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14:21-28
바울과 바나바는 그 성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제자를 얻은 뒤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고, 믿음을 지키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한 뒤에,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고,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맡겼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비시디아 지방을 거쳐서 밤빌리아 지방에 이르렀다. 그들은 버가에서 말씀을 전한 뒤에,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향하여 갔다. 이 안디옥은, 그들이 선교 활동을 하려고,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내맡기고 나선 곳이다. 이제 그들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 그 곳에 이르러서 그들은 교회 회중을 불러모으고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지냈다.
요한계시록 21:1-8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요한복음서 13:31-35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회중)
설교문
1. 오늘 우리는 역사상 가장 난해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 곧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책이 난해한 이유는 묵시록이기 때문입니다. 아포칼룹테인(apokaluptein), 즉 덮여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 비밀을 폭로하는 것, 숨겨진 혹은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는 이야기, 미래에 대한 수많은 상징들과 비유들이 포함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우의적 아름다움과 환상의 힘 때문에 묵시록은 윌리엄 블레이크나 빅토르 위고와 같은 많은 시인들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장미의 이름'도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째 봉인의 예언에 따른 살인사건을 상상한 것이라고 합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은 '지옥의 묵시록'(1979)이라는 전쟁영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책은 역사상 가장 위험한 책 중의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제도 기독교의 체제와 현상유지를 혁명적으로 전복시키고 심판하려고 했던 수많은 소종파들의 이데올로기, 유사 혹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의 이념으로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더 이상 폭력적이지 않고, 모든 피조물이 평등하고 정의롭고 평화롭게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었던 사회 혁명을 추동한 책입니다. 더 이상 착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통 받고 죽임을 당하지 않는 세상, 권세가들이 심판받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계시록, 혹은 묵시록으로 분류되는 이런 묵시문학운동은 주전 2세기에서 기원 후 1세기까지,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 시대 사이의 과도기에 번성했습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와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만 경전에 포함되어 있지만, 그 외에도 '12족장의 유언', '추수절의 묵시록'은 외경에 남아있고, 아브라함의 묵시록, 에스드라의 묵시록, 모세의 묵시록, 베드로 묵시록, 도마의 묵시록 등 수 많은 묵시문학적 문헌들이 당시에 유포되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주후 95년에서 100년 경, 소아시아 지역에서 로마 제국에 의해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도미티안 황제의 신격화와 숭배강요, 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폭력의 위협, 빈부 양극화, 모든 것이 시장으로 통하는 세상, 물질적 풍요에서 오는 안락함의 위험이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직면한 현실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현실, 곧 로마 제국의 폭력적 억압, 암울한 현실에 대한 심판과 체제의 파국적 전복, 그리고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을 상징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2. 그런데 우리는 요한계시록과 같은 종교적이고 묵시문학적인 미래 전망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는 수많은 예언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21세기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그러나 종교적 환상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자연 과학자, 역사학자, 경제학자들이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언어는 더 이상 종교적 상징 언어가 아닙니다.
1962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쓴 '침묵의 봄'에서 시작하여 그 후에 쌓인 수많은 미래 전망서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미래는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암울하기만 합니다.
