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라의 중심에서 대통령을 보필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모든 관할 부서를 지휘하며 살림을 책임지는 국무총리의 임명을 놓고 한 후보자의 말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일제의 통치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이룩하는 수단이었고, 하나님께서 이런 역사를 미개한 우리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사용하였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 후보의 말을 듣고 그의 역사관과 국가관은 철저히 바벨론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이 땅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은 하나님의 허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은 그런 죄와 악까지도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시고 인생을 향한 선하신 뜻을 세우는 분이다. 그러나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착시키면 구속사와 세속사는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로 움직이는 역사라는 인식 속에서 인간의 주체성은 상실되고 만다.
게다가 땅에서는 가진 자의 횡포와 권력자의 강압으로 인해 누군가는 고통당하고 피눈물 흘리고 울부짖고 있는데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니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서 하나님 나라와 그분을 향한 계획을 발견하라는 것은 광기어린 살인이고 인간을 노예와 동물로 취급해버리는 처사다. 태어나면서부터 해결해나가야 할 수많은 인생의 모순과 한계가 있음에도 이것을 그저 자신의 운명으로 체념시켜버리는 것은 인간을 향한 21세기 노예선언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두 가지의 사상이 대비되고 있다. 바로 바벨론 정신과 예루살렘 정신이다. 전자는 이 땅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으로 제시된다. 국가를 세우고 정부를 운영할 때도 나타나는 어두운 힘의 세력이다. 이 정신이 국가와 정부에 개입되면 제국주의와 독재체제를 지지하고 국가의 폭력과 강제력을 뒷받침한다. 또한 황제중심적인 통치를 위해 모든 것을 계급화시켜서 약자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구조로 정부가 움직인다.
이에 반하여, 후자는 모든 백성이 평등하고 서로에게 환대하고 신뢰하는 정신이다. 이곳에서는 정직과 성실과 노력이라는 가치가 적용되는 곳이다. 전자는 온갖 반칙과 편법과 불법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후자는 그런 가치가 역전되는 곳이다. 땅에서 부르짖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 전자라면 후자는 그런 곡소리가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는 곳이고, 눈에서 멈추지 않는 눈물이 눈물병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공간이다.
필자는 『약자를 위한 예배와 저항의 책: 요한계시록』을 통해 로마시대 황제중심의 신화와 권력과 폭력으로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시고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특별히 로마시대에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제국의 질서와 세상의 가치를 부정하며 살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주목한다. 주님은 남은 자들에게 어린양을 찬양하는 예배를 통해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
책에서는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환란과 핍박과 살인과 폭력의 질서가 세상을 덮고 있어 숨조차 쉬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또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모든 통로를 황제화시키는 이면을 폭로하며 말씀 한 절 한 절을 그 시대의 현장으로 이끌고 간다. 저자의 주해 실력과 사회적 분석 실력 속에는 이미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져 있다. 또한 그 시대 속에서 죽어간 신실한 자들과도 믿음으로 연대하고, 남은 자들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시 로마의 괴물이요 짐승이었던 황제 숭배가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한 폭력과 억압과 살인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우리에게 사이렌을 울린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술된 이 계시록 주해는 그래서 오히려 더 복음적이고 더 성경적이며, 더 하나님의 마음이 묻어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바벨론 정신에 묶여서 풀어지지 않았던 진정한 하나님의 애환과 성도들의 한이 펼쳐지는 울림이다.
또한 이 책은 하늘과 땅을 대조하면서 전자는 비가시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이고 후자는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으로 비교를 한다. 그러나 이 둘을 결코 대립되고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서로 교통하고 동시적인 공간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상호연관성과 불가분리성과 공명성이 있다. 하늘의 진리와 통치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그 통치가 실현된다는 관점을 제공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하나님이 지금 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연대기적 역사에 매여서 시대의 포로가 되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이 카이로스로서 주님이 참여하신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포기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오시는 게 아니라 이 땅을 변혁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 오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그 일에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이 등장하고, 충성과 진실을 통해서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가신다.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과 썩은 것을 도려내시고 치유와 회복과 샬롬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 백성에게 선물을 주신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나라가 무엇이고, 정부의 역할이 무엇인지'하는 생각과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줄 의무와 책임이 있고, 정부는 그 일을 위해 세워진 기관인데 오히려 바벨론 정신으로 물들어 국민의 생명을 물질화하고 이익과 권력을 위해 백성의 재산과 생명까지 사유화화고 이용하고 있다. 로마 시대 속국들이 그 부스러기라도 얻기 위해 제국에 야합하고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일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앞선 자들은 누구나 입으로는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하고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땅에서는 울부짖고 있고 여전히 저 추운 바다 밑에서 어린 학생들의 눈물이 닦여지지 않고 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에 나팔을 불어도 소용이 없다. 생명보다 자본과 이윤에 더 헐떡이는 우상숭배를 고발해도 아무 변화가 없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 자체가 이미 맘몬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경제세계화와 권력독재화를 극복하는 게 쉽지 않다.
이런 짐승적인 세계 속에서 우리의 나라와 정부는 그 황제중심의 논리를 여전히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 논리를 전복시켜서 인간의 생명과 양심과 정의가 지켜지는 새 예루살렘의 가치로 역전시킬 것인가? 이 땅에 세워지는 권위자들은 이러한 기로에서 누가 자신에게 권세와 통치권을 주었는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가와 정부라는 제도와 질서 또한 국민과의 거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며 어떤 가치가 최우선 되어야 하는지, 죽어간 자들의 소리를 기억해서라도 그것을 명심해야 될 것이다.
아울러 이 땅의 교회는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부를 후원하는 기관도 아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과 시민들이 평화와 협력과 질서를 이루어가는 사회에서 사회적 영성이 고갈되지 않도록 파수꾼이 되어야한다. 개인의 구원에만 함몰되어서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절뚝거리며 고철탑과 망루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형상이 무시당하고 소외되지 않도록 사회적 영성의 매체가 되어야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모든 사회적 영성과 관련된 일임에도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하며 여전히 권력에 동조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에서는 불의를 묵인하는 교회를 죽은 교회라 칭하고 교회의 본질이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저항이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땅을 회복시키실 때는 제일 먼저 심판하는 대상이 제국의 질서와 권력자의 횡포에 저항하지 못하는 본질을 잃은 교회라고 한다. 아울러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교회의 예배는 죽은 예배라 하고 첫사랑(약자들과의 연대의식을 잃어버린)을 회복하라고 외치고 있다.
이 책은 오늘 우리의 교회가 교회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바벨론 정신으로 여전할 것인지 아니면 예루살렘 정신으로 역전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교회의 본질과 성도의 회복을 꿈꾸는 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오늘도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역전의 용사가 되도록 격려한다. 그래서 그 용기와 격려를 받기 원하는 자들에게도 이 저항과 예배의 책을 역전의 도구로 소개하고 싶다.
글/ 방영민(전주서문교회 목사)
기사출처/ 크리스찬북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