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104:10-18
[주님은,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시니, 들짐승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들나귀들이 갈증을 풉니다. 하늘의 새들도 샘 곁에 깃들며,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지저귑니다. 누각 높은 곳에서 산에 물을 대주시니, 이 땅은 주님께서 내신 열매로 만족합니다. 주님은, 들짐승들이 뜯을 풀이 자라게 하시고, 사람들이 밭갈이로 채소를 얻게 하시고, 땅에서 먹거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를 주시고, 얼굴에 윤기가 나게 하는 기름을 주시고, 사람의 힘을 북돋아 주는 먹거리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들과 레바논의 백향목들이 물을 양껏 마시니, 새들이 거기에 깃들고, 황새도 그 꼭대기에 집을 짓습니다. 높은 산은 산양이 사는 곳이며, 바위 틈은 오소리의 피난처입니다.]
설교문
* 반생명적인 문명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환경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환경이라는 용어 자체가 인간중심주의를 내포한 말이기에 적절치 않아 보이긴 합니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다른 생명들을 주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편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른 생명들을 함부로 대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환경環境'보다는 '생태계生態界'라는 단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생태계란 생물과 비생명이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을 일컫는 말입니다. 인간은 생태계의 질서와 한계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생태계 파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산활동은 늘 주변 생태계의 변형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생명운동을 하는 이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급적이면 생태 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을 적게 남기며 사는 삶을 제안합니다. 생태발자국이란 인간이 지구에서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의식주 등을 제공하기 위한 자원의 생산과 폐기에 드는 비용을 토지로 환산한 지수를 가리킵니다. 지금의 인구가 현재와 같은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구가 하나 더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우리 삶의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보기에 좋았다고 하셨던 세상은 지금 인간들로 인해 속절없이 유린되고 있습니다.
한 달쯤 전에 매스컴에 보도된 강아지 공장 이야기를 아시지요? 마트와 인터넷에서도 거래되는 애완견을 공급하기 위해 번식장이 전국 도처에 널려 있는데, 문제는 애완견을 번식시키는 방식의 반생명성입니다. 값비싼 모견을 구해다가 일년에 3차례 이상씩 강제 임신을 시켜 새끼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그곳은 말이 번식장이지 공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돈벌이를 위해 생명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일은 창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올해 유난히 한반도 전역을 뒤덮고 있는 미세먼지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유입되는 황사도 문제지만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것도 많습니다. 정부는 경유차를 그 주범으로 꼽고 있지만, 미국 NASA 연구팀은 서해안 일대에 많이 세워진 화력발전소가 가장 심각한 오염원이 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얼마 전 통계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 38개 나라 가운데 삶의 질은 28위, 공동체 안전은 37위, 일하는 시간과 삶의 균형 지수는 36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기질은 꼴찌였습니다. 환경부는 막대한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진짜 주범인 공장이나 건설 장비, 화력발전소 등보다는 국민들의 시선을 '고등어'나 '삼겹살'에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고등어나 삼겹살을 구우면 미세먼지가 30배나 나온다고 발표한 것이지요. 규제는 쳐부수어야 할 암덩어리로 인식하고 있는 대통령의 인식에 발을 맞추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후한 핵발전소 문제도 심각합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건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데 여전히 우리는 노후한 핵 발전소를 그대로 재사용할 뿐 아니라 핵 발전소를 더 짓고 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유전자조작(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식품이 늘어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유전자조작식품이란 생물의 유전자 중에서 유용한 유전자만을 취한 후 다른 생물체에 삽입하여 만든 새로운 농축수산물을 일컫는 말입니다. 생산성 제고, 상품의 질 강화라는 명분 아래 추위나 병충해 혹은 제초제에 강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것이 인체에 얼마나 유해한지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암, 자폐증, 치매, 당뇨가 급증하는 것을 세계 최대 종자 회사인 '몬산토'가 개발한 '라운드업' 제초제 성분인 글리포세이트(Glyphosate)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연구가 나오고 있습니다. 글리포세이트는 장에서 몸 속의 독소를 제거하고, 면역 시스템을 강화해주고, 사람들이 행복 호르몬이라 부르는 세로토닌 생성에 도움을 주는 좋은 세균들을 죽임으로써 우울증을 발생시키기도 한답니다. 지금 식당이나 가정에서 많이 사용하는 콩기름, 카놀라유, 옥수수유, 맥당, 과당은 대부분 유전자조작 콩이나 옥수수로 만든다고 합니다. 건강한 삶의 가능성은 점점 줄어듭니다.
* 아름다움의 구원
늘 말씀드리는 바입니다만 경제 논리가 생명 논리를 압도할 때 세상은 죽음의 땅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을 따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풍요롭진 않아도 남과 우정을 나누며 사는 기쁨, 자연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에 감동하며 사는 삶,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설 자리가 되어주고,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삶은 가능합니다. 소유에 바탕을 둔 삶은 늘 우리에게 불만족을 안겨줍니다. 불만족이야말로 우리를 일하게 만드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피로사회'라는 책을 써서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한병철 교수의 최근작 <아름다움의 구원>이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일깨우고 싶어합니다. 저자는 타자들의 은폐된 아름다움에 눈을 뜨자고 말합니다. 타자에게 수모를 안겨주고 혐오감을 표현하곤 하는 세상에서 철학자이자 문화 비평가인 저자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가리키는 방향과 같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읽는 성경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를 반복해서 읽곤 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13:1)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대목은 마치 예수님의 유언처럼 들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욥기 38장부터 42장을 읽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고통에 온통 사로잡혀 있던 욥에게 더 크고 위대한 세계에 눈을 돌려보라 이르십니다. 저 무한한 공간, 깊이를 알 수 없는 창조 세계의 신비 앞에서 욥은 입을 다물고 맙니다. 로마서 8장 31절 이하를 또박또박 읽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롬8:31b, 35a) 이 강렬한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작은 일에 숨막혀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흔들리는 제 마음을 안돈시켜주는 것은 시편입니다. 병상에 계신 박옥식 전도사님도 시편을 읽으며 큰 은혜를 받고 있노라고 말씀하시더군요.