물론 순진한 낙관론으로 끝나는 예언서들도 있습니다. 소방대원이 불을 질렀다고 소방대가 출동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파국적 상황도 결국 인간이 기술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스스로 극복해 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결론은 암울한 세계 종말의 예언, 체제적 대안의 모색과 병행하는 인간의 윤리적 거듭남에 대한 호소 등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는 이른바 '불확실성의 시대', '위기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구폭발, 특히 개발도상국가들의 인구증가와 인구 도시집중, 기후변화와 수자원의 고갈, 기근과 식량안보 문제, 첨단기술의 발전과 실업의 급증, 세계경제의 블록화와 초국적 기업의 확산,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와 지역분쟁, 종교적 근본주의와 종교분쟁과 테러, 통신혁명과 정보화 사회의 문제 등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한 이들의 예견은 전통적인 묵시문학이나 계시록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종말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1984년 인도 보팔시 유독가스 사고,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핵연료 폭발사고, 1995년 일본의 고베 대지진, 1998년 양쯔강 대홍수, 2001년 '9.11'테러, 2003년 프랑스 폭염으로 15.000여 명 이상의 시민 사망,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스시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파키스탄 북부지방 대지진, 2007년 인도네시아 해일,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일본 동북부 지역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은 물론, '사스'(SARS: 급성호흡기 증후군), '광우병' '에볼라 바이러스' 등은 가까이 다가온 인류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22일(금)은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이 행성은 45억 6700만년의 나이를 먹었는데, 지금까지 지구는 다섯 번에 걸친 대 멸종사건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인 다섯 번째 대 멸종은 지금부터 7000만 년 전(백악기 말), 유카탄 반도의 소행성 충돌 등으로 조류 제외한 육지생물의 75와 공룡이 멸종했다고 합니다. 자, 이제 여섯 번째 대 멸종이 기다릴 텐데, 과학자들은 명백하게 기후변화, 특히 이산화탄소의 증가에 따른 기후변화가 그 유력한 주범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17일 미국 하와이 마우나 로아(Mauna Loa) 화산 중턱에 설치된 이산화탄소 농도측정기에 나타난 숫자는 407.82였습니다. 이 농도로도 이산화탄소는 지구 곳곳에서 폭설과 혹한, 홍수와 가뭄 등 과거보다 훨씬 잦고 강한 이상 기상현상을 일으키고 있는데, 문제는 이산화탄소 증가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엔 산하 '정부간기후변화협의체'(IPCC)는 세계 각 국이 온실가스를 현재 추세대로 배출할 때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수 십 년 안에 450PPM을 돌파한 뒤, 이번 세기 말에는 최대 940PPM까지 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부간기후변화협의체'가 제시한 마지노선은 450PPM인데, 만일 이 최후 저지선마저 뚫린다면 인간을 비롯한 지구 생명체는 사실상 파국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굳이 미래 전망서들이나 정부간기후변화협의체의 보고, 미래충격보고서 등을 보지 않아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후손들에게 더 이상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라는 행성을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인류가 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가 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변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이 있었을 때, 저는 독일에 있었습니다. 평생을 평화와 녹색운동을 해 온 한 동료가 말했습니다. '평생 의식화 교육을 하는 것보다 체르노빌이 더 큰 깨달음과 변화를 주니 차라리 매 년 원자력 발전소 하나씩 터지는 것이 의식화 교육을 하는 것보다 더 낳겠다'고.
그린피스도 말했지요. '사람이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라고.
안다고 변하나요?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위기를 안다고 해서 위기 극복에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유전자 결정론'을 말하는데, 저는 '원판불변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로 씻으면 잠시는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저자는 '회개'하지 않으면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3.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도시와 더불어 음행을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세상의 왕들'(계 18,9)과 '사람과 몸과 영혼을 사고 파는 상품으로 전락시킨 세상의 상인들'(계 18,13)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우상화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때문에 결국 세상은 파멸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킴'으로 응답하십니다(계 11,18).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누구나 돈이 없어도 거저 마실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계 21,3-6).
이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에 상응하는 말씀입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아오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이사야 55,1). 모든 것이 상품이 된 세상,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상 대신에 돈 없이도 사먹을 수 있는 세상, 이런 세상이 예언자 이사야와 요한이 꿈꾸었던 세상입니다.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심판과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로 유예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미래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입니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생명수의 상속이 약속됩니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신실하지 못한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쟁이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계 21.8)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에는 밤도 없고, 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계 21,25). 이것은 죄 지은 사람은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배제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시는 죄를 짓지 않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들을 위해 예비 된 것입니다(계 7,14; 22,14). 다시 말해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 눈물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과 죽음이 없는 곳에는 회개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을 향한 파국은 인간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와 삶에로 방향전환을 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메타노이아', 지금까지 잘 못 걸어온 길에서 돌이켜 본래 가야할 곳을 향하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 회개하는 사람, 나를 경외하고 복종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을 내가 좋아한다'(이사야 66,2)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까이 온 지구의 종말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회개는 '보다 많이'에서 '보다 적게', '보다 빠르게'에서 '보다 느리게', '보다 높게'에서 '보다 낮게'로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전환은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영이신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스리랑카의 신학자 알로이스 피에리스(Aloysius Pieris, S.J)는 '가난으로부터의 자유'가 '가난에서부터 오는 자유'와 결합되지 않으면 우상, 곧 '맘몬'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가난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은 이 지구가 충분한 식량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맘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맘몬을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 '가난에서부터 오는 자유'를 행복하게 누릴 때입니다. 숭배자 없는 우상은 힘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의 시간과 피를 먹고 살면서 생명을 파괴하는 우상, 맘몬으로부터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에게로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