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오는 4월27일(수) 개봉하는 치웨텔 웨지오포, 줄리아 로버츠, 니콜 키드먼 주연의 신작 <시크릿 인 데어 아이즈>를 보고난 뒤 떠오른 고사성어다. 영화 자체만 보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그러나 원작과 비교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화의 원작은 2009년 아르헨티나 출신 후앙 호세 캄파넬라 감독이 연출한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다. 영화를 본지 7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원작이 준 여운은 아직도 진하다. 슬프게도 <시크릿 인 데어 아이즈>는 원작이 지닌 고유의 아우라를 모조리 걷어내고야 만다.
원작을 살펴보자. 아르헨티나 법원에서 검사보로 일하는 벤하민 에스포지토(리카르도 다린)는 어느 날 강간 당한 뒤 참혹하게 피살된 한 여인의 시신을 접한다. 피해여성의 이름은 릴리아나. 직업은 교사였고, 남편은 은행원이었다. 충격 탓인지 에스포지토는 그 순간부터 이 사건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다. 마침 그 무렵,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이렌느(솔레다드 빌다밀)가 검사로 부임해 온다. 에스포지토는 한편으로는 이렌느를 도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 해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에스포지토는 끈질긴 추적 끝에 범인을 잡는데 성공한다. 단서는 ‘축구'였다. 에스포지토의 동료 파블로는 범인의 행적을 추적하다 그가 축구광임을 밝혀낸다. 범인을 검거한 장소도 바로 프로축구가 열리는 경기장이었다. 드넓은 축구장에서 범인을 추격해 검거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영화는 이 지점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에스포지토는 여전히 사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범인인 이시도르가 검거되고, 종신형을 받았기에 한편으로는 안도한다. 바로 이때 아르헨티나의 불행한 현대사가 에스포지토를 덮친다.
1976년 아르헨티나엔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군사정권은 대대적인 반체제 인사 소탕작전에 나서고, 이때 이시도르는 풀려난다. 반체제 인사 소탕에 잔혹한 능력의 소유자인 리카르도가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에스포지토는 위기를 직감한다. 그러나 동료 파블로의 헌신 덕에 화를 면한다. 파블로가 에스포지토 대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에스포지토는 죽은 동료 앞에 오열한다.
25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에스포지토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소설로 쓰기로 결심한다. 25년이란 시간도 에스포지토의 기억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복기하면서 스스로에게 '왜 이 사건에 자꾸만 매달리게 될까?'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의문은 먼저 세상을 떠난 파블로와 얽힌 기억을 끄집어 내면서 자연스럽게 풀린다. 에스포지토는 살인범을 추적하면서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해 혼란스러워한다. 바로 이때 파블로는 이 같은 말로 에스포지토를 기쁘게 해준다.
"이 친구야, 모든 건 변할 수 있어. 그러나 변하지 않는 건 남자의 열정이야 !!!!"
영화의 흐름은 아르헨티나의 슬픈 현대사와 얽히면서 관객의 눈을 붙잡아 놓는다. 이뿐만 아니다. 에스포지토와 이렌느의 애틋한 사랑은 감동을 배가시킨다. 에스포지토는 이렌느를 도우면서 점차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이렌느 역시 릴리아나 사건에 열정을 바치는 에스포지토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에스포지토는 자격지심이 심했다. 이렌느에게 사랑을 고백하기엔 자신의 위치가 너무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이렌느는 그가 자격지심을 극복하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에스포지토는 동료를 잃은 슬픔이 컸던 나머지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난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에스포지토, 그리고 멀어져가는 기차를 향해 달려가는 이렌느, 영화를 본지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했던 반전은 더욱 진한 여운을 남겨 놓는다. 25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도 탁월하다.
원작 아우라를 걷어낸 할리우드
<시크릿 인 데어 아이즈>는 원작을 미국적 환경에 맞게 대폭 뜯어 고친다. 배경은 2011년 9.11테러 직후의 LA. 그리고 흑인 FBI요원 리치(치웨텔 웨지오포), 동료 여성 요원 제스(줄리아 로버츠), 그리고 미모의 여검사 클레어(니콜 키드먼)가 등장한다. 그리고 미국이 배경 답게 범인은 ‘미국적인' 스포츠인 야구에 탐닉했고, 그래서 야구장에서 검거된다.
각색 과정에서의 변용은 흔한 일이다. 문제는 원작 고유의 체취를 살려야 했는데 할리우드 판은 오히려 훼손해 버렸다는 점이다.
원작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에서 역사의 물줄기는 주인공들의 마음 속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다. 에스포지토와 이렌느의 애틋하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은 주인공들이 겪는 아픔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러나 헐리우드 판에서 이런 비극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 중 한 명인 제스는 딸을 잃지만, 그 아픔은 제스 한 사람에게 그칠 뿐이다. 더구나 전직 FBI요원 리치가 사건에 매달리는 동기는 과장이 심하고, 리치와 클레어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억지스럽다.
할리우드의 리메이크 실패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가장 백미라면 의문의 감금생활을 한 오대수(최민식)가 이우진(유지태)의 전화를 받으면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누구냐 넌?"이라고 묻는 장면이다. 그러나 스파이크 리가 리메이크한 <올드보이>에서는 그저 평범한 대사로 처리될 뿐이다.
기자에게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는 오래도록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명작 중의 명작이었다. 그러나 할리우드 판은 평범한 범죄스릴러에 불과했고, 이를 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TV드라마, 소설, 실화 등 할리우드가 소재를 얻는 경로는 다양하다. 제3국에서 만든 걸작 영화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다른 소재라면 몰라도 할리우드는 리메이크 과정에서 제3국의 명작을 자주 훼손해왔다.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제3세계 작품의 리메이크만큼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