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유다야, 너의 형제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너는 원수의 멱살을 잡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유다야, 너는 사자 새끼 같을 것이다. 나의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어 먹고, 굴로 되돌아갈 것이다. 엎드리고 웅크리는 모양이 수사자 같기도 하고, 암사자 같기도 하니,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으랴!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 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 만민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그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가장 좋은 포도나무 가지에 맬 것이다. 그는 옷을 포도주에다 빨며, 그 겉옷은 포도의 붉은 즙으로 빨 것이다. 그의 눈은 포도주 빛보다 진하고, 그의 이는 우유 빛보다 흴 것이다.]
설교문
* 한반도의 평화를 비는 마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남북평화통일기도주일입니다.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지 71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휴화산과 같습니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강행함으로 한반도를 긴장으로 몰아가고 있고, 남한은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사드 배치를 공론화하면서 동아시아의 긴장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저명한 진보적 사회학자인 장 지글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을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악의 전체주의 국가 중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장 지글러, <인간의 길을 가다>, 모명숙 옮김, 갈라파고스, 2016년 4월 29일, p.184). 강경한 남북의 지도자들은 조금의 양보도 없이 마치 치킨 게임을 하듯이 상대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길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1990년대 말 오사카에서 열린 남북기독자협의회 개회예배 장면이 생각납니다. 참가자들은 지난 시절에 전쟁과 분열로 인해 흘렸던 피의 기억을 씻는다는 의미에서 예배당 밖 복도에 준비된 대야 물에 손을 닦고 예배당에 입장했습니다. 참가자들이 입장할 때 반주자는 '고향의 봄'을 연주했습니다.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남북의 대표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입장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강영섭 위원장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전도서 5장 12절을 본문으로 하여,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남북의 기독교인과 해외에 체류하고 있는 동포들이 함께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자는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 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불렀습니다. 통일이 머지 않은 장래에 가능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통일을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막대한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현실적 계산도 있지만, 71년의 세월이 만들어놓은 문화적, 정치적 이질성이 민족적 동질성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마련한 2016년 평화통일 남북공동 기도문에는 이런 간구가 담겨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해방의 감격도 잠시, 우리 민족의 뜻과 배치되게 강대국에 의한 민족분열의 고통을 당하며 험하디 험한 길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만남과 대화로 화해의 물꼬를 트기도 했고, 경제협력을 통해 공동번영의 꿈을 잉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보다 더 높은 마음의 담을 쌓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깊은 불신의 강을 건너고, 분노의 아골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주여,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은 교회에게 화목의 직분을 주셨지만 이 민족을 바르게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평화의 사도로 부르셨지만 화해를 도모하기보다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둘로 나뉜 서로를 같은 동포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아예 사랑할 마음조차 품지 않았습니다. 주여, 우리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러한 고백의 바탕 위에서 아름다운 나라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로마 제국의 압제 하에 살던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보이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러한 평화의 꿈에 사로잡혀 살아야 합니다.
* 떠돌이로 산 세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이 혼란의 시대가 어떤 유형의 사람들을 요구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던 야곱이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워 온 것을 알고 자기 열 두 아들에게 들려준 유언의 일부입니다. 야곱의 생은 참 파란만장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그에게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하고 물었을 때 했던 대답이 그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47:9) '떠돌다'라는 단어와 '험악한 세월'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그는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길 위에서의 삶은 늘 고단한 법입니다.
쌍둥이 가운데 동생으로 태어났기에 그는 일단 약자였습니다. 장자가 아니라면 모두 약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악조건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붉은 콩죽 한 사발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얻기도 하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외가가 있는 밧단아람에 가서 외삼촌 밑에서 머슴살이 하듯 20년 세월을 보내면서도 그는 자기 재산을 불렸고, 많은 자식을 얻기도 했습니다. 기존질서의 눈으로 보면 그는 질서 파괴자요 혼란을 부추기는 자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인생을 가장 크게 뒤흔들어놓은 사건은 총애하던 아들 요셉의 실종이었을 겁니다. 요셉에 대한 편애로 인한 빚어진 형제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형들은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아들들로부터 요셉의 피묻은 옷을 전해받은 야곱은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마치 스올에 갇힌 것처럼 우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창37:35). 그리고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묻힐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기 삶을 계승할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 명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열 두 명의 자식들은 저마다 성정이 달랐습니다. 야곱은 창세기 49장에서 그들의 성정에 따라 다르게 전개될 자식들 각자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 르우벤, 시므온, 레위, 요셉의 리더십
최근에 유대교 학자인 요람 하조니(Yoram Hazony)의 책을 읽다가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레아와 라헬에게서 태어난 다섯 아들의 리더십 유형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요람 하조니,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김구원 옮김, 홍성사, 2016년 7월 11일, p.96-99 참조). 그의 인물평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르우벤은 보수성, 감상벽 그리고 장남 특유의 순진함을 대표한다." 맏아들인 르우벤은 다른 형제들이 들에서 요셉을 죽이려 할 때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창37:21)며 동생들을 설득합니다. 동기간의 불화를 해결해야 하는 장남으로서의 단호해야 할 때 그는 어중간한 타협책을 찾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한 사람입니다.
