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15:1-7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설교문
- 나그네로 산다는 것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그다드 폭탄 테러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증오와 두려움을 퍼뜨리려는 악의 무리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요? 한반도에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한다는 결정이 났고, 중국과 러시아가 크게 격앙된 반응을 내놓고 있습니다. 목성 탐사선 주노(Juno)가 시속 20만 9천 킬로미터로 5년간 비행한 끝에 28억 킬로미터 떨어진 목성 궤도에 진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과학은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성'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아뜩해집니다. 교육부의 정책기획관인 나향욱은 "민중은 개, 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말해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그는 "출발선상이 다른 것이 현실"이라며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은 게 그 한 사람만이 아닐 겁니다. 공부는 잘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배우지 못한 괴물들이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습니다. 세상은 이래저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낯선 이들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마치 전염병처럼 세계에 퍼지고 있습니다.
난민이 되어 떠도는 사람들은 늘 불안함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어떤 사회의 외부자로 취급되기 일쑤이고, 별일이 없을 때는 괜찮지만 일단 그 사회에 위기가 다가오면 제일 먼저 배제나 폭력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신26:5)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믿음의 조상이라 고백하는 아브람도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했다가,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곳을 떠나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이주자로 살아간다는 것처럼 신산스런 일이 또 있을까요? 강한 씨족 전통이 남아 있는 사회에서 외부자들은 언제나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떠돌이로 산다는 것은 취약해진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람은 정말 많은 위기를 넘겼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다가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이주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하기도 했습니다. 어찌어찌하여 재산이 늘어나 조카 롯과 함께 지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롯에게 분가를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동방의 다섯 왕이 쳐들어와 자기가 머물던 지경을 유린하고 조카 롯까지 잡아가자 아브람은 집에서 기른 사병 318명을 데리고 단까지 올라가 롯을 구해내고 그들이 약탈해갔던 모든 것을 되찾기도 합니다. 그는 홀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소명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복의 매개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창12:3b)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아브람은 명심하고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이 바로 떠도는 이들에게 주어진 생존의 지혜이자 복입니다.
- 나는 너의 방패
하지만 떠돌이로 사는 것은 역시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어딘가에 확고히 소속되고 싶어하는 것은 불안정한 삶의 공포 때문일 겁니다. 불안함이 큰 사람일수록 수없이 많은 모임에 소속됨으로 그 불안함을 떨쳐버리고 싶어합니다. 오늘은 어떻게든 넘겼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된다면 삶은 불안정해지게 마련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곧 떠도는 존재라 했습니다. 라틴어로 말하니까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떠돌이들의 삶은 그렇게 낭만적이진 않습니다.
복의 매개자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기는 하지만 아브람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에서 환상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짜고짜 하신 말씀이 뭐죠?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15:1) 하나님은 아브람의 속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내색하지 않았을지라도 아브람은 늘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방패를 자처하십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던 사람이 아니라면 그 말이 주는 든든함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말년에 자기의 신산스러웠던 삶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장엄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십니다."(삼하22:3)
이러한 고백은 시편 속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곤 하지만 다윗의 고백은 정말 강력합니다. 이 고백에 이르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독과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보냈을까요? 그런데 돌이켜 보니 그 어려운 생의 고빗사위마다 하나님께서 든든한 방패처럼, 산성처럼 자기를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우리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신 하나님 덕분이 아닌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는 그리스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의 방패 이야기가 길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의 방패에는 당시 그리스 사람들의 우주론과 삶에 대한 이해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 방패는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여신 테티스가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토스에게 부탁하여 만든 것이었습니다. 테티스는 자기 아들이 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방패도 아킬레우스의 취약점인 발목을 막아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방패에 의지하여 살고 있습니까? 돈과 권력, 인맥을 방패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런 방패에 의지하는 이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방패를 손에서 내려놓곤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보상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조카 롯을 구하고 돌아오던 아브람은 멜기세덱을 만나 가지고 있던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소돔 왕이 그를 영접하면서 "사람들은 내게 돌려 주시고, 물건은 그대가 가지시오" 하고 권했을 때 아브람은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는 부당한 이득에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귀히 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큰 상급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 무엇을 주시렵니까?