 외딴 곳'에 머무셨다는 말을 유의하라고 했었지요? 이제 이것이 다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  마비된 사람과 그 벗들

이제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며칠이 지나서,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며칠'은 특정한 날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한 허두로 보면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시'라는 단어입니다. 동네 바깥 외딴 곳에 머무시던 예수님은 이제 마을로 들어서고 계십니다. 그곳은 통념이 지배하는 공간입니다. 언제든 대중들의 환호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통념을 깨뜨린다 하여 배척 받을 수도 있는 곳입니다. 통념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떤 새로움도 낯설거나 위험한 것으로 취급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금 그런 곳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문 앞에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목마름이 이들을 이렇게 많이 불러냈던 것일까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을까요? 갈릴리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는 눈물의 땅이었습니다. 착취와 억압이 일상이었습니다. 굶주림과 영양실조, 만성적인 질병, 각박해진 인심으로 인해 그곳은 인정의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고대했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2)고 간략하게 전합니다.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마가는 전해주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의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이어지는 사건이 곧 그 말씀의 내용과 관련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운반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설 수가 없었습니다.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장벽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네 사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벗겨내고 침상을 줄에 매달아 예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기묘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 다음 대목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병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5)

여기서 말하는 '그들의 믿음'이 환자를 옮겨온 네 사람을 일컫는 것인지, 중풍병자까지도 포함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복수이니까 환자만의 믿음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그들이 보여준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수가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일까요?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했다는 말일까요? '믿음'이라는 말은 통상 특정한 대상을 상정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받는 이를 어떻게든 도우려고 하는 그들의 열정과 연민을 믿음으로 여시신 것이 아닐까요? 병자는 당시의 사회 통념상 하나님께 벌을 받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리낌의 대상으로 따돌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네 사람은 어떻게든 그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어했고, 주님은 그 따뜻한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깊은 연민, 고통받는 이의 처지와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는 그 마음이야말로 거룩함에 가장 가깝습니다.

  •  무기력을 넘어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무기력과 죄책감이 올무처럼 그들을 옭죄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자꾸만 꾸지람만 받고 산 사람은 매사에 의욕을 보이지 않거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부정적인 자아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통해 자기를 바라봅니다. 이 중풍병자도 그랬을 겁니다. 그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일그러져 있거나 깨져 있었을 겁니다. 슬픔과 우울함이 삶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압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사죄를 선포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이 사람아!'는 '아들'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를 애정에 찬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그는 불결한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소중한 인격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그에게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라르슈 공동체를 만든 장 바니에는 세상에서 상처입은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지를 자기 경험에 입각하여 가르쳐줍니다.

"불행한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요?/무시하지 말고/겸손하세요/판단하지 말고/사랑하세요/지배하려 들지도 말고/다른 것을 주려 들지도 마세요/오직 나 자신만,/나의 시간, 나의 힘, 나의 마음만 주세요//더불어 놀기도 하면서/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세요/그 아이는 하나님의/소중한 자녀/예수님이 그 안에 거하십니다//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세요/가만히/평화롭게/상냥하게"(장 바니에,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 김은경 옮김, 홍성사, 2002년 4월 25일, p.51)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 판단하지 않는 것, 함께 놀고, 귀를 기울이고, 우리 자신을 선물로 주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에 부름받은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여야 합니다. '이 사람아!' 이 한 마디 말속에 담긴 애정과 연민의 깊이를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네 죄가 용서받았다." 너를 얽매고 있던 부자유의 사슬이 풀렸다. 너를 마비시켰던 그 어둠과 절망을 하나님께서 물리쳐주셨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선언입니다.

  •  사람들의 반응

하지만 모두가 그 말 앞에 감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던 율법학자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였다."(7) 이 때의 '이 사람'은 앞에서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들은 율법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늘 전문가 티를 내고 싶어합니다.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게 자기들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자기들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는 일을 만날 때입니다. 그들은 통념에 따라 처신하지 않는 사람들을 불편해합니다. 정도가 지나치면 그들을 제거하려고도 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 규정과 신학을 지켜내는 것이지, 한 사람이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를 사로잡고 있는 절망과 무기력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의 비극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표정으로 나타났던 것일까요? 주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8b-9)

마비된 마음이 먼저 풀리지 않으면 몸도 풀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죄의 용서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용서를 선언한다고 하여 그를 죄인으로 인정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말씀하신 것 뿐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하시고는 중풍병 환자에게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을 '인자'라 칭하십니다. 이 때의 인자는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세'라는 단어 때문에 예수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지레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통념과 죄책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옴쭉달싹 못하는 사람들을 그 매임으로부터 풀어주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죄를 진심으로 용서할 때,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를 존엄한 존재로 대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11) '내가 네게 말한다'는 참 권위있는 말씀입니다. 창조의 첫날 '빛이 있어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확신에 찬 말씀입니다. 중풍병자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갔습니다. 말씀과 실행이 틈 없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자리에 눕혀진 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동해야 했던 사람이 일어나 걷습니다. 그는 일어선 사람, 수직의 사람, 자기 발로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광경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가 일어선 사람이 될 때, 우리의 손길을 통해 누군가가 마비에서 깨어나 일어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연대의식이야말로 이 무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도 그 거룩한 삶의 자리에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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