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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농부, 예언자, 욥

2016년 8월 21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약 5:7-11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보십시오. 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여워하시는 마음이 넘치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

설교문

* 시간의 향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제 처서가 눈 앞입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맹추孟秋라 하는데, 뭐든 잘 잊어버리는 흐리멍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가을의 초입이라는 뜻입니다. 늦더위가 남긴 했지만 이제 오는 가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무성하게 자라던 풀들도 이제 시드럭부드럭합니다. 농부들의 시름이 조금은 덜어졌을 겁니다. 자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처연합니다. 그 작은 것들이 그렇게 온 천지를 뒤흔들듯 우는 것을 보면 참 신비합니다. 시골 매미보다 도시 매미가 더 크게 우는 것 같습니다. 환경이 그만큼 열악하기 때문일 겁니다. 달포 정도의 시간 동안 짝짓기를 하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수컷 매미의 절박함이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세상에 영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고통조차도 그러합니다. 물론 잊혀지지 않는 고통도 있습니다. 잊혀지기는커녕 세월이 갈수록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그런 고통 말입니다. 잊히지 않는 고통을 잊으라 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억울함이 풀릴 때 고통은 누그러집니다. 전도서 기자는 세상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말합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습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습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전3:1-8). 그 '때'를 분별하는 게 지혜이고 철듦입니다. 철이 들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정말 아름다운 것은 시간이 온전히 녹아들어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속화된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의 삶은 KTX를 탄 것보다 더 빨리 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급증이 늘어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속에 떠오른 욕망이 즉시 충족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홈쇼핑 광고를 보고 전화로 새로운 상품을 주문하고, 패스트푸드를 먹습니다. 뭘 하든 이드거니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거나 자기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못합니다.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채 격분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한병철 교수는 뭐든 '즉시' 해결되어야 하는 시간 경험을 가리켜 포르노그래피적이라 말했습니다. 포르노그래피는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는 지체, 지연, 우회를 특색으로 에로틱한 시간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이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년 5월 25일, p.95). 새 것 강박증에 걸린 문명은 그 자체로 파괴적입니다. 생산에서 폐기 사이의 시간이 짧아질수록 사람들은 '시간의 향기'를 경험하며 살기 어렵습니다. 한 때 '느림'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유행했지만 그것도 빨리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도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깊은 세계 속으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걸어 들어가기보다는 즉문즉답 식의 해결책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뿌리가 부실해졌습니다. 성공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면서 믿음이 그 욕망 충족을 보장한다는 식의 가르침들이 유행하고 있고, 그릇된 은사주의와 그에 따른 독선이 많은 이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타자를 향한 철저한 자기 증여로서의 '십자가'는 부적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찬미하는 일에 열중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외롭습니다.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 우보천리

초대교회의 상황 또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성령강림절 이후 '그 도' 곧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품고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빈곤도 박해도 그들 내면에서 솟구쳐 나오는 기쁨과 희망을 소멸시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 정신에 사로잡힌 이들은 '함께 함'의 기쁨을 한껏 누렸습니다. 지배에의 욕망은 스러졌고, 섬기고 나누고 돌보는 일 속에서 새로운 세상의 단초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정의 시간은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법입니다. 축제가 끝나면 미적지근한 일상이 기다리는 것처럼, 사람은 뜨거운 열정 속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일상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함의 연속입니다.

다시 오시겠다 약속하셨던 주님은 오시지 않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회를 떠났고,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조차 십자가를 든든히 붙들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은 있었지만 믿는 대로 살기 위한 치열한 노력은 줄어들었습니다. 삶이 소거된 믿음의 고백은 허망합니다. 그런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멀어지면서 사람들은 서로를 원망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과 벗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교회 유지에 재정적으로 기여하는 이들의 발언권이 높아가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차별과 업신여김이 성행하면서 사람들은 거침없이 서로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말이 문제입니다. 몽둥이에 맞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혀로 맞은 상처는 시간이 가도 아물줄 모릅니다. 야고보는 그래서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지체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며,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혀도 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3:6)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5:7a)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를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유혹 혹은 방해물들이 참 많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굳건히 세우지 않는 한 우리 마음은 촛농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흐물흐물 무너져 내리기 쉽습니다. 일단 어떤 길을 선택하면 이리저리 옮기지 말고 그 길을 꾸준히 걸어야 합니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가 거두는 법입니다. 불교가 가르치는 팔정도 가운데 하나가 '정정진正精進'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바르게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소가 진흙에 발이 빠지면서도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처럼 꾸준히 걷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문명교류학의 기반을 닦은 정수일 교수의 자전적 글을 읽다가 만난 두 단어가 제 뇌리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을 '우보천리牛步千里', '우답불파牛踏不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소 걸음으로 천리를 가는 매진邁進 정신과 소가 밟아도 깨지지 않는 반석 의지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터키의 소설가인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소설 쓰기를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바늘 삼아 강고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의 지층을 꿰뚫어 진리의 실체를 드러내보이고 싶어합니다.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바로 이런 끈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참'이라는 시를 들어보셨나요?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지 마라

