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행된 기독 활동가들을 위해 감리교, 예장, 기장, 성결교, 복음교회 등의 젊은 목회자들이 중심이 돼 지금의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소 예배실에서 열었던 목요기도회. 당시 목요기도회의 정식 이름은 ‘구속된 자들과 함께 드리는 목요 정기기도회’였다. 기도회 시간은 오전 10시. 모임 시간을 보면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모임이라기 보다는 목회자들이 순수한 마음을 담아 드린 기도회였음을 알 수 있다.
바야흐로 기도회를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참석자들이 십수명에 지나지 않았던 이 모임은 구속자 가족들이 참여함으로써 탄력을 받아 삽시간에 수백명 규모로 불어나 모임 장소를 소예배실에서 대예배실로 이전해야 했다.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당당하게 정의를 부르짖었고 그때마다 독재 정권에 의해 옥고를 치르는 등 갖은 핍박을 당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의 정의와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목회자들의 열망은 식지 않았고, 목회자들의 눈물과 부르짖음은 목요기도회를 통해 계속됐다.
한국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목회자들의 자발적인 동기로 이뤄졌던 이 목요기도회가 35년만에 다시 시작됐다. 지난 12일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대예배실에서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는 목요기도회’란 이름으로 목요기도회가 부활한 것. 당시 설교를 전한 이해동 목사(인권목회자동지회 회장)는 한국사회의 저변에 스며든 물질주의가 한국사회의 실용주의를 낳았다며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고발했다. 또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데 교회의 책임이 실로 무겁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이해동 목사는 35년 전에도 목요기도회를 주동해 당국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져 구속 수감되기까지도 했다.
지난 18일 이해동 목사(76)를 만났다. 그는 1934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한국신학대학교(現 한신대)를 졸업하고, 1964년 개척교회인 인천교회 설립을 시작으로 40여 년간 목회활동을 해왔다. 또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과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 NCCK 인권위원회 후원회 회장, 민주개혁국민연합 공동대표, 국방부 군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와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목요기도회, 젊은 목회자들의 자발적 모임이었다”
▲ 1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로터리 부근의 한 카페에서 이해동 목사를 만났다. 그에게 목요기도회 성격을 묻자 “자발적 모임이었다”고 답했다 ⓒ김진한 기자 |
서울 마포구 공덕동 로터리 부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에게서 35년 전 목요기도회의 현장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경 넘어로 쏘아 붙이듯 매서운 눈초리로 기자를 바라 본 그는 당시 목요기도회의 성격부터 짚고 넘어갔다. 오해가 있다는 것이었다.
“목요기도회가 마치 (NCCK 등)어떤 기구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당시 목요기도회의 모임 시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순전히 목회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자발적인 모임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당시 감리교, 예장, 기장, 성결교, 복음교회 등 젊은 목회자들은 교파를 떠나 한 가지 주제 아래 모였습니다. 이런 목회자들의 연합이 어떤 원칙에 의한 강제나 강요로 시작된 것이 아닌 자발적인 동기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 당시 목요기도회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서 고난 받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자는 의미로 당시 목요기도회의 정식 이름은 ‘구속된 자들과 함께 드리는 목요 정기기도회’였습니다. 처음에는 참석자들이 십수명에 불과했었지만 구속자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눈덩이 불어나듯이 불어났습니다. 이 기도회에 모여 연대했던 구속자 가족들은 나중에 구속자 가족협의회를 조직했고, 초대 회장에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공덕귀 여사를 추대했죠”
- 목요기도회 집회 장소는 어디였습니까?
“처음에는 목회자들 15∼20명 가량이 참석해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소예배실에서 드렸지요. 그러다가 점차 기도회의 참석자가 늘어나면서부터 장소가 비좁아 같은 건물의 대예배실로 기도회 장소를 변경했습니다. 특히 이 기도회에 목회자들을 비롯해 개신교의 인권, 민주화 운동가들이 참석한 것은 목요기도회가 한국 뿐 아니라 당시 미국, 캐나다, 구라파의 목요기도회로 확산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개신교의 대표적인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죠”
74년 당시 국제적으로 활동했던 개신교 목사들 및 민주화 운동가들이 국제적인 네트웍을 이용, 세계 각지의 한인 사회에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한국발 목요기도회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가들의 참여로 목요기도회의 정치적 색깔이 점점 짙어지자 독재 정권의 탄압은 발 빠르게 진행됐다. 당시 목요기도회 장소로 이용됐던 기독교회관의 건물주에게 압력을 넣어 장소 제공을 못하게 했고, 각 교회 예배당에서도 목요기도회 장소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 예배 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목요기도회는 결국 구속자 가족의 집에서 드릴 수 밖에 없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 사건 발생을 전후에서 목요기도회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목요기도회를 주동한 이해동 목사가 구속된 것.
