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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온다는 것

2016년 7월 3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행 18:24-28

설교문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아볼로라는 유대 사람이 에베소에 왔다.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주님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예수에 관한 일을 열심히 말하고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하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의 말을 듣고서, 따로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신도들이 그를 격려하고, 그 쪽 제자들에게 아볼로를 영접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는 거기에 이르러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신도가 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가 성경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면서, 공중 앞에서 유대 사람들을 힘있게 논박했기 때문이다.]

*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지식인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스탄불 공항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 지금도 여전히 광장에 나와 한이 신원되기를 하소연하는 이 땅의 사람들, 궁핍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류 위에도 주님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빕니다. 가끔 저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부담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세상이 이렇게나 아픈데 내가 하는 말은 너무 한가한 소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늘 격앙된 말을 쏟아내거나 탄식만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일상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한다. 가랑이를 한껏 벌려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跂者不立, 跨者不行, 노자 24장)고 말했습니다. 까치발로 선다는 것은 남보다 더 커 보이고 싶은 마음이고, 가랑이를 크게 벌려 걷는다는 것은 남보다 앞서려는 마음일 겁니다. 이것을 저는 감정적으로 달아오른 상태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일상을 건강하게 살아내야 이웃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볼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은총의 신비에 함께 잠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아볼로가 그 도시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북아프리카 최대의 도시입니다. 알렉산더 이후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프톨레미 왕조의 번영으로 인해 그 도시는 흥왕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인구가 근 60만 명에 이르렀다니 국제적인 대도시임이 분명합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에는 전 세계로부터 수집한 책 70만 권 정도가 구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가 지중해 지역의 학문의 중심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인구의 대략 1/4 정도가 유대인이었다고 합니다. 아볼로는 바로 그런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겁니다.

누가가 아볼로를 소개하는 말을 볼까요?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주님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예수에 관한 일을 열심히 말하고 정확하게 가르쳤다."(24b-25a) 아볼로는 바울 못지 않은 학식을 가졌을 뿐 아니라, 가르치는 일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지식이 많아도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많은데 아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 가운데는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고후10:10) 있다고 말합니다. 메시지를 말로 전달하는 능력은 조금 떨어졌던 것일까요? 그게 바울의 컴플렉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 비해 아볼로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삼대 요소를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라 했습니다. 로고스가 말하는 내용 혹은 합리적인 논증을 말한다면, 파토스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열정 혹은 능력을 말합니다.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의 신뢰성을 일컫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이 삼대 요소를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 조심스럽게 충고하라

그런 아볼로에게도 좀 부족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가 "주님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에 관해서 열심히 말하고 정확하게 가르쳤지만 그의 가르침은 배워서 안 것에 불과합니다. 그가 몸으로 체득한 진리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는 추상적 사고와 관련되기에 이차적입니다. 그에 비해 몸은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틈이 없습니다. 몸으로 체득되지 않은 지식은 티가 나는 법입니다.

