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송창근에게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할 새로운 땅이었다. 새로운 각오를 지니고 그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1936년 4월 바닷바람이 싱그러운 부산에 도착한 송창근은 이내 평양에서 생각하고 계획했던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다. 부산 나병원의 울타리 안에서 그 곳에 수용되어 있는 나환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대신, 한 차원 더 앞으로 나아간 새로운 형태의 선교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호주 선교부의 원조를 받아서 부산 남부민동에 빈민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 사회사업체인 ‘성빈학사(聖貧學舍)’를 세웠다. 성빈학사의 ‘성빈’은 물론 성 프란시스의 거룩한 가난, 곧 ‘성빈’을 흠모해서 따온 것이었다. 성 프란시스적인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의 설정이고 제시였다. 그리하여 부산이라는 조선 제2의 대도시의 어두운 그늘에서 신음하는 도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송창근의 선교사업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송창근 목사가 ‘성빈학사’를 통해서 실시했던 사업들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1. 호주 의료 선교사들의 협조 하에 이뤄진 여직공들을 위한 보건사업
2. 교회당을 빌려 주간학교 체제로 무산층 어린이 교육
3. 유치원과 학원 설립 및 운영
4. 매 주일 오후 성경 강좌
5. 일본 유학생들의 숙박 주선
6. <성빈> 잡지 발간
7. <성빈문고> 및 기타 단행본 발간
위와 같은 일들은 각기 앞으로 전개할 사업의 기초가 되는 일들 이었다.
호주 의료 선교사의 의료진을 동원해서 여자 직공들의 건강을 살피는 일은 도시빈민선교의 기본에 속했고, 평일에는 비어 있는 교회를 빌려서 주간학교 체제로 무산층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일도 그러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유치원과 학원도 운영했다.
성경강좌는 보수동 교회를 빌려서 매 주일 오후 2시마다 열었는데, 부산 기독교계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각 교회 지도자나 남녀 청년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송 목사는 이 강좌에서 성서를 가르침과 동시에 성 프란시스의 사상과 생활을 전하고 신자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일본 유학생들이 도일하기 전에 하루쯤 묵는 숙박을 주선한 일은 미래를 염두에 두고 한 일이었다. 일본 유학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부산에 와서 일본으로 건너갈 배가 뜨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으레 부산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대개 숙박업소에 투숙해야 했다. 그런 유학생들에게 성빈학사에서 하룻밤의 숙박을 제공한 것이다. 앞길이 창창한 일본 유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접촉하여 간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빈학사 건물로는 미처 수용이 안 되어 각 교회 또는 여유 있는 이들의 방을 빌려서 유학생들을 수용했다고 한다.
또한 문서선교의 일환으로 <성빈> 잡지를 발간하여 배포하는 일에도 그는 힘을 크게 쏟았다. 그는 <성빈> 잡지에 계속 글을 썼다. 그리고 <성빈문고> 시리즈 및 기타 단행본들을 발간하는 일 역시 중요하게 다룬 사업이었다.
이 시기에 그가 <성빈> 잡지에 쓴 글 하나를 소개한다. ‘슬픔’에 관해서 생각한 단상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극히 젊은 말로 하면 현재 자기에게 불만을 말하는 것이요 전체적으로 오늘 이상의 좀더 높고 귀한 생활을 요구한다는 향상의 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찾아 영원한 생명에 나아가라는 주님의 가르치신 참뜻을 모르는 사람들이외다. 그래서 오늘에 슬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천국을 찾게 되나니 슬픔은 인간으로 하여금 새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관문이요, 인생의 색채요, 인생의 갖은 정서를 알리는 음악이외다. 참 슬퍼하는 심령에서만 거짓이 없는 인생의 전폭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참된 슬픔은 인생 생활의 새로운 정화와 창조의 원동력이 되나니 슬픔은 가장 신비한 것입니다. 이렇듯 신비한 슬픔은 오로지 남다른 포부와 큰 뜻을 가진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니 큰 포부 높은 이상을 가지면 가진 사람마다 또한 더 큰 슬픔을 가슴에 품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까리 모이는 데마다 이루 다할 수 없는 불상사가 생기는 까닭이 다 우리에게는 남다른 포부와 이상이 없노라는 고백이니 즉 우리는 슬퍼할 줄 모른다는 것이 가장 슬픈 현상이외다. 우리에게 슬퍼할 일이 있다하면 이 백성 슬퍼해야 할 일에 슬퍼할 줄 모르는 일이외다.