참참이 참아가서 영원한 참 갈 것이니

참든 맘 참 참을 보면 가득 참을 얻으리."

'참'이란 단어가 반복되고 있고, 그 의미가 조금씩 변주되고 있어 이해하기 쉬운 시는 아닙니다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그 마음이 참으로 가득 차야 한다는 말로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글에서 함선생님은 '참은 참음(忍)'이라고 말합니다. 졸음도 참고, 피곤도 참고, 아픔도 참고, 낙심하는 것도 참아야 이 죽음의 땅을 건널 수 있다는 것입니다.(가려뽑은 함석헌 선생님 말씀, <사랑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김영호 엮음, 한길사, 2009년 3월 13일, p.232)

* 참음의 본보기

야고보는 농부와 예언자들과 욥을 참음의 본보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에덴동산 이후 땅은 인간의 땀이 흘러야 먹을거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농부의 일은 파종과 수확만이 아닙니다. 농부는 땅을 일궈 밭을 만들고 거기에 씨를 뿌리고 움트기를 기다립니다. 곡식이나 푸성귀가 잘 자라도록 풀도 뽑아줘야 하고, 가물면 물도 대줘야 합니다. 병충해를 방제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도 기울입니다. 애써 가꾼 것이 폭우에 떠내려가기도 하고, 햇볕에 타죽기도 합니다. 얼마 전 홍천의 동면교회에 옥수수 수확을 하러 갔을 때 산 밑에 있는 오백 평 밭에 심은 옥수수를 멧돼지가 다 쓰러뜨린 것을 보았습니다. 암담해도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해내는 농부는 인내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언자들 역시 파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묵정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입니다. 예언자들의 운명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주로 하니 그들은 늘 배척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렘20:8) 예레미야의 고향 마을인 아나돗 사람조차 예레미야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건 예레미야만의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참 예언자들은 그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마르티르(martyr)는 그리스어로 순교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법정에서 자신이 선택한 말이나 행동이 진리임을 증언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숭고한 원칙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즉 '순교하다'"(배철현, <심연>, 21세기북스, 2016년 7월 20일, p.195-196)입니다. 예언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목숨을 걸고 주님의 말씀을 증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진리를 위하여 시련을 겪는 것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라면서 예언자들을 본보기로 삼으라 이릅니다.

욥 또한 참고 견딤의 본보기입니다. 단란하고 행복했던 그의 삶은 어느 한 순간 다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재산과 자식과 명예까지 다 잃어버렸습니다.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차라리 죽어 그 모든 시름을 잊으면 좋겠지만 죽음조차 그에게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그가 겪는 고난이 그가 저지른 죄의 결과라고 다그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끝없이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그는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는 말을 잊고 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됩니다.

* 하나님을 신뢰할 때

서로 원망하지 않으며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양을 통해 그런 힘을 어느 정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 삶을 진부함에서 구해내고, 진리의 길을 뚜벅뚜벅 걸을 수 있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는 '인내'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갈5:22).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14:18) 하셨습니다. 세태를 거스르면서 위의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시련이 찾아올 때도 있고, 길을 잃은 듯 답답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가여워하시는 마음이 넘치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완벽한 삶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도 기어코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나아가려는 열정입니다.

저는 가끔 자기 삶이 너무 평범한 것 같다며 우울해하는 이들에게 사소한 일에도 주위의 사람들과 삶을 경축하며 살아보라고 권합니다.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은 위대한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소한 일을 나눌 사람이 필요해서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저는 해가 갈수록 우리 교우들의 표정에 기쁜 장난기가 깃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가끔 삶의 지향을 잃어버려 헤맬 때라도 못났다 내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공동체가 있는 한 삶의 빈곤하지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인내는 이를 악물고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유쾌하게 세상을 뒤집어엎는 끈질김입니다. 농부, 예언자들, 욥을 우리 삶의 본보기로 삼는 동시에,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이들의 명랑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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