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 124:1-18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원수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에, 원수들이 우리에게 큰 분노를 터뜨려서, 우리를 산 채로 집어삼켰을 것이며, 물이 우리를 덮어,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갔을 것이며, 넘치는 물결이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를 원수의 이에 찢길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신 주님을 찬송하여라. 새가 사냥꾼의 그물에서 벗어남같이 우리는 목숨을 건졌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 났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설교문
*무엇을 흘려보내나?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교회설립 108주년을 맞으면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가히 수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지난 20세기와 21세기 초반에 걸쳐서 이 교회는 수많은 시린 영혼들을 품어주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긴 역사를 자랑만 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 개신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사뭇 날카롭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가 세속의 물결을 거스를 능력을 잃어버린 채 욕망의 파도 위를 부평초처럼 떠다니고 있음을 세상은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마땅히 교회 설립을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자꾸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주간을 보내면서 바울 서신에 나오는 인사말들을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후, 편지의 수신인들에게 '은혜와 평화'의 인사를 건넵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을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거룩한 백성'(롬1:6-7), '신실한 형제자매들'(골1:2)이라 일컫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호칭 앞에 붙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라는 구절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그 한 마디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말과 행위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엡1:23)이라고 말합니다. 충만함(pleroma)이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인데,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에너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충만함으로 세속의 물결을 거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상처입은 이들이 후송되는 야전병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로 흘러 들어온 은총과 새로운 세상의 꿈을 세상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발원한 물이 서서히 흘러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되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죽은 물이 살아났고, 다음에는 시들었던 생명들이 살아났습니다. 유럽의 교회당에 가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배당 출입구 쪽 계단이나 바닥이 마치 부채를 펼쳐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혹은 물결 무늬로 형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생명의 전달자가 되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 개신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좀 억울한 이들도 있고 일반화시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합니다만 세상의 평가는 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세상 평가는 그렇다 해도 하나님의 인정이라도 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36년 전 이 교회를 건축하고 봉헌할 때 당시의 담임자이셨던 박정오 목사님이 선택한 설교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이 성전을 허물라'입니다. 눈물겨운 헌신을 통해 지어진 건물을 보며 모든 교우들이 감동에 젖어 있었을 겁니다. 교인들은 어쩌면 따뜻한 감사와 격려의 말, 그리고 감동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우리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다면 새로운 건물은 오히려 하나님의 무덤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순례자로 산다는 것
다시 한번 돌이켜 봅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교회는 우리 영혼이 새롭게 빚어진 곳이고, 거룩한 백성으로 초대받은 곳입니다. 어떤 이는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교회에 다녔고, 어떤 이들은 중도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부름받은 형편은 각기 다르지만 우리의 지향점은 분명합니다.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속상한 것은 신앙이 습관이 되어 제 자리만 맴도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이들은 자꾸만 자기를 부정하면서 더 큰 세계를 향해 성장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부름받았을 때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에서 벗어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부름받았을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낯선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은 광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해남에 있는 일지암 암주인 법인 스님은 '출가'는 삶의 큰 전환이라면서 "무지에서 지혜로, 이기적 욕망에서 나눔으로 삶의 방향을 선택한 것"이라 말합니다. "출가는 단순히 삶터의 이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삶의 가치와 생활방식의 근원적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2016년 4월 27일자 한겨레신문, <선택은 도피가 아닌 '위대한 포기'>). 스님의 말이지만 배울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생활방식의 근원적 전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전환을 한사코 거부합니다.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잊혀졌습니다. 이게 우리 삶의 실상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12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사가 붙어 있습니다. 순례자는 일상의 일들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먼 길을 걷는 동안 그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인연 앞에 잠시 멈추어 서기도 하지만, 대개의 시간은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마련입니다. 지금까지 맺어왔던 다양한 관계들을 반추해보면서 자기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돌아보고, 또 새로운 삶을 다짐하게 됩니다. 머나먼 순례길을 가는 동안 남을 탓하는 마음은 절로 스러지게 마련입니다.
