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교회는 끊이지 않는 성추문과 변칙적 부자세습, 폭력과 탈법을 부추기는 자리다툼으로 바람 잘 날 없다. 성추문에 휩싸인 목사가 사임을 번복하고 일선에 복귀하는가 하면 교회법이 허술한 틈을 타 한 달 짜리 임시목사를 채용한 뒤 아들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넘겨주는 '징검다리 세습' 역시 모양을 달리하며 등장하고 있다. 교단 내 회장 선거는 한술 더 떠 금권과 탈법 선거로 만신창이가 된지 오래다. 이쯤되면 교회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참담하다 못해 비루한 현실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있다. '개독교'다. 교회에선 그 말을 원색적인 표현으로 치부하거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의미로 낮춰 보지만 세상의 비난에 교회가 상당 부분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변명치고는 옹색하다. 교회 차원에서 자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영적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인식이 없다면 한국교회는 더 큰 나락으로 빠져들 가능성마저 있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파열음으로 볼 때 한국교회가 위기의 한복판에 서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이런 경우라면 진단을 통해 근본 원인부터 찾는 게 순서다. 하도 혼란스럽다보니 교인들 사이에선 이런 의문이 횡행하는 모양이다. 왜 하루가 멀다하고 교회에서 혀를 내두를 사건사고가 터지는 걸까? 비난의 확산과 악화된 비난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순환 고리는 왜 끊길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걸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고려신학대학원 박영돈 교수는 '대형교회 이데올로기'에 그 혐의를 둔다. 여기서 '대형교회 이데올로기'란 문제의식이나 비판 없이 대형화를 추구하는 교회의 현실태를 일컫는다. 박 교수에 따르면 '대형교회 이데올로기'에서 한국교회의 각종 문제가 파생되고, 그 각각의 문제들이 뒤엉켜 교회를 본래 목적에서 멀리 이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형교회 이데올로기'를 대하는 박 교수의 논지가 워낙 날카롭고 매섭다 보니 적잖은 이들이 불편해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과 그 후속작인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박 교수가 문제의 정곡을 찌르려는 의도로 택한 '실명비판' 하에선 에둘러 표현하거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등의 수위 조절을 기대하기가 어려워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간다. 실명비판은 비판의 강도가 예상치를 웃도는 경향이 있는 데다 비판의 질료로 제시되는 사실관계 자료의 질과 양이 방대하고 자료를 근거로 한 분석이 공감의 폭을 넓힐 경우 직접 당사자는 물론 관계자들의 불편한 마음을 가중시킬 소지 역시 크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박 교수가 오랫동안 성령사역에 관심을 갖고 그 분야를 줄곧 연구한 탓에 한국교회의 문제를 대하는 인식의 층위가 넓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또한 비범한 데서 본의 아니게 그가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면이 없지 않지만 본질은 한국교회의 문제이지 그 문제를 다루는 박 교수의 비평방식은 아닐 것이다. 사실이 그와 같음에도 박 교수의 개인적 성향이나 비판의 잣대를 문제삼는 건 여러모로 민망하다. 그것이 당장에 같은 편의 두둔을 얻고 자기 치부를 가리는 등의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그런 두둔과 경우에 맞지 않은 앞가림은 마치 마약으로 연명하는 것과 같아서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높다.