회당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의 그런 한계를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친교의 식탁에 청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심지에 예수의 불꽃을 점화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들 부부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참 고맙습니다. 그들은 회중 앞에서 아볼로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지적질은 오히려 방어적 태도를 낳게 마련이고 그것이 더 깊은 진리와의 만남을 가로막을 수도 있었음을 알았기에 그들은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우정은 이렇게 싹트는 법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공적 망신주기 문화가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우려스럽습니다. 성공회대학교의 김찬호 교수는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의 응어리를 '모멸감'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모멸감이란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 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을 일컫는 말인데, '모욕'과 '경멸'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입니다(김찬호, <모멸감>, 문학과 지성사, 2014년 3월 21일, p.67). 모멸감은 자괴심과 수치심으로 이어집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가 받아야 할 응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험이 지속되면 그도 또한 다른 이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주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에 비춰볼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보인 조심스러운 태도는 그들이 얼마나 사람을 아끼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줍니다. 달걀을 함부로 다루면 깨지게 마련입니다. 안에 있는 생명이 부화되도록 하기 위해 어미닭은 아주 조심스럽게 알을 품습니다. 다른 사람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일깨워주려는 사람, 더 큰 진리의 세계에 눈뜨도록 도우려는 사람은 겸손하고 온유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 선불교의 선사들은 가끔 '할喝'과 '방榜'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할'은 큰소리로 꾸짖는 것이고, '방'은 주장자拄杖子 곧 지팡이로 내리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욕과 몽둥이찜질입니다. 이건 매우 이례적인 교육방식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르침이나 교훈은 사뭇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 하나님의 '도'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하나님의 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고난의 신비와 구원의 능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슬픔과 모순이 집약된 것입니다. 주님은 온 세상의 슬픔과 모순을 당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셨습니다. 주님과 무관한 사람은 온 세상 천지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픔 혹은 고통이야말로 세상을 하나로 묶는 연대의 끈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은 자기 앞에 열린 참 사람의 길을 외면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전남대 철학과의 김상봉 교수는 "정신의 깊이는 오직 고통의 깊이"라고 말합니다. 정신이 작은 사람들이 고통을 만나면 메마르고 이기적으로 변하기 쉽지만, 큰 정신의 사람들은 그 고통을 매개로 하여 웅숭깊은 영혼을 빚어내기도 합니다. 김상봉은 "모든 앎은 앓음"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을 명심하자고 말합니다. 세상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세상도 알지 못하고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아픔을 다 짊어지셨기에 모든 사람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과 만난 이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전하고 싶었던 '하나님의 도'에는 성령의 능력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내적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이끌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 되게 합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를 바칩니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타자에게 폭력적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은총 안에 있는 이들에게 긍휼과 자비는 제2의 천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아볼로가 아직 그 자리까지 이르지 못했기에 누가는 그가 '요한의 세례' 밖에 알지 못했다고 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꾸짖어 깨닫게 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함께 아파함으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분이십니다.

* 선 하나를 긋다

에베소는 아볼로라는 초대교회의 소중한 일꾼의 영혼이 새롭게 빚어진 곳이라 하겠습니다. 아볼로는 자기 속에 일어난 신앙의 불꽃을 아가야 지방에까지 전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신도들은 그런 그를 격려하고, 그 지역 공동체에 아볼로를 잘 돌봐달라는 편지까지 써주었습니다. 만남의 지평은 그렇게 넓혀지는 법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일종의 전율을 느낍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그렸던 그림책이 떠오릅니다. 아시지요? 아라비아 숫자를 순서대로 연결하면 특정한 형태의 그림이 되는 놀이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 그림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다 연결해놓으면 우리가 잘 아는 사물이나 사람의 얼굴이 되곤 했습니다. 어쩌면 인생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양한 만남을 통해 긋고 있는 선의 의미를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그 뜻이 명료하게 드러날 때가 올 것입니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진리의 세계를 맛보았습니다. 그는 변화된 존재가 되어 아가야로 갑니다. 선 하나를 새롭게 긋는 것이지요. 아가야 사람들 또한 아볼로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에는 서로 모르고 지냈던 사람들을 이렇게 연결하여 신앙에 기초한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를 창조하십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찾는 이들은 다릅니다. 늘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만남은 우리를 새로운 지경으로 안내하곤 합니다. 요즘 정현종 선생의 시 '방문객'이 여기저기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방문객' 부분)

지금 우리 곁에 다가온 사람을 이런 마음으로 맞이한다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상대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적대감이 가득찬 세상에 살면서도 환대의 공간을 확장해가야 합니다. 서로 무관했던 이들이 연결될 때, 그래서 서로의 안부를 묻게 되고, 서로의 행복을 위해 마음 쓸 때 세상은 조금씩 평화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 싶었던 것은 돈벌이를 위해서도 아니고 입신양명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진리를 전하고 그 진리를 깨달은 이들과 함께 기쁨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볼로는 아가야 지방에 이르러 이미 신도가 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유대 사람들 앞에서 정연한 언어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선을 긋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선을 그으며 사십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누는 선입니까? 아니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선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사랑과 이해와 섬김을 통해 연결될 때 오롯이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 소망을 굳게 붙들고 오늘도 내일도 누군가에게 선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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