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당신에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다(마25:40). 스스로 설 수 없는 가난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사건의 현장에 함께 계심을 선포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를 비우고 연약한 자의 삶을 소리 없이 부둥켜 끌어안을 때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누린다. 잠자고 있던 내 안의 신성이 깨어나고 그곳에 함께하는 신의 현존을 마주하게 된다.
신앙은 앎과 말, 지식과 관념의 틀 안에 고여 있을 때 썩기 시작한다. 행함 없는 믿음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헛헛한 신앙의 자리엔 왜곡된 신비주의와 기복주의, 하나님 아닌 우상이 자리한다. 종교는 살기 힘든 세상을 버티게 하는 아편으로 전락해버린다.
살아있는 신앙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신의 현존이 있는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치열한 낮아짐으로 자아를 비우고 삶으로 예배해야 한다. 그 길은 좁다. 협착하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곳에 생명이 있다고(마7:13~14, 눅13:24).
오늘날 한국 기독교와 목회자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예수의 관심이 있는 곳인가? 맘몬의 관심이 있는 곳인가? 예수는 분명 광야의 시험을 통해 당신의 나라는 돈과 명예, 권력에 의지한 나라가 아님을 말씀하셨다(마4:1~11). 그럼에도 돈과 인기, 정치권력과 결탁한 종교인들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가 자본의 원리로 운영되고 진리의 따름이 아닌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투는 모습이 낯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뙤약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이었다. 전북 김제를 찾았다. 생명나눔흙살이 김형진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김 목사는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땅을 일구고 있었다. 노동의 피곤함과 반가움이 함께 섞인 얼굴로 반겨주었다.
생명나눔흙살이는 땅을 살리는 생명농업으로 생명을 나누기 원하는 공동체다. 도시와의 연대를 통해 상생을 꿈꾼다. 특별히 청각장애인들의 자립적 생활에 비전을 품고 있다. 김 목사가 이곳에 내려온 지 좀 있으면 10년이 된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묵묵히 한 곳에서 정주하며 목회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공동체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물었다. "호랑이 탄 도둑놈이란 말이 있죠. 멈춰도 죽고 달려가도 죽습니다. 멀리서보면 마치 신선 같죠. 저도 그런 모양입니다." 그의 너스레 안에 겸손의 기품이 배어 있었다.
김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청각장애인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을까? 그저 자연스런 만남의 인연이었다고 말한다. "청각장애인들을 만나게 된 첫 계기는 선배와 함께 수화를 배울 때였습니다. 수화를 배우고 난 후, 학교에서 수화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청각장애인 부서를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 인연들이 쌓여 벌써 24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그러나 청각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하게 된 이면엔 신학적 배경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김 목사가 만난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 분이다. 그는 말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율법의 중심에 고아와 과부, 객이 있습니다. 언어 너머의 본질을 살필 때 그들은 스스로의 생활을 책임질 수 없는 이들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람대접을 받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들의 기본적인 삶의 인권과 존중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김 목사에 복음이란 교회와 개인의 내면세계, 내세에 국한되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총체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소식이었다. 구체적 현실과 시간 속에 이뤄지는 변혁이었다. 그는 말한다: "지극히 작은 자들은 향한 돌봄과 선교는 단순히 물질적 차원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그것은 근본적 문제해결의 길이 아닙니다. 인식과 구조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향한 편견과 선입견의 내려놓음, 외모로 평가하는 인식이 신앙의 힘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의 변화가 함께해야 합니다."
인간과 구조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구조만을 탓할 수 없다. 구조는 누가 만들고 운영하는가? 인간이다. 인간의 인식이 변화될 때 구조의 변화도 동반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변화되어야할 인식의 주제는 무엇인가? 김 목사에게 물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믿음이 팽배합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인간도, 생명도, 창조세계도.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돈이 아닌 가치로도 살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는 보다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한국교회의 신학은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려하지 않았다. 이 땅에 이뤄지는 하늘의 뜻을 교회와 도그마에 국한시켰다. 전도를 많이 하고 성도의 수를 늘리고 성전을 크게 짓는 일에 몰두했다. 인간 예수보다 메시아 예수를 전부로 여겼다. 그로 인해 교회는 사회의 중심이 아닌 변방으로 내몰리고 있다. 사회와 소통할 수 없는 비상식적 언어로 취급 받으며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
이런 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신학은 땅과 하늘, 교회와 세상, 몸과 영, 죄인과 의인, 선과 악의 이분법적 신학의 극복이다. 조화와 통합, 일치의 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추상적인 신학이 아닌 일상적 신학의 등장이 필요하다. 김 목사는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포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신학이 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 속에, 내가 만나는 사람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숨결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김 목사는 공동체를 꿈꾼다. 제도의 공동체가 아니다. 진실하고 친밀한 삶으로의 공동체를 꿈꾼다.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청각장애인과 일반인이 함께하는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진정한 예수의 길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면 가능한 현실이라 믿는다. 김 목사는 지난 목회의 여정 가운데 두 가지 목회의 욕심을 내려놓았다. 첫째는 숫자에 대한 욕심이다. 둘째는 설교에 대한 욕심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의 수가 목회의 성공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이 예수 안에서 행복한 것이 목회의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엔 저도 설교를 말씀선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의 설교는 말씀선포가 아닌 나눔 밖에 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감동 섞인 말도 좋지만, 눈빛 하나, 하나를 진실하게 마주치며 공감하는 것이 목회의 기본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김 목사와 짧지만 깊은 대화를 나눴다. 삶으로 녹아든 앎의 깊이를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어두운 현실 앞에 답답해하는 그의 애통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믿음과 소명의식 안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힘쓰는 그의 열정의 중심이 마음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