한국교회의 문제, 온정주의에 기대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실 박 교수의 날선 비판이 아프게 꽂히기는 한다.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고약한 현실만큼 박 교수의 비판에 입추의 여지가 없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실명비판이 논제가 표방하는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는 등의 장점을 갖춘 형식임에 분명하고 그동안 철저한 비판과 그에 걸맞은 반성이 없던 데서 환부가 더욱 썩어들어 갔던 걸 감안하면 박 교수 정도의 실명비판은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앞으로 죽 설명을 이어가겠지만 박 교수가 '대형교회 이데올로기'를 집중 성토하는 장면에서 복음주의 4인방을 직접 거명한 것과 달리 실명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설교비평'은 정용섭 목사의 입을 빌리는 형식을 취해 정 목사의 언급에 일정 부분 덧붙이거나 약간의 반론을 둔 데서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서는 박 교수가 숨고르기를 하려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단위 본격 비판에 앞서 전선을 지나치게 넓힌 데 따른 화력 분산을 방지하려는 취지 정도로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종의 숨고르기로 받아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더라고 박 교수의 잣대가 절대적으로 옳고 의문의 여지없이 정당하냐는 별개의 문제다. 박 교수 역시 특정 사안을 대하는 데 있어서 그가 몸담은 교단 또는 신학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특정 부분에 대한 서술은 사실관계의 확인이 철저하지 않은 한계를 드러낸다. 신학이 광대하신 하나님을 전부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제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도 그가 가르침 받은 신학의 범주 내에만 자유로울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신학 또는 다른 입장을 다르다는 이유로 배격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제각기 차이가 있는 교단 또는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둔 이유를 가늠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전부 맞아서가 아니라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용인하시는 정도의 이해만으로도 적잖이 겸손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도 다른 누구를 비판할 수 없다면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냉혹한 비판이 아니라 애정어린 비판이 필요하고 맹목적 비난으로 점철된 비판이 아니라 대안을 갖춘 건설적인 비판이 요구되는 것이다. 또한 비판을 받는 입장에서도 당장은 그 비판이 뼈아프지만 사적 이해를 넘어 최대한 공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비판과 수용의 상호 공명이 난마처럼 얽힌 한국교회의 제 문제를 푸는 열쇠로 작동하리라 믿는다. 쾌도난마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문제를 정의하기에 앞서 답부터 구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린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정확한 처방을 위해선 현실문제에 대한 진단이 필수적이라는 사실, 재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파국을 헤쳐 나가기 위한 '멈춰 서서 생각하는' 성찰적 비판과 대안 모색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에 비춰볼 때 더없이 필요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박 교수의 철저한 자기비판은 적실하며. 그 실질이 담긴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박 교수는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에서 크거나 작은 교회를 막론하고 그 안에 넓게 포진한 성장제일주의의 확대재생산 구조, 이에 병진하는 세습 등 사익추구 현상의 만연, 영적 성장 없는 교인의 양산, 말씀이 빠진 채 변죽만 울리는 설교 등 한국교회의 제 문제를 심층 고찰하고 있다. 책은 총 7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한국 교회가 실패한 자리가 다시 시작해야 할 자리〉~ 제4부, 〈목사가 문제이자 해답이다〉에서 박 교수는 큰 교회나 작은 교회가 너나 할 것 없이 복음주의 4인방이 세운 대형교회를 전범으로 삼아 몸집 불리기에 나서는 현상을 강도 높게 지적하고, 교회의 성장제일주의가 각종 비위와 부패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으며 작금의 현실이 그 결과라고 진단한다. 대안으로 대형교회의 자발적 분립과 군소교회 지원, 적정 수의 작은 교회 태동 필요성을 담았다. 교제와 양육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교회 모델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는 장이다.
제5부, 〈한국 교회 설교, 이래도 되는가〉~ 제6부, 〈아름다운 성령의 얼굴이 나타나는 설교〉에선 설교를 빙자해 사익을 추구하는 목사의 실태를 고발하는 한편 설교본문과 내용이 상반된 설교가 많을 뿐 아니라 입에 담기 거북한 용어와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은 지식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설교는 물론 기독교를 우세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부끄러운 목사의 자화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장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현대신학과 철학을 어설프게 읊어 유식한 척하기보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자랑하는 설교자가 되는 것이 백번 낫다"는 박 교수의 말이 이 장을 갈무리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제7부, 〈월요일 아침의 강단〉은 일종의 단상으로 무례한 기독교의 배경이 된 우악스러운 전도와 상업화된 기독교방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한 전도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타국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한 채 벌이는 패권적 선교로 한국 기독교가 자주 도마에 오르는 판에 안방에서마저 유사한 문제로 손가락질 당하는 건 여러모로 온당치 않다고 본 것이다.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성장만능주의' 이대로 둘 건가?
"대형 교회는 1970~80년대에 영적 추수가 한창일 때 태동하였다. 그렇게 거둔 영적 수확으로 자체 교회 몸집 불리기에만 매진하지 않고 이 사회의 빛이 되는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데 주력했다면, 지금 한국 교회 상황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박 교수가 대형교회가 지닌 잠재력을 폄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대형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한 구제와 사회봉사 활동에 조직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 다만, 대형교회가 그 일에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지 않을 뿐이다. 오히려 대규모 사업의 경우 작은 교회들이 힘을 합쳐 일을 처리하면 작은 교회 편에서 건전한 성장을 꾀하고 섬김의 의미를 확산하는 등의 이점이 크다는 입장이다. 재정과 행정적 측면에서 열악한데 성장의 기회마저 박탈당하면 사실 작은 교회는 설자리가 별로 없다. 대형교회의 수가 많아질수록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잦게 되는 것도 작은 교회의 입지를 좁히는 요인이다. 덩달아 신규교인마저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면 작은 교회의 곤란은 불가피하게 가중된다.