목요기도회가 한빛교회 예배당을 사용하게 된 사연은
-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1 민주구국선언을 말하기 전에 갈릴리교회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해직된 기독인 교수들이 교회 다운 교회를 해보자며 시작한 것이 갈릴리교회였습니다. 갈릴리교회란 교회 이름에는 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예수께서 활동하신 무대가 갈릴리였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예루살렘과 대치되는 장소로 가난하고, 억눌리고, 핍박받는 이들의 고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과 함께 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정신. 이를 계승하고자 설립했던 교회가 갈릴리교회였죠”
이 갈릴리교회는 해직된 기독인 교수들인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 이우정, 이문영 교수 등이 중심이 돼 1975년 7월 17일 명동 흥사단 대성빌딩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시작한 교회로 당시 당회장은 NCCK 첫 인권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이해영 목사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권의 감시를 받고, 예배 장소로부터 내쫓기는 탄압을 받았다.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들에게 혼쾌히 예배 장소를 제공해 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으니 당시 한빛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이해동 목사였다. 그 후 이들 해직 교수들은 감옥에 들락날락하면서도 10·26 사태가 터져 박정희 대통령이 숨을 거둘 때까지 매주 오후 2시경 한빛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들 해직 교수들은 76년 3월 1일 유신정권 하에서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바로 3.1 민주구국선언이었다. 이해동 목사는 당시 3.1 민주구국선언 성명서에 서명을 했고, 이를 이유로 사건 발생일 이틀 후 경찰에 연행돼 감옥에 수감된다. 이해동 목사의 소식을 전해 들은 목요기도회 관계자들은 그 후로 이해동 목사가 풀려나기까지 한빛교회 예배당에 모여 3.1 민주구국선언 수감자 석방을 위한 목요기도회를 열었다. 이 목요기도회엔 갈릴리교회 교인들과 구속자 가족들이 모였다.
- 독재 정권에 항거하던 모임이었던 목요기도회와 갈릴리교회의 예배 장소가 되어 준 한빛교회도 많은 수난을 겪었다고 하던데.
“제가 수감되었을 적 듣기로는 형사들이 교회 안팎을 계속 감시해 이를 견디지 못한 신도들이 교회를 떠날 정도로 정권의 핍박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80년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구속 수감되기도 했던 이해동 목사는 옥중 잦은 고문으로 고문 후유증을 앓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석방됐지만 언제 또 붙들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해동 목사를 걱정하던 민중 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그에게 독일행을 권유했고, 이해동 목사는 84년 몸을 추스리자는 생각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가 작은 한인교회를 맡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사회·한국교회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오염돼
▲ 이해동 목사는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교회가 물질주의 가치관에 오염됐다고 지적하며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외면하거나 미루지 말 것을 당부했다 ⓒ김진한 기자 |
- 과거 독재정권 시절 개신교계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이라고 할만한 이 목요기도회가 얼마 전 부활했습니다.
“한국사회가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오염됐습니다. 사회의 가치관과 교회의 가치관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치관에 젖어 사는 그들이 바로 목회 현장의 교인들이란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팩트(fact)입니다. 때문에 한국사회 상황과 한국교회의 상황은 동전의 양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근데 요즘 드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서 건강한 인간, 건강한 교회가 생겨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방금 말했다시피 세상이 맘모니즘에 부패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뒤쳐진 약자들을 짐짝처럼 취급하고 수수방관하는 현장이 곳곳에서 목격되기도 합니다”
- 한국교회도 물질주의 가치관에 오염된걸까요?
“교회는 이런 물질주의 가치관을 바로잡고,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는 인간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교회가 더 물질주의 가치관을 부추기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예배 강단에서는 성공 지상주의를 부추기고, 축복을 돈으로 환산하는 듯한 메시지가 물붓 듯 쏟아지고 있습니다”
- 그런 메시지는 어떤 형태로 전해지는가요.
“몇몇 대형교회 강단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가만히 들어보면 회유와 협박의 과정을 통해 교인들에게 물질주의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복신앙을 조장하는게 대표적이죠. 이거 하면 복 받고 이거 안하면 벌받는다는 식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는 건데 그걸 가지고 실패한 것은 벌 받았기 때문이야. 성공한 것은 복 받았기 때문이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면서 마치 성공하는 것이 축복인 냥 하나님의 말씀을 오도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성공이랑 신앙이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경을 펼쳐봐도 성경에서 복을 받은 인물 대부분은 약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 더 많습니다. 이런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한국교회 내 또 다른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 교회 지상주의입니다”
- 교회 지상주의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도적으로 개신교는 개교회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 각 교회가 자체 운영권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쟁을 통해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고, 이익을 도모합니다. 다른 말로 신도수를 늘리고, 신도들로부터 걷어들인 헌금으로 교회를 확장 발전시킨다고나 할까요. 교회 짓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교회를 짓는 것) 마치 지상의 목표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 체제 아래선 성경도 와서 교회를 섬겨야 하고, 예수도 와서 교회를 섬겨야 하는 우스꽝스런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속 교회의 사명은 “빛과 소금”
- 문제를 진단했다면 처방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내용이지만 교회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부패하는 세상을 방치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을 다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세상이 썩는 것을 놔두고선 교회도 온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바로 잡는 것과 교회를 바로 잡는 것은 같이 가야죠.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은 외면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 최근 몇몇 보수교회들을 중심으로 사회 내 약자를 위한 나눔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운동을 놓고 볼때 교회의 사회 참여 활동이 이전보단 부쩍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나눠야죠. 나누는 거 좋습니다. 필요한 일이죠. 그러나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것. 즉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 잡아 사회 내 약자로 있는 이들이 항상 약자로만 있게 하는 것이 아닌, 그래서 배부른 사람들의 부스러기로만 연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 그들 스스로 일어나 살 수 있도록 돕자는 얘기입니다.
단지 나누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이라든지 그런 사회구조를 혁파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불공정한 요소를 바로 잡는 일. 거짓을 바로 잡아서 진실히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목요기도회는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참석하는 모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