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례교 총회의 <윤리 및 종교자유 위원회> 위원장인 러셀 무어 목사는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낯선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은데, 바로 그 사실이 복음적이다." 복음서들처럼 사도행전도 "키에르케고르의 표현대로, 기독교는 갈등의 표지일 때 번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다수자의 지위에 있다는 관념을 벗어버리고 사회 내 소수자로서의 역할을 떠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서 저지르는 가장 위험한 짓은 기독교를 정상화하고 복음을 정상화하는 것(모든 사람의 동의를 전제로 해당 의제를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행위. 따라서 기독교와 복음을 최고의 기준, 규범으로 삼고서 다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함)"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조정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모욕이라고 지적했다. 기독교인들은 세속문화가 신앙의 특정 요소를 조정해서 현대적 감수성에 어울리게 만들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예전에도 이미 제기되었고 시도되었으나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은 만일 그들이 고색창연한 성경적 성윤리를 포기하게 되면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당대 사람들에게 "거북해" 보이는 것들, 즉, 동정녀 탄생, 빈 무덤, 기적 등의 요소들을 제거할 때 기독교 신앙이 보다 바람직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깨닫지 못한 점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거북했었고 '걸려넘어지는' 돌부리였었다.... 기독교는 어떤 문화권에 들어가든 낯설고 거북한 말을 선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는 미국의 꿈을 성취하는 통로도 아니다. TV에서는 번영을 설교하는 부흥사들이 많다. 한 부흥사는 금으로 된 왕좌에 앉아서 '비록 복음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이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이 "살아갈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TV에서 황금보좌에 앉아 말하는 것은 쉽다. 만일 누군가가 1세기 에베소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한 메시야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면 그 사람은 시장에서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어 있었다. 지금 현재 중국의 미등록 가정교회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수단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사실, 그것은 기독교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제기해온 내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기독교는 추문과 십자가에서 시작한다. 미친 짓거리인 것처럼 보인다면 잘 된 일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예언적 메시지는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는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지시하고 있다.
무어 목사는 미국이 현저한 기독교 국가라는 생각도 정상화의 오류라고 지적했다. "하나님께서 미국민을 특별한 민족, 새로운 이스라엘, 기독교 아래 계약을 맺은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복을 내리기 위해 미국과 계약을 맺었다는 생각 ...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20년 전의 전통적인 기독교적 가치로 주류 미국문화를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로서는 좋은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언자적 소수"가 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가 가득하고 미국문화가 그 기독교적 뿌리로부터 멀어질 때 기독교 신앙과 그 의미는 더 분명하게 선포될 수 있게 된다.
"사람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은 갈릴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어 말하라고 하신 내용을 말하고 거기에 가감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기사출처: http://www.christianpost.com/news/russell-moore-prosperity-preachers-sitting-on-gold-thrones-dont-understand-persecuted-church-168370/#OVLrIZTeZKek7iib.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