이런 상황들이 대형교회의 그늘에 가린 작은 교회들의 현주소였다고 진단한 박 교수는 대형교회가 무한히 확장되는 경우란 없다고 지적한다. 대형교회라도 필연코 포화상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때에 맞는 정체를 일시적 현상으로 오판하기 쉽지만 쇠락의 길로 급속히 빨려들어가는 대전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실제 그와 같은 전철을 한국교회가 밟아왔다고 박 교수는 보고 있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교회문제가 다발성으로 터져 잠재적 교인은 물론 기존 교인들마저 고개를 돌리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고 박 교수는 말한다.
대형교회의 흐름이 한국교회에 대세를 이루며 폐해를 노정하는 동안 성령론에 천착한 박 교수가 그 정황과 사실관계를 놓쳤을 리 없다. 그가 논증의 근거로 삼은 자료만 해도 상당 수준에 이르는 등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는 박 교수의 노력은 가히 범상치 않다. 박 교수는 획득한 정황증거와 사료만으로 용이하게 사실관계에 접근해 들어갔을 테고, 그 안에서 사실관계에 담긴 대형교회의 패권적 현실모순을 적출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어 문제의 원인이면서 한국교회에 두루 교범으로 받들어진 '대형교회 이데올로기' 문제를 혁파하지 않고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강도높은 비판의 밑바탕에 저류와 같이 흐르는 배경이 그런 것이다. 신학자로서 학자적 양심과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영적각성이 도화선이 되었으리라는 짐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날선 비판과 예리한 주장이 종횡으로 비판의 수위를 늘려가는 박 교수 특유의 논지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형교회 이데올로기로 인한 각종 부정적 부산물이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형국에서 한 명의 신학자가 이편을 막아서기란 버거웠을 일임에 틀림없다. 각종 징후와 예후에서 박 교수는 한국교회와 함께 벼랑 끝에 서 있는 절박한 심정을 가졌을지 모른다. 세상을 능가하는 술수와 도를 넘어선 사리사욕의 추구,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각종 추문, 불법과 탈법적 자리다툼에 근원이 있다는 주장을 하기가 그 역시 달갑지 않았을 터다. 특히 두루 존경받는 옥 모, 하 모, 이 모, 홍 모 목사 등 복음주의 4인방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들이 세운 1세대 대형교회가 문제의 핵이라고 지목하는 건 더더욱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한국교회가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에서 누구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덧붙여 박 교수는, 복음주의 4인방 1세대가 대형교회를 세우는 동안 그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 축복의 전형적인 형태라는 인식이 한국교회 내에 고착화되었고, 크건 작건 교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몸집 불리기에 나서면서 세습과 이권다툼 등의 갈등이 촉발되고 그 연장선에서 미성숙한 종교인이 양산되는 가치전도현상이 빚어졌으며, 그들 4인방 중 다수가 그와 같은 문제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손을 놓아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박 교수는 이제라도 대형교회가 자발적 분립 또는 축소, 군소교회에 대한 지원, 대형교회 교인의 군소교회 파송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촉구하면서 그 방안이 유효적절하게 교회가 본래 목적대로 구령과 교제, 양육에 합당한 역할에 쓰임 받는 길이며 대형교회가 안고 있는 현재적이거나 잠재적인 불협화음을 막는 거의 유일한 해법임을 거듭 천명한다. 분당의 모 대형교회 목사가 교회분립에 관해 적극적인 의사를 밝히고 신규교인의 주변 교회 등록을 권장하는 등의 선언을 한 데 적잖이 고무된 바 있다. 교회원로가 성장제일주의에 경도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분위기도 일부 형성되어 있는 만큼 차제에 큰 교회와 작은 교회에 두루 퍼진 '대형교회 이데올로기'의 연결고리를 확실히 끊어내자는 게 박 교수의 복안이다.
