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는 7월26일(화)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 해결을 위한 대책회의를 각계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여 구성할 것을 결정했다. 이 결정은 교계에 진영논리의 갈등을 또 다시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6월초에 NCCK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해소할 것을 관계당국에 요청한 이래 교계의 보수진영이 종북론과 색깔론을 들먹이면서 6월29일(수)부터 7월 초순까지 반대시위를 벌였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고착화되어버린 현상인 듯도 한데, 한국 교계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진영 간의 대화를 통해 그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기보다는 각각의 논리에 따라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만 높게 쌓아올리고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은 차치하고 교계 내부의 갈등만 심화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양 진영의 주장을 살펴보면, 모두 이 사건에 인권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조율할 일이지 서로의 방침과 실행에 대해 비판할 일은 아니다. 보수진영은 13인의 탈북민들이 자기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구금된 상태에 있는 사안의 중요성을 전제하고는 있는가? NCCK는 인신구제청구 등의 사법적 절차와 향후 대책회의의 전방위적 활동을 통해서, 만에 하나, 기획입국의 가능성이 밝혀졌을 때의 여파를 고려해보았는가? 이 사안에서 우리의 적성국인 북한으로부터 탈출한 탈북민들의 인권의 범주는 제도적 차원에서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물론, 인권과 국가당국 간의 갈등문제라면 인권을 우선해야 하지만 예측불허의 북한당국이 관련된 문제여서 단순히 탈북민 당사자의 인권만을 원칙적으로 고려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등등의 시각적 차이는 양 진영의 대화를 요청하고 있다. 각 진영의 논리로 서로 갈등만을 겪다보면, 정작 인권의 문제가 소실되어 버린다. 따라서 13인의 인권 문제를 전면화해서 양 진영이 대화하여 입체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그 대책을 관계당국과 조율하는 것이 일의 순서이다.
현재까지 양 진영의 태도는 옥합을 깨트린 여인에 대해 분개하며 비판을 해댄 제자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2천여 년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한 여자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 벌어졌다(마태복음 26:6-13). '죄인'이라 불리던 그 여인이 식사 중인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은 뜬금없는데다 거북하고 불편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행위의 상징적 의미는 차치하고 불쾌해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분개하며" 그 값비싼 향유를 허비한 것을 질타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꾸짖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그 향유의 교환가치를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고 구제라는 정당하고 도덕적인 명분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여인의 의도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분석적이며 도덕적이기만한 태도를 나무라셨다.
인권이 박탈된 '인권 가난'의 상황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런데 그 인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상대방에 대해 분석적이며 비판적인 태도만을 일관한다면 예수가 "함께 있지 아니" 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한편에서는 NCCK가 있는 종로5가로 몰려와서 확성기를 틀어놓고 종북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또 다른 한편에서 그들의 행동을 한심한 종북몰이나 철지난 색깔론 정도로 무시하는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스승의 면전에서 제자들이 분개했다는 것은 스승의 존재를 몰각했다는 말인데, 한국교회가 진영논리에만 사로잡혀 상대방을 이처럼 비난해대면 일반사회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이익단체로만 규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탈북민들의 인권을 위한다면서 서로 비판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NCCK는 대책회의에 한기총도 초청해야 한다. 대책회의에서는 상대방의 의도를 질문하고 대화하면서 이 사안에 대해서 예수께서 "함께 하시게 될" 방안이 무엇인지를 숙의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