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젊은 학생들에게 강연할 때
가끔 장기려 박사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한다.
손을 드는 학생은 거의 없다.
그런데 테레사 수녀를 아는 학생은 매우 많다.
외국의 성자는 잘 알면서
한국의 성자는 모르는 현실이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장기려 박사는 무소유 원칙으로 일생을 보내고
10년 전 세상을 떠나셨다.
서울대, 부산대 의대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방 한 칸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소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계셨을 때의 일화다.
어느 생활이 어려운 분이 퇴원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하고 있을 때
장기려 박사가 그 사실을 눈치 채고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 나가게 해 주었다.
이 일을 통해 그의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6.25 때 부인과 자녀들을 북한에 두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월남하였다.
그의 부인은 이광수의 「사랑」에 등장하는
‘안빈’의 모델로 알려진 분이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에이게 한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 김윤경 박사가 북한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기회를 사양하였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