요약하면 박 교수가 한국교회의 근본 문제를 '대형교회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보고, 각종 부정적 부산물을 쏟아내는 해당 이데올로기를 혁파하는 방안으로 대형교회의 분립을 기본으로 한 영성회복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교제와 양육이 가능한 적정 규모의 교회를 정착시켜 새로운 도약과 영적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게 본래 취지다.
이 책이 출간된 지 3년이 흘렀지만 박 교수의 해법에 공명하는 흐름이 일지 않는 건 장래를 생각할 때 대단히 큰 패착이자 현실적으로도 무척 안타깝다. 그러는 사이 지적한 난제들은 또 다른 양상으로 비화되고 있다. 당사자는 자숙과 반성은커녕 그 뻔뻔함이 도를 넘어섰다. 교회는 패권 공방으로 제 모습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다. 교회 무용론이 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벽을 마주하는 심정이 이런 걸까?
'말씀 빠진' 설교, 영성의 빈곤과 신학의 실종이 원인
"어떤 목사의 설교에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욕망으로 일그러진 영혼의 추레한 몰골이 드러난다. 보는 사람의 낯을 뜨겁게 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교인들마저 그런 헐벗은 영혼의 모습을 전혀 분별하지 못한 채, 복음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경박하기 짝이 없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멘을 연발한다. (중략) 그러니 그런 위인도 교인들의 영적 무지를 이용해 대형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박 교수의 한국교회의 문제에 대한 천착은 '대형교회 이데올로기'의 혁파에서 그치지 않는다. 논의를 연장해 영적 능력과 지적 수준이 두루 모자란 목사들이 막말과 추문으로 교회를 우세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꼬집는다. 그런 목사들의 설교가 본문과 내용이 전혀 다르게 흐르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박 교수는 그런 교회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영적 수준이 심각함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이 축복한 교회라는 이데올로기를 부추긴다고 덧붙인다. 입에 담기조차 남세스러운 말에 "아멘"으로 답하는 교인을 대하고는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이러한 지적은 '대형교회=하나님의 축복이 임한 교회'라는 등식을 강제해온 대형교회 이데올로기가 '전혀 영적이지 않은 목사가 시무하는 대형교회'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박 교수는 교회가 대형교회 이데올로기에 올라타 성장에 목매닮으로써 '교회의 몸집을 불리지 못하는 목사=영적 능력이 형편없는 목사'라는 또 다른 등식을 만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교인들이 몸집을 키운 목사를 떠받드는 동안 목사는 신적 권위라도 부여받은 양 행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표현이 교회 강단에서 버젓이 흘러나오는 경우가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라고 박 교수는 한탄한다. 하나님을 대놓고 멸시하는 악행에 둔감해진 목사와 그런 목사를 두둔하는 교인들이 있는 한 '말씀 빠진' 설교가 설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이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박 교수가 그런 교회를 '삯꾼' 교회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장세는 정체를 넘어 오래 전에 감소추세로 돌아섰다. 지엽적인 이유를 대기보다는 말씀이 사라진 데서 그 근본원인을 찾아야 한다. 죄를 꾸짖는 메시지가 결락된 뒤란으로는 회개에 이은 구원의 복음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십자가 속량과 부활의 은혜가 빠진 복음은 복음을 가장한 유사복음으로 교인들을 죄악으로 이끌 뿐이다. 교회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성경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갈라디아서 5:9)"고 했다. 성장제일주의의 열차에 올라타 무한 질주하는 동안 정작 제일 중요한 복음이 새나가는 걸 놓쳤다면 교회로선 전부 다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원리가 말씀에 기초하고 있음은 누누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빠진 설교를 속빈 강정에 비유하는 것도 매한가지다.