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아브람의 반응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아멘'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자기 속에 숨어 있던 불평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15:2).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아브람을 사로잡고 있는 고통과 두려움은 외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자식이 없는 삶은 온전한 삶, 복받은 삶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의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은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셀뿐이라고 말합니다. 재산을 상속받는다는 것은 조상의 무덤 앞에 헌주할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상속자로 언급되고 있는 '엘리에셀'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엘리에셀은 자식이 없어 적막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상기시키는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엘리에셀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난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확언하신 후에 아브람을 장막 밖으로 이끌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15:5). 시청각교육인가요? 무지근한 불안과 두려움에 눌려 있던 아브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절망을 곱씹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세계 앞에서 자기 삶을 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저 가없는 별 세계를 바라보라 이르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글을 쓰다가 막히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저는 아주 간결하게 대답합니다. "산책을 합니다." 뭔가가 꽉 막혀 있는 것 같을 때 몸의 자세나 동작을 바꾸면 새로운 생각이 유입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현실의 고통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뭐라 하셨습니까? "공중의 새를 보아라"(마6:26),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6:28). 정말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깊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빈곤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여전히 막막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오시다 시게또는 신앙을 가리켜 '먼 빛의 눈길'이라 말했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현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저 밤 하늘의 별을 헤아려보라 하십니다. 윤동주가 1941년 11월 5일에 쓴 시 '별 헤는 밤'이 떠오릅니다. 일제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한글 사용을 금지했을 때 예민한 조선의 젊은이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어둠이 깃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별 하나 하나에 그리운 이름들을 붙여 봅니다. 추억, 사랑, 쓸쓸함, 동경, 시, 어머니, 그리운 벗들과 자기가 흠모하는 시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것이지요. 그 이름들을 부르는 순간 그의 가슴에는 새로운 숨이 유입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치욕스럽더라도 기어코 살아내 역사의 봄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사람은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하늘을 바라봅니다. 이성선 시인은 '별을 보며'라는 시에서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하고 노래합니다. 더럽고 추한 세상을 아파하는 시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저 밤 하늘에 총총한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 신뢰의 모험
6절은 이 이야기를 서둘러 마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 구절은 꽤 유명합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4장 3절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는다는 사실의 예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는 "'나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번역서에서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고백은 내가 내 삶을 어디에 단단히 붙들어 맬 것인지, 어디서 나의 근본, 본향을 찾을 것인지에 대한 선언의 출발점"(<신뢰하는 삶>, 김병준, 민경찬 옮김, 비아, 2015년 7월 7일, p.25)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 삶을 우리 경험, 판단, 재주, 인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굳게 붙들어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그렇기에 모험입니다.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전, 주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넘실거리는 요단 강물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강물이 갈라진 후에 발을 내디딘 것이 아닙니다. 발을 내딛자 물이 갈라졌습니다. 신앙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다'라는 구절이 강력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삶의 조건 속에서 두려움을 느꼈던 아브람의 든든한 방패요 보상이 되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성경 인용이 조금 불편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이는 아브람의 혈통이 아니라 세상을 기약없이 떠도는 사람들, 사회에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가장 우선적으로 폭력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정착촌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오랫동안 그 땅에서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으면서 그런 행위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가자지구나 서안지구는 거대한 감옥으로 변했습니다. 이스라엘 정착촌을 테러의 위험으로부터 지켜낸다는 명분으로 세워놓은 6미터 높이의 분리의 장벽 때문입니다. 그 장벽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의 심리적 장벽은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서있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게 심리적 장벽이든, 실제 장벽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는 예수님이 당신의 몸으로 사람들을 나누는 장벽을 무너뜨렸다고 말합니다. 장벽을 만들어 자기들만의 특권적 삶을 누리려는 이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멍한 시선으로 하늘만 바라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방패요 보상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를 방패 삼아 고통받는 이들을 지켜내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복되게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꿈을 우리 꿈으로 삼아야 합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만연한 세상에 살지만 검질기게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몸짓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