순례자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1) 시간 속을 바장이는 이들은 누구나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가끔은 천애 고아가 된 것처럼 아뜩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생이 참 든든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내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어떤 이들을 편드실까요? 홀로 자족하는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다른 이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이들 또한 아닐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서기 어려운 사람들, 강자들에 의해 인권을 유린당하고, 아름다운 삶의 기회를 박탈 당한 사람들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무정한 세상에 의해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들, 짓밟힌 사람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시고 그들의 살 권리를 되찾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원수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에, 원수들이 우리에게 큰 분노를 터뜨려서, 우리를 산 채로 집어삼켰을 것이며, 물이 우리를 덮어,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갔을 것이며, 넘치는 물결이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말았을 것이다."(2-5)
'원수의 분노', '물', '홍수', '넘치는 물결'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현실을 일컫는 말들입니다. 물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혼돈'의 물을 연상시키기 위함입니다. 여러 해 전 동일본을 덮친 거대한 쓰나미를 보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시커먼 물이 일렁임조차 없이 밀려올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배도, 자동차도, 큰 건물도, 사람도 그 물살 앞에서는 종이로 만든 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그런 큰 파도에 휘말리는 것 같은 암담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갑'의 무도한 폭력 앞에서도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는 '을'의 비애가 많습니다.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종업원의 무릎을 꿇리고, 따귀를 때리고, 모욕을 주는 이들, 회사 직원을 자기 종처럼 여기는 이들이 어쩌면 이리도 많아졌습니까?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믿는 이들은 조금 당당해져야 합니다. 돈이나 권력 앞에 자발적으로 머리를 숙이지 않아야 합니다. 재작년 순례길에 나섰던 제가 가장 깊은 감동으로 만난 사람은 4세기 콘티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학을 정초한 사람 가운데 한 분입니다. 동방교회의 전례를 완성한 분으로 존중받기도 합니다. 그는 '황금의 입'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설교를 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언자의 가슴을 타고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권을 누리는 데 익숙해진 주교들과 사제들을 준엄하게 꾸짖었고, 황실에 속한 사람들의 오만함도 서슴치 않고 꾸짖었습니다. 당시의 황후였던 에브독시아는 탐욕에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음모를 꾸며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던 이세벨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황후와 반목하면 자신이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불의를 지적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그는 황후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황후의 권세를 주었다면 그것은 정의를 세우라고 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흙과 재, 풀과 먼지에 불과하고, 인생 또한 그림자와 연기 그리고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듯이, 황제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더 이상 고통과 불행을 지우지 마십시오. 당신은 포도밭과 무화과밭, 기름과 돈,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무덤에 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요아니스 알렉시우 대사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요한 박용범 옮김, 정교회출판사, p.83)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결국 황후 에브독시아와 그의 결탁한 다른 주교들의 모함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되고, 또 다른 귀양지로 옮겨가는 중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예언자의 운명을 그대로 살아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엣가시같은 신실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조차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불멸입니다. 예수님도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라'(마10:28) 하셨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려면 이런 당차고 옹골진 믿음의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이라는 부정적 가정은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살려는 이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는 복제본이긴 합니다만 백범 김구 선생님이 쓰신 글씨가 한 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 이것이 백범을 사로잡은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편인가?" 저는 하나님의 외로움에 대해 가끔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외로우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은 이제 하나님 편에 서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거대한 체제 변혁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존중과 아낌과 사랑으로 촉촉하게 적셔 줄 수는 있습니다. 그들 속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호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악에 협력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에 의해 그 존엄성을 짓밟힌 사람들의 품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지며리 살아낼 때 우리 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뿌리가 생겨납니다.
*주님이 도우신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을 찬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원수의 이에 찢길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신 주님을 찬송하여라. 새가 사냥꾼의 그물에서 벗어남같이 우리는 목숨을 건졌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 났다"(6-7)
찬양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수의 아귀 찬 손아귀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물은 '속박과 부자유함'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옴쭉달싹 못하게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달콤한 유혹도 거친 위협도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런 유혹과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주십니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 났다". 강렬한 선언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에 근거해 터져나온 고백이지만, 앞으로도 그러하실 거라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는 고백이요 선언입니다. 순례자인 시인은 확신에 차서 외칩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8) 이 고백이 진실하다면 괜히 주눅 들어 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 머물기 위해 정신을 차린다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십니다.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사랑에 비끄러매는 끈이 될 것입니다.
교회설립기념일인 오늘,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편임을 확신하면서, 이제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설 차례입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땅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신앙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사의 한 부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