더 나아가 박 교수는 뼈아픈 지적 하나를 내놓는다. "말씀의 깊이에 천착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는 설교가 많다"는 평가에 이어 이 문제의 핵심에 "말씀을 알아먹지 못하는 설교자가 가로놓여 있다"고 일갈한 것. 그런 설교자가 "속빈 설교를 과잉된 예화, 종교적인 여흥을 돋우는 개그, 피상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 잔소리같이 식상한 도덕률을 읊어대는 닦달로 가득 채우고, 구색 맞추기식으로 성경 말씀을 끼워 넣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막히게 포장해 낸다"고 비판의 수위를 높여간다. 박 교수는 이들의 설교를 "감성의 표피층만 자극한 채 영혼에 깊은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는" 설교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우스개소리나 하고 다분히 선동적이며 도덕률이나 읊어대는 속빈 설교의 예로 곽 모, 김 모, 이 모, 장 모 목사의 설교를 꼽았다. 대형교회 이데올로기의 원조로 복음주의 4인방을 단죄(?)한 데 이어 한국교회의 내로라하는 설교자들을 비판대 위에 세운 것은 그만큼 박 교수의 비판이 주례사 비평 또는 양비론과 대립각을 이루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록 설교비평을 대부분 정용섭 목사의 저작을 인용하는 데 할애하고 있지만 내용을 보면 비판의 수위가 얼마나 전방위적이고 철저한지 감지할 수 있다.
박 교수는, 곽 모 목사가 지적이고 세련된 설교라는 외피에 숨어 실제로는 삶의 지혜와 정보를 전달할 뿐 그걸 설교라고 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시하면서 그의 설교 어느 곳에서도 성경 본문을 찾지 못했다고 비판한 데 이어 김 모 목사의 설교에선 주조를 이룬 영웅서사가 그의 빼어난 입담에 의해 전면에 나서느라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지적한다. 이들과 달리 이 모 목사의 설교는 외견상 성경 본문에 충실한 듯하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능력이 빠진 채 인간의 종교적 심리와 그 해결책만 난무했다고 낫게 평가한 한편 웃기는 설교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장 모 목사의 경우는 내용없는 설교를 재담과 맞바꿔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로 둔갑시켰다고 혀를 찼다. 더불어 욕망으로 얼룩진 목사의 선동 수단으로 전락한 설교 당사자로 윤 모 목사를 거론하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박 교수는 "그리스도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그 나라의 축복과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진술이 꽉찬 설교"를 아름다운 성령의 얼굴이 드러나는 설교의 예로 들면서 역시 정용섭 목사의 책을 인용해 예에 부합하는 설교자로 옥한흠 목사, 탁월한 복음주의 강해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판넨베르크를 꼽고 있다. 세 명의 설교자를 평가하는 부분에 있어서 박 교수가 정 목사와 견해차를 드러내지만 종합해 보면 박 교수가 이상적이라고 본 설교는 칼뱅의 다음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찍이 칼뱅은 "말씀과 성령은 항상 같이 가야하며 성령이 없이는 말씀도 아무 효력이 없다"고 역설했다. 박 교수는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는 설교를 위해 먼저 설교자 자신이 성령께 온전히 사로잡힌 도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야 비로소 목사가 교회 성장과 목회 성공에 매달리지 않고 본래 설교가 지향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교인들 또한 세상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을 이용하려는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한 설교는 마치 봉인된 책처럼 설교자는 물론 교인들에게 당혹감을 갖게 할 뿐이라는 그의 지적은 옳다.
성령의 조명에서 멀어진 설교들이 궁극적으로 헛된 세상의 영광과 성공을 위해 청중의 요구와 취향에 맞춰 복음을 상품화했으며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설교가 한국교회를 시들게 한 양 극단, 즉 무율법주의와 율법주의의 폐단을 낳았다는 평가 역시 곱씹을 만하다. 박 교수는 값싼 은혜의 복음이 삶과 유리된 믿음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도덕적인 해이와 방종을 조장했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는 교인들을 새로운 율법주의의 올무에 빠지게 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대안으로 설교자들에게 복음주의적 영성과 신학적 소양을 주문하고 있다.
끝으로 박 교수는 "말씀과 성령에 사로잡혀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과 은혜를 신실하게 선포하기 위해 자신의 청춘을 아낌없이 불태우는 젊은 설교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야 "무너진 강단을 수축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함께 하는 설교의 진수가 무엇인지 밝히 보여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기대감을 내비친다. "그런 이들의 출현만이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쇄신될 수 있는 희망"이라는 말 역시 잊지 않는다.
