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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을 얻는 길

2016년 7월 3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채수일 목사

chaesuil
(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성경본문

신명기 30:10-14

당신들이 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1:1-6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과 형제인 디모데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자매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해서 여러분이 품고 있는 사랑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두신 소망에 근거합니다. 이 소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이미 들은 것입니다. 이 복음은 온 세상에 전해진 것과 같이, 여러분에게 전해졌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서 참되게 깨달은 그날로부터, 여러분 가운데서와 같이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 10:25-28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1.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없는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율법교사는 무엇을 시험하려고 했을까요? 자신은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자격증도 있는 율법교사이지만, 예수님은 율법학교도 가보지 못했을 것이고, 갈릴리의 촌사람인데, 율법을 과연 알기나 하는 것인지, 예수님을 조롱하거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질문한 것일까요? 이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호칭한 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존경하여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성서는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는 참으로 영생 얻는 길에 대하여 깨닫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한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아니 그가 날마다 외우고 있는 율법은 무엇인지를 물으신 것이지요.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율법지식을 시험하려고 했는데, 정작 이제는 율법에 대한 자기의 지식이 시험을 당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율법교사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대답합니다. 이로써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는 길', 그 길은 하나님을 일편단심의 충정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합니다. 그는 몰라서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답을 이미 알면서 묻는 질문, 그것은 언제나 남을 시험하거나 자신의 지식을 은근히 자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생, 영원한 생명, 영혼불멸, 부활이라는 매우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매우 현실적이고 단순하게 '그리하면 살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교적 질문은 현실의 삶에 대한 질문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삶 한 복판 외에 어디에서도 찾아질 수 없습니다. 교회 안과 밖의 삶이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영생은 죽음과 분리될 수 없고, 종교는 세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장 종교적인 것은 가장 세속적이고, 가장 세속적인 것이 가장 종교적이라는 역설이 아닐까요?

2.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나는 율법교사로서 충분히 이웃을 사랑했다는 것을 입증해보이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말씀하신 후, 율법교사에게 되묻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에게 '이웃'은 그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고,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같은 동족, 같은 종교 그룹에 속한 사람, 같은 유대인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외국인들, 특히 사마리아 사람들은 철저하게 이웃에서 제외시킨 유대인 율법교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그를 당혹스럽게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유대인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라 뜻밖에도 유대인과 원수관계에 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에둘러 말합니다. 차마 입에도 담기 싫은 '사마리아'를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로서 예수님 당시 극에 달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간의 인종적, 지역적 갈등과 증오를 극복하기 위한 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종교적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한 유대 율법교사에게 적대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을 사랑하라고 함으로써, '영생'에 대한 질문에 '공생'으로 답변하신 것이지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편견과 증오, 유대인의 집단적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해방되지 않고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적으로 '이웃'이라는 영어 단어(neighbor)는 독일어로 '가장 가까이 있는'(naechste)이라는 의미로, 프랑스어로는 '인접한'이라는 의미의 브와셍(voisin)과 '동료'라는 의미의 '프로솅'(prochain), 두 개가 혼합된 복합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사랑해야 할 이웃은 유대인, 특히 율법을 준수하는 동료 유대인에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웃'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이웃은 친구이자 동시에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할만한, 사랑스런 이웃도 있지만,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 적개심과 증오까지 불러일으키는 사람도 이웃입니다. 프로이트(S. Freud)가 '문명과 그 불만'에서 성찰한 것처럼, '인간은 부여받은 본능적 자질들에 상당한 공격성이 포함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는 주장을 승인한다면, 이웃 사랑은,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그리스도인에게 실천해야 할 덕목의 하나, 윤리적 생활을 위한 길안내가 아니라, 영원한 시련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말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 사랑할만한 것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이웃은 사랑할 수 있지만, 그것도 내 몸처럼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관계도 없는 보이지 않는 이웃,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이웃을 사랑할 수는, 아니 우리 몸같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이웃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 자비,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삶이지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이 분명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습니다. 측은지심에는 경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장이 뒤틀리는, 같은 아픔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모든 형태의 장벽과 경계를 넘어 이웃에게 손을 내밀게 하는 보편성이 아닐까요!

3. 그런데 오늘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나 길 위에 쓰려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 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강도떼를 만날까 두렵고 무서워서 황급히 지나갔을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죽은 이의 시체를 만짐으로써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까요? 제사를 드리는 직분을 가진 이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이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었다거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동정심이나 이타심, 측은지심이 없어서 그랬다는 단서도 성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이 피해간 것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는, 아니 이들을 굳이 돕지 않아도 될, 아니 결코 도와서는 안 되는 '율법'이라는 장벽, 그들의 무관심과 냉정한 태도를 정당화해주는 '정결법'(레위기 11-15장) 때문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사람'은 누구인가? '묻지마 살인'의 희생자인가? 남쪽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야 하는 탈북자인가? 체불임금도 못 받고 폭행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인가? 내전과 분쟁으로 고향을 떠난 난민들인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않아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는, 아니 그들을 돕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우리 시대의 '정결법'은 무엇인가? 시장과 자본의 논리인가? 계층인가? 극에 달한 개인주의인가? 숟가락인가? 온갖 형태의 '연고주의'인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오직 '측은지심'이 모든 율법과 관습을 초월한 이웃사랑의 원천임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보편적 은총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민애 theworld@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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