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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심원의 확장

2016년 7월 24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행 11:19-26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을 하여 주 예수를 전하였다.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서,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바나나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바나나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

설교문

- 박해가 오히려 혼불이 되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성령강림절 이후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초대 교회는 조금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인과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빚어졌던 것입니다. 표면상의 이유는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인 과부들이 날마다 구호 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에 소홀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빚어진 이 갈등이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가 직면한 더 근본적인 문제는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율법과 성전 제의에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던 데 비해서,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인들은 자유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더 중히 여겼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전통과 새로움의 갈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들은 그런 차이가 교회 공동체를 갈라놓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에 그리스 말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 명을 뽑아 집사로 세웠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구제 문제를 비롯한 교인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지만 나중에는 복음 선포에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일 유명한 사람이 스데반과 빌립인데,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빌립은 사마리아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에티오피아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스데반을 예수 그리스도에 빗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고,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행7:59-60). 가장 참혹한 죽음의 순간에도 그는 폭력과 증오가 아닌 사랑을 내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스데반이 로마 관헌들에 의해 순교 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는 혐의를 받고 산헤드린 공의회에 소환되었다가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공의회 의원들에게 하나님이 그 백성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을 죽 열거했습니다. 공의회 의원들은 이 대목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이 연설 막바지에 '성전 체제'의 불의함을 지적하는 순간 상황은 급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신다면서, 기득권을 지키느라 성령을 거스르고 있는 성전 체제 구성원들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는 지도자들을 가리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들'이라 말하면서, 옛 사람들이 예언자를 죽인 것같이 그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다고 말합니다. '그 의인'은 물론 예수님입니다. 스데반은 온유한 사람이지만 불의를 꾸짖는 데는 사자처럼 용맹합니다. 사람들은 격분해서 스데반을 성 바깥으로 끌어내 돌로 치고 말았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은 피를 본 여세를 몰아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박해의 광풍을 피해 예루살렘을 벗어났습니다.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던 이들은 붙잡혀 구금되었습니다.

교회가 직면한 최초의 시련이었습니다. 예수 운동의 운명은 상한 갈대와 같았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박해를 피해 각지로 흩어진 이들은 이르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가 그들 속에 일으킨 놀라운 변화의 사건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박해의 광풍은 오히려 예수 정신의 불씨를 이곳저곳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이렇게 놀랍습니다.

- 낯섦을 받아들이는 용기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은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오직 유대인뿐이었습니다. 이방인은 여전히 그들의 잠재의식 저 너머에 있는 낯선 자들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자기의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경계선을 돌파하며 사셨지만, 그를 따르는 이들은 여전히 옛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받아온 교육, 몸으로 익혀온 습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작고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는 말로 이러한 사태를 설명합니다. '아비투스'란 일정하게 구조화된 개인의 성향이나 취향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쑤 옷차림, 즐겨 마시는 차, 먹는 음식, 듣는 음악을 가지고 사람을 교양 있는 사람과 교양 없는 사람으로 가르곤 합니다. 하지만 그건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책략에 불과합니다. 블랙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믹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보고 촌스럽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파스타를 먹는 사람이 청국장 먹는 사람 보고 별스럽다고 말해도 안 됩니다. 우리의 취향은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일 뿐입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가긴 했지만, 박해를 피해 각지로 흩어진 이들도 오랜 기간에 걸쳐 내면화된 종교적 편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시작할 용기가 없을 때 늘 관습적인 사고에 기대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별스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강고한 편견에 틈을 내는 사람들 말입니다.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을 하여 주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파적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리 했을 것입니다. 이방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들과 빈번하게 접촉했던 경험이 그들의 그런 행동을 가능케 했던 것 같습니다. 담을 세우는 이들은 담 저편에 있는 이들을 늘 잠재적인 적이나 위험인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낯선 이들도 자주 만나다보면 익숙해집니다. 만남은 우리의 편견을 강화해줄 때도 있지만 그 편견이 근거없는 것임을 일깨워줄 때가 더 많습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배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자기에서 고착된 채 새로운 세계와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방적 환경에서 사는 이들은 낯선 이들과 공존하기 위해 마음을 열고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는 이들을 가리켜 '길손'과 '나그네 신세'(히11:13)라고 말했습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습니다(마27:51). 땅이 흔들리고 바위도 갈라졌습니다. 예수는 옛 세계의 토대를 뒤흔드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 전도자들의 용감한 실천으로 인해 기독교는 세계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는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담장 허물기야말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신 일이 아닙니까?

- 착한 사람 바나바

안디옥에서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인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인데, 사도들은 그에게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나바'라는 별칭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는 품이 넓고 온유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마스커스에서 회심을 경험한 사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아무도 그와 만나려 하지 않았지만 바나바는 사울과 사도들의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참 좋은 사람을 안디옥에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이미 사람들을 갈라놓던 담들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했습니다.

누가가 바나바를 소개하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11:24). '착한(agathos) 사람'이라는 표현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표현보다 앞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의 착함은 기본적으로 타자 관계에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착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늘 배려합니다. 그게 그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성령과 믿음까지 충만했으니 금상첨화입니다. 바나바에 대한 소개를 마친 후 누가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고 썼습니다. 제게는 '그래서'라는 접속부사가 크게 와닿습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고백과 삶의 틈 없는 일치를 보았습니다.

- 당신의 손

바나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고향 다소에 칩거하고 있던 사울(바울)을 찾아가 그를 설득하여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던 사울은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 자기 삶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박해자로 이름이 알려졌던 그를 세상 앞으로 끌어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자기 조각을 가리켜 대리석 속에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더어내는 과정이라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시몬 속에 있는 베드로, 냉소주의자 나다나엘 속에 숨어 있던 참 이스라엘 사람을, 목마름에 시달리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속에 깃든 영원에 대한 갈망을.... 바나바는 사울이라는 존재 속에 잠재되어 있던 바울, 곧 위대한 선교사의 모습을 보았고 그것을 이끌어냈습니다. 바울에게 바나바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강은교 선생의 '당신의 손'이라는 시를 읊조리곤 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향해 내미는 '당신'의 손이 어떤 때는 물결처럼 가볍고 어떤 때는 산맥처럼 무겁다고 노래합니다. 이 시의 4연과 5연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

누워 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

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

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기쁨의 살이 되네.

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

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누워 있는 길을 일어서는 길이 되도록 하는 손은 얼마나 복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그러했습니다. 슬픔에 사로잡혔던 이들도 그 손과 만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 손이 죽음을 만지니 뿌리들의 뼈까지 일어났습니다. 우리 손이 그 손을 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바나바는 그런 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안디옥에 일 년을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까? 담을 허물고 있습니까? 누워 있는 길을 일어서는 길로 만들고 있습니까?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가 연일 폭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불린 이들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그래서 어쩔건데?' 하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파렴치한 행태가 만천하에 폭로되어도 그들은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부당하게 겪는 고난으로 미화해 줍니다. 공의가 무너진 세상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습니다. 한반도에 배치할 예정인 사드는 성주군민만의 문제가 아니건만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외부자로 취급받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생명과 평화를 향해 '예'라고 말하고, 죽임과 불화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권력에 중독된 이들의 가면을 벗겨내고 그들 속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과 평화의 물결이 우리를 거쳐 세상에 번져갈 때 세상은 조금은 더 살만한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 거룩한 소명에 늘 응답하며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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