‘슬픔’의 정체와 그 신비한 기능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고 깊이 있게 묘파한 글이다. 삶을, 또는 살아가는 일을, 진심으로 슬퍼한 일이 있었던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 하겠다.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하여 다시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글이다.
그 시기에 송 목사 댁에 가본 사람들은 송 목사 가족이 매우 가난하게 지냈다고 증언했다. 가진 것을 빈민 돕는 데 모두 써서 그렇더라는 것이다. 빈민을 돕는 선교사업을 한다고 하니까, 송 목사 댁에는 거지들이 떼를 지어 자주 찾아왔다. 줄을 이어 찾아 드는 그들의 성화에 시달리던 가족들이 때로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때가 있었다. 그러면 송 목사가 안에서 듣고 고함을 질렀다.
“아, 거지 대장이 예 있어. 대장 집에 왔다가 그냥 갈까, 몇푼 주어 보내오!”
아마도 이때가 송창근의 전 생애를 통해서 몸은 몹시 힘들었어도 마음은 가장 편안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했던 손순일 목사가 이 시기에 본 송창근 목사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송 박사님이 부산에서 성빈학사를 하실 적에 가끔 찾아가 뵈었지요. 그때 그 분은 여간 가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이나 학생들을 그대로 보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꼭 응분의 도움을 주었고 그냥 손님이라도 후한 대접을 하여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때때로 부산거리를 거닐다가 뜻밖의 곳에서 송 박사님을 뵙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뒷골목이나 빈민촌 뒷거리에서 가끔 허름한 옷에 지팡이를 짚고 거니시는 그 분을 뵈었습니다. 송 박사님은 그렇게 다니시다가는 깡패, 부량소년들이 우글거리는 그런 데서 누구하고나 대화를 하고 가장 가난한 노인네들과도 친구처럼 마주 앉아 오래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자주 목도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요. 여름 방학에 송 박사님의 지시를 받아 농촌으로 가서 그곳 교회를 열심히 받들었습니다. 정말 견디고 참기 어려운 고난을 겪어가면서 도운 보람이 있어 떠나올 무렵에는 제법 교회도 부흥이 되었지요. 그래서 돌아온 길로 송 박사님을 찾아 뵙고 자랑스러이 자세한 보고를 드렸습니다. 한데 송 박사님은 별로 감탄도 않으시고 한마디의 칭찬도 없으신 겁니다. 그래서 내가 불안한 생각이 들어 “목사님, 아직도 저한테 뭔가 부족한 일이 있습니까?”하고 여쭤보았습니다.
송박사님은 눈을 크게 부릅뜨시며, “임자, 눈치가 내가 칭찬해 주길 바라는 모양인데 칭찬할 일이 무언가? 아, 임자가 교회를 섬기는 일이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꼭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라고 하셨습니다. 어쨌던 나는, 송 박사님 생각이나 생활은 감히 흉내낼 수도 없고 또 그 비슷하게 사는 이도 못 봤습니다. 그 분의 감화로 나도 목사가 되었지요.
성빈학사의 구성원으로는 직제자인 김정준을 제외하고도 월급을 받는 직원이 세 사람이나 더 있었다니, 꽤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뒷날 1970년대에 가서야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실시된 도시빈민 선교사업을 송창근은 이미 1936년부터 그처럼 몸소 실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송창근 목사는 부산에서 가까운 곳인 거제도에 사는 부자인 진정율 장로와 잘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1946년에 조선신학교를 대학 과정의 신학교로 설립하는 허가를 받기 위하여 재단법인을 만들 때 전혀 재원이 없었는데, 송창근 목사가 진정율 장로에게 말하여 임야 50만 평을 무상 기부 받아서 재단법인을 만들어서 조선신학교를 대학 과정의 신학교로 설립 허가를 받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