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현 목사 성추문 사태와 관련 기고글입니다. 이번 이동현 목사 사태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 글입니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청소년사역 필드에서 그야말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이동현 목사가 최근 여제자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온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사역초기 언론을 통해 자주 접했던 필자로서는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의 충격으로 잠시간의 멍함이 찾아왔는데, 그 멍함은 나를 춘원 이광수 작품 『유정』에게로 이끌었다.
『유정』에서도 선생과 여제자의 사랑이 나온다. 주인공 최석은 친한 친구가 숨을 거두며 부탁한 그의 딸(정임)을 자기 집에 데려와 자기 딸들과 같이 키웠다. 정임은 아버지같은 존재이자 학교 선생님인 최석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것을 최석은 전연 모르고 있었으나 나중에 정임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자기도 몰랐던 자기 안의 '열정'(사랑)이 치솟아오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 마음이 도대체 억제가 안되자, 최석은 한국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혼자 하얼빈의 어느 광야를 거쳐 바이칼호 근처의 설원으로 들어가 혼자 집을 짓고 산다. 그리고 아내를 놔두고 친구의 딸이자 제자에게 열정이 생기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하나님이여 힘을 주옵소서, 천하를 이기는 힘보다도 나 자신을 이기는 힘을 주옵소서"라고 처절하게 자신과 싸운다. 어떤 날에는 "나는 하루 바삐 죽어야 한다. 이 목숨을 연장하였다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나는 깨끗하게 나를 이기는 도덕적 인격으로 이 일생을 마쳐야 한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몸을 혹사하여 아픔을 자처하고 "이것이 폐렴이 되어서 혼자 깨끗하게 이 생명을 마치게 하여주소서"하고 빈다. 그리고 정말 얼마 후 폐렴이 원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이 소설 속의 최석이 이동현 목사와는 다르게 그의 양심의 소리와 도덕적 기준을 지켰는데 당신도 그랬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날을 세우려 이 이야기를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 안의 '사랑'과 '죄'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고찰해보고 싶어서이다. 개인의 마음 속에서 순수하게 일어난 사랑은 어떻게 하여 죄와 연결되는가.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최석을 먼저 사랑했던 친구의 딸이자 제자인 정임의 고백 중 이러한 내용이 있다: "이것이 사랑인가. (...) 이렇게 어린 딸 같은 계집애가 설마 아버지 같은 그 어른을 사랑함이야 될까. 이것이 사모한다는 것인가. 딸이 아버지를 사모하듯이 사모한다는 것인가. 사모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랑을 구하고, 찾고, 하고, 바란다. 사람의 노래 중 사랑 노래가 아닌 것 찾기가 힘들다. 그리고 사랑이란 우리의 작은 가슴속에서 일어나건만 하늘의 별보다 우주의 운동보다 우리에게 더 아름답고 더 뜨겁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사랑은 여러 인간의 여러 상황에서 작용하는데, 우리는 때때로 그 사랑의 정의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다. 청소년 시절 가족보다 더 의지하며 지냈던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이 때때로 사랑같다. 교편 잡으신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 높아질 때 그것은 때때로 사랑같다. 교회 사역자에 대한 공경이 뜨거워질 때 그것은 때때로 사랑같다. 내가 사랑하며 가르치는 제자가 어여쁘고 기특하여 나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면 그것은 때때로 사랑같다. 이러한 사랑들은, 복잡하고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때때로 혼돈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순결한 감정에 의해 끌어올려졌으나 그것이 외부로 발현되었을 때 그 사랑은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최석은 부르짖었다: "한 번도 자유로 권세를 부려보지 못한 본능과 감정들이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한번 날뛰어 보려는 것이오. 이것이 선이오? 악이오?"
톨스토이의 말한 바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안쓰럽게도 불완전하여, 사랑을 하면서도 그 사랑이 무엇인지 스스로 규명하기가 힘들다. 다만 의지할 것은, 내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내 감정들이 온전치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내면의 양심의 소리와 율법을 청종하며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수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 기댈만한 것은, 진정 아름다운 사랑은 밖으로 끄집어내어졌을때도 대체로 아름답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상식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간음'이 구약과 신약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다루어져왔는가를, 그것에 결코 '사랑'을 갖다붙일 수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동현 목사는 분명 상대 여성보다 우위의 위치에 있었고 무엇보다 그 여성은 미성년자였다. 인간 안의 사랑이 오만가지로 다양하여 그것을 다 규명할 수 없다해도 이동현 목사의 그 행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보여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비단 그 온전치 못하고 규정하기 힘든 사랑의 모양들이 비단 그에게만 있었고 그에게만 있겠느냐 묻고 싶어서다. 인간은 누구나 때때로 이같은 애매모호한 감정들과 사랑들에 연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공개적으로 드러난 그의 잘못에 대해 공분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비슷한 불완전함의 처지에 놓여있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도 충분히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 목회자들의 성 문제, 혹은 이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잘못들이 더 이상 저질러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지할 곳은 불완전한 우리 안의 감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법이다. 그리고 그 법은 우리가 불완전할지라도 얼마나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 수 있을지에 대한 큰 가능성을 열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