* 생명의 노래를 듣는가?
내 마음이 옹색해질 때 가장 자주 읽는 것이 시편 104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 나의 하나님,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십니다. 권위와 위엄을 갖추셨습니다"(시104:1)로 시작되는 이 시편은 창조 시편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숨결로 지어진 것이고, 지금도 주님의 숨결 안에서 존속되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가없이 넓게 펼쳐진 저 하늘도, 세상을 밝게 비치는 빛도,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도, 온 세상의 물을 다 받아들이는 바다도 다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이 시편을 자꾸 읽다보면 무정하기 이를 데 없었던 세상이 돌연 신비에 찬 섭리의 세상으로 바뀝니다. 계곡 사이를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도,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뭇 짐승들의 마른 목을 축여주는 물도 모두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그 자리에 있습니다. 직접 시인의 말을 들어볼까요?
"주님은,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시니, 들짐승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들나귀들이 갈증을 풉니다. 하늘의 새들도 샘 곁에 깃들며,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지저귑니다."(시104:10-12)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잡지 <전라도닷컴>을 읽다가 괜스레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돋아난 잡초 하나를 뽑으려다 말고 혼잣말처럼 "지도 얼마나 애쓰고 나왔을 것인디" 하고 주저하는 시골 할머니, 연한 쑥을 캐들고는 "지는 크니라고 애쓰고, 나는 캐니라고 애쓰고"(<전라도닷컴> 제167호, 기획특집 '봄의 말씀'을 보면서)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마음이 느꺼워졌던 것입니다. 그 농투성이 할머니들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마음이 아닐까요? 생명이 얼마나 존귀한지 아는 사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없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한 구절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주님은, 들짐승들이 뜯을 풀을 자라게 하시고, 사람들이 밭갈이로 채소를 얻게 하시고, 땅에서 먹거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를 주시고, 얼굴에 윤기가 나게 하는 기름을 주시고, 사람의 힘을 북돋아 주는 먹거리도 주셨습니다."(시104:14-15)
짧은 구절이지만 시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상깊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풀을 자라게 하심으로 짐승과 사람들이 살게 하시고, 포도주와 기름을 주셔서 사람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오늘 우리가 누리고 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만 받아 누릴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미물들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안에 있습니다. 나무들이 물을 듬뿍 마시는 것도 은혜이고, 새들이 거기 깃드는 것도, 산양들이 산에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상투적으로 들릴까 걱정되지만, 그래도 이 이상의 말은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 눈을 뜨면 세상은 더 이상 무정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땅이 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라"(민35:34)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입니다. 생명을 내시고 기뻐하셨던 주님의 땅 말입니다.
* 존재의 근원은 즐거움
일본의 생물학자인 가와바타 구니후미는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돔(히로시마 평화기념관) 근처를 흐르는 모토야스 강의 하구 옆을 지나다가, 간석지에 많은 꽃발게가 모여 일제히 체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꽃발게의 그 행동은 몸이 작을 때부터 행하는 일종의 '구애행동'인데 그 리드미컬한 몸짓이 참 장관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와바타는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문득 게들이 저렇게 체조를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구나. 어떤 생물에게도 살아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구나. 존재의 근원은 '즐거움'이겠구나. 그러니까 누구든 대우주, 대자연이 협연하는 '즐거움'이라는 심포니를 자신 안에, 타자 속에, 모든 존재 속에서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거구나.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미동하지 않는 진실한 생명의 세계가 존재하는 거구나."(가와바타 구니후미, <생명의 교실>, 염혜은 옮김, 목수책방, 2014년 9월 12일, p.136)
존재의 근원은 즐거움이라는 말이 참 낯설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하루하루 산다는 게 기적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우리가 즐거워해도 될까요? 그러고보니 우리 삶이 힘겨운 것은 존재의 근원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복잡한 신학 이론은 몰라도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해야 합니다. 인간의 과도한 탐욕으로 인해 무너진 세상을 조금씩 회복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영국의 리처드 레이놀즈라는 청년은 2004년부터 버려졌거나 사람들이 돌보지 않는 땅에 꽃을 심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름하여 게릴라 가드닝입니다. 그는 삭막하고 험한 세상을 원망만 하기보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성과를 계산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이들을 통해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이들은 이 세상을 생명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의 근원에서 비롯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아주 감깐이라도 벗어나서 하나님의 걸작품 앞에 서곤 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그런 여백이 마련될 때 우리는 비로소 평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아름다운 비전을 기억하시지요? 그는 성전 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줄기가 이르는 곳마다 죽었던 땅이 살아나고, 온갖 생물들이 번성하며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에서 발원된 물이 이런 생명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온갖 피조물들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 이후 우리도 가급적이면 생태 발자국을 덜 남기는 삶을 실천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