무례한 기독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한국교회 이미지는 심히 일그러져 있다. '개독교'라는 참담한 용어가 그들의 눈에 비친 교회의 이미지가 어떠한지를 가장 원색적으로 표현한 것일 게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세상의 비난을 그들의 악함과 기독교에 대한 반감 표출이라는 식으로 간과하거나, 교회가 세상에서 항상 받아 왔던 부당한 오해와 핍박의 한 형태 정도로 편하게 해석해 버린다. 그러나 세상의 지탄과 비난의 근거를 상당 부분 교회가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런 옹색한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형교회화 현상과 내용없는 설교에 한정되지 않는다. 몇가지 요인을 예로 들어 지금과 같은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했다고 보는 건 단견이다. 적어도 몇몇 주된 요인에 이어 여러 다양한 변수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참담한 결과를 만들었다고 보는 게 보다 적확한 판단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몇가지 요인에만 착목하면 복합적 형태로 축적된 한국교회의 문제가 마치 몇몇 환부만 도려내면 회복이 가능한 수준이라도 되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다룰 위험성이 한껏 높아진다. 다음 수순으로 느슨한 조치에 동의하기 쉽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한국교회의 문제는 내부로부터 하나 둘씩 썩어들어가 한 순간에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마침내 외부에 그 속을 남김없이 쏟아낸 상태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 그 상태를 한마디로 정리한 말이 '개독교'임에야 달리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느 때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바닥을 헤매고 있다.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던 우리 민족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적대시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데는 분명히 배경이 있을 것이다. 단, 그 배경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개독교'로 상징되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교회가 줄곧 받아왔던 부당한 오해와 핍박의 한 형태'로 치부하면 답은 영원히 없다. 이제라도 제대로 정신차려야 한다. 쓸모없는 가지는 물론 썩은 뿌리까지 도려내려는 파부침주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그 점을 박 교수는 다음의 말로 정리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쇄신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 속에서의 사명, 즉 전도와 선교는 불가능하다."
박 교수는 이제야말로 교회의 본질을 반영하는 이미지 갱신 뿐 아니라 그동안 구태의연하게 행해 온 전도와 방송, 출판의 행태를 면밀히 재검토하고 시정함으로써 일대 전환을 꾀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사실 가장 빠른 때라는 격언은 여기서도 통한다. 박 교수는 재검토 및 시정의 대상으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등 구호 일변도의 노방전도, 후원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함량 미달의 설교를 내보내는 방송, 장삿속에 눈이 어두워 영성을 고무하지 못하는 책을 양산하는 출판을 도마에 올리면서 전도와 방송, 출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박 교수가 문제 삼는 건 방식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구호성 전도방식은 하나님나라가 내세에 국한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관계중심이 아닌 일방적 전달 방식이라는 점에서 복음이 전달해야 할 이미지를 훼손하고 반감과 혐오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라고 보았다. 타종교에 대한 공격성을 지적한 맥락 또한 이와 유사하다. 박 교수가 이에 대한 해법으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을 인용한 것은 두루 곱씹을 만하다.
더불어 박 교수는 기독교 방송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가 그들이 낸 후원금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에 비판적이다. 후원금에 기초한 방송 행태를 방송 상업주의로 격하시킨 박 교수는 기독교 방송이 전도와 선교에 적합한 매체가 되려면 방송 상업주의부터 배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개교회 선전과 교인 모으기의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는 설교 방송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그 대안으로 기독 강좌와 문화 마당, 교회 이슈와 시사 이슈, 그리스도의 발자취 소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 개발을 예로 들었다. 난립해 있는 기독교 방송을 단일화하고 범교회 차원의 재정 지원 필요성을 제기한 부분은 현실적으로 지나치게 멀리 가지 않았나 싶다.
기독교 출판 역시 박 교수의 매서운 눈을 비켜가지 못했다. "가장 무게 있고 격조 높고 진중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글들이 그 표현과 내용과 논리에 있어서 조잡의 극치를 보였다"는 게 박 교수의 판단이다. 단적인 예로 신학적 검증 없이 무분별하게 출판되는 천국과 지옥 체험기, 성경이 밑바탕에 흐르지 않는 방언 관련 책을 꼽았다. 대부분 은퇴 후에 저술활동을 하는 미국 칼빈 신학대 교수들을 특별히 언급한 데서 보듯이 박 교수는 섣불리 책을 쓰기보다 사고와 신학이 무르익은 뒤에 책 쓰기를 권장하는 편에 선다. 그래야 업적 쌓기와 공명심에 사로잡힌 저자가 등장할 싹을 베고 출판사 쪽에도 장삿속에 기댈 빌미를 주지 않게 된다고 본 것이다. 고개를 주억거릴 조언임에 틀림없다.