다음은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평가입니다. "시므온은 폭력을 통해 리더십을 주장하려는 경향을 보이며, 레위는 모든 문제에서 정의로움과 순결함을 집요하게 주장한다."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동생 디나가 히위 사람 세겜에게 강간당했을 때(창34장) 그 치욕을 씻기 위해 아버지 야곱과 상의도 없이 히위 사람들을 대량학살합니다. 레위의 후손들은 출애굽 당시에도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황금 송아지 사건 때에도 모세를 도와 우상 숭배한 사람들 3,000명을 죽였고,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여인과 음행을 했다 하여 시므온 지파 지도자의 아들인 시므리를 죽이기도 했습니다(민25:14). 그들은 비타협적 대립주의자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사람들을 지혜롭게 다스리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요람 하조니는 요셉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요셉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권력을 활용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애굽의 경제 주무 장관으로서 그는 자기에게 위임된 권력을 이용하여 7년 동안 계속되는 기근에 잘 대처했습니다. 그는 늘 자기가 섬기는 이들이 원하는 일을 탁월하게 잘 해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그는 충실한 청지기였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바로의 관원들을 세심하게 보살폈습니다. 참 좋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는 '무엇이 옳은가' 보다 '무엇이 정치적인가'에 의해 결정되곤 했습니다. 참모로서는 괜찮지만 역사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정의를 위해 수모를 택하다
이제 유다가 남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가문이 가장 위대한 지도자를 배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다야, 너의 형제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너는 원수의 멱살을 잡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 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 만민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창49:8, 10)
우리는 다윗이 유다 지파 출신임을 압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도 유다의 계보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과연 영광을 누렸습니다. 유다의 어떤 요소가 그를 지도자답게 만든 것일까요? 다시 요람 하조니의 평가를 들어보십시오. "유다는 개인적 약점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을 고쳐 도덕적 원리를 재확립하는 능력을 보여준다"(앞의 책, p.96). 요람 하조니는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특질은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능력"(앞의 책, p.99)이라고 말합니다.
유다 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무엇인가요? 며느리 다말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아들 엘과 다말을 맺어주었지만 엘이 후손 없이 죽자, 둘째 아들 오난이 형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둘 사이에 태어나는 아들은 맞이인 엘의 자식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난도 하나님의 눈밖에 나서 죽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을 셋째인 셀라와 맺어주지 않고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시간이 흘러도 자기를 부르지 않자 다말은 신전 창녀로 분장을 한 후 양털깍이 축제를 위해 길을 나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어느 날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한 유다는 다말을 이끌어내 화형에 처하려 합니다. 그때 다말은 유다가 맡겼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보이며 이 물건 주인의 아이를 잉태했다고 말합니다. 사태를 알아차린 유다는 즉시 자기 잘못을 시인하며 말합니다.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창38:26) 오늘의 윤리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후손을 잇는다는 것이 목숨처럼 소중하던 그 당시의 상황 가운데서 다말의 행위는 의로운 행위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의 부끄러운 행동을 숨기기 위해 다말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의를 위해 공개적 수모를 택했"습니다. 요람 하조니의 말은 강력합니다. "역사서 저자는 겸손히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고칠 수 있는 지도자의 능력이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국가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말하고 있다"(앞의 책, p.99). 자기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지도자야말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법입니다.
유다가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대목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 전에 형들의 태도를 확인하기 위해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 그를 종으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유다가 나서서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창44:33) 하고 청합니다.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잃은 후 실의의 날을 보내는 아버지가 그나마 위로를 삼는 것이 베냐민인데, 그 아이마저 종으로 팔린다면 아버지가 겪을 고통을 차마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래 전에 자기 형제들에게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리자고 제안했던 사람이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이렇게 변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각 정당마다 대표자를 뽑는 일로 분주합니다. 정파적 이익에 따라 지도자를 뽑고 그를 통해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는 데만 집중한다면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도 유다가 보여준 리더십을 보여야 합니다. 물론 시므온과 레위처럼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때도 있고, 요셉처럼 세상을 안정되게 만드는 이들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유다 유형의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또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이들을 통해 나라는 든든히 설 것입니다. 해방의 완결은 분단체제가 극복될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단호하게 평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국정의 지도자들만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의 자리에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답게 살아갈 용기를 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이 나라가 평화로운 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