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영화는 언제나 기괴하고, 유혈이 낭자하다. 현실 공간에서 극이 벌어지지만, 그 이야기 전개는 초현실적이다.
신작 <아가씨>도 이런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무엇보다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의 러브신은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두 여주인공이 서로를 탐닉하는 이 장면은 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이 장면을 보면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어니스 델마와 잭 트위스트의 러브신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주인공은 하룻밤의 사랑을 통해 평생의 연인으로 발전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동성간의 선굵은 사랑을 그렸다면, <아가씨>의 두 주인공의 정사는 서로를 속이기 전, 신뢰를 쌓기 위한 과정에서 이뤄진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금 서로를 탐닉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 동선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퇴폐적이다. 영화는 숙희가 코우즈키(조진웅)의 저택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코우즈키는 조선인이었지만, 친일 행각으로 부를 축적한 뒤 아예 일본 귀족과 결혼해 신분까지 세탁한 인물이다. 책 수집광인 코우즈키는 책 내용을 보다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처제와 조카인 히데코에게 독서 연습을 시킨다. 그런데 그 책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19금 포르노 소설이다.
감독은 일제 강점기 일본 지식인들과 지배계급들의 의식세계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숙희가 히데코의 안내로 서고에 보관 중인 책을 들춰보고 분노하는 장면은 이 같은 의도가 반영됐다고 본다. 그러나 이 장면이 꼭 친일 부역자들의 속물근성을 꼬집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장면 한 장면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하다. 출연 배우들의 일본어 연기도 훌륭하다. 그러나 온 백성이 고통 당하던 일제 강점기에 백작 행세를 하는 사기꾼(하정우)이 친일 부역자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그 와중에 두 여성이 서로를 탐닉하는 광경이 펼쳐지는 건 생뚱맞다.
일제강점기를 고집해야 했나?
감독은 YTN과의 인터뷰에서 "극에 신분제도가 나온다. 하녀와 귀족이 나오는 신분제도가 있고 정신병원이라는 근대적인 기관이 등장한다. 두가지 요소가 충족되려면 한국에서는 그때 밖에 없었다"고 했다. 감독의 설명에도 뒷맛은 개운치 않다. 귀족입네 하지만 이면에 음탕함을 추구하는 속물근성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경향이기에, 꼭 1930년대를 고집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아가씨>의 원작은 영국 소설인 <핑거스미스>. 원작은 빅토리아 시대로 불린 18세기 영국인데, 원작은 도덕적으로 보였던 당시 사회상의 이면을 갈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감독은 이를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로 옮겼는데, 원작에서 나타나는 음울한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일제 강점으로 신음하던 사회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은 장면 곳곳에 특유의 스타일을 남겨 놓는다. 그러나 오로지 스타일만 추구하다가 정작 원작이 담고 있는 정수는 놓친 건 아닐까? 혹시 국제 영화제 수상만 염두에 두고 스타일에 집착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