정치계와 경제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위치에 오른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 이외에도 유명인에 이름을 올린 인사들 중에 그리스도인은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사실이 그럼에도 그들의 헌신으로 한국사회가 바뀌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하는 현실은 지금 여기의 문제로 가슴 아프게 각인되어 있다. 그들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뒤 솟구치는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개독교의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하고 기독교 관련 글은 올라오는 족족 속칭 '까고 보는' 풍토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 사실관계를 따져보자는 요구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이렇듯 앞뒤가 꽉 막힌 듯한 상황에서 우리가 거듭 마주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근본적으로 무엇부터 틀어진 걸까?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은 그 답을 찾아가는 썩 괜찮은 나침반이었다.
이 나침반을 쥐기 전 한국교회의 문제는 난맥상이 얽히고설킨 그야말로 복마전 같았을 뿐이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정치한 해법의 가능성을 열어줄 진단은 또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에 관해 박 교수는 성실하게 묻고 답했다. 그 덕택에 박 교수가 시선이 분산될 만한 지점에 세워 둔 이정표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특히 박 교수가 한국교회 문제의 주된 요인에 대형화와 텅빈 설교를 두고 비인격적 노방전도, 기독교 방송의 상업주의, 질 낮은 도서를 양산하는 출판 상황 등을 상당 변수로 지목한 데서 선택과 집중을 통한 통합적 접근의 중요성을 근거리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박 교수가 근원적 문제와 거기서 변주된 제 문제를 구분해서 다루는 동안 독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교회의 문제를 총체적 난국의 관점에서 가슴 쓸어내리면서 보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박 교수가 아니었다면 필자 역시 한국교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특정 환부 몇 군데만 건들면 회복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터였다. 한마디로 표피적 접근과 근시안적인 해결방식을 고수했을 거란 얘기다.
박 교수는 숙제도 안겨주었다. 박 교수의 논지가 누구보다 철저하고 그 논증방식이 명료하다는 점은 두루 인정하지만 그가 수학한 학파적 관점을 뛰어넘기엔 그에게 그 울타리가 견고했던 것 아니냐는 아쉬움 같은 것이 스멀거렸기 때문이다. 가 보지 않은 길은 나쁜 길이 아니라 미답의 길일 뿐으로 누군가 그 길을 걷고 있다면 본인이 직접 그 길에 들어서기 전에는 평가를 뒤로 미루는 자세가 박 교수가 누누이 강조한 온유함과 겸손으로 섬기는 예에 부합할 것이다. 특히 그의 견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은사주의 또는 순복음 계열의 성령론이나 속칭 번영신학으로 알려진 제반 신학적 입장에 대해 백안시하기보다는 일정 기간 거리두기를 하는 편이 보다 적절했으리라는 점을 밝힌다. 그 외 박 교수가 따져 묻고 대안으로 제시한 각각의 문제에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박 교수의 말마따나 교회가 대형화되면 보다 전문적인 양육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부질없는 꿈이 되었다.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가 용이할 거라는 가능성 또한 판판히 벽에 부딪혔다. 단순히 꿈이 부서지고 벽을 마주한 답답함만이 아니라 추문과 세력다툼, 이합집산이 가파르게 솟구치는 소리로 귀마저 따갑다. 명망 있는 설교자가 많아질수록 양들이 다양한 먹거리로 배를 불리듯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상태가 몰라보게 나아질 거라는 희망 역시 잿빛 전망으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령의 열정만 있으면 다 된 줄 알았던 전도에 가장 중요한 성령이 뒷전으로 빠진 사실 또한 뼈아프게 지켜보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물량주의가 기독교 방송을 상업화로 물들게 하고 기독 출판 역시 기독교 교육 목적 와의 길을 기웃거리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박 교수가 실증하고 분석한 것처럼 참혹했다. 영적 대각성 없이 교회가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살 떨리게 목격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박 교수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쇄신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 속에서의 사명은 불가능하다." 한국교회가 언제까지 주목받는 교회가 되리라고 믿나? 이미 오래 전에 누수가 있었고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화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맛을 잃은 교회의 말로는 참담했다. 몰락 직전에 교회는 신뢰를 잃었고 걷잡을 없는 추문에 휩싸였었다. 더 이상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권능으로 움직이는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을 때라는 말이 하나마나한 말이 되어선 안 된다.
자료제공: 크리스찬북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