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곳곳이 흔들리고 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감행한 핵실험으로 인공지진이 일어났고 자연지진은 경주, 아니, 남한 일대를 뒤흔들었다.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태24:7-8).
그런데, 자연지형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지형도 흔들리고 있다. 삶의 터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삶의 터가 흔들리고 있었기에 자연이 그것에 상응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의와 공감이 희박해진 사회가 서로를 지지하는 결속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의 음성을 들려주셨다고 해석한다면 과잉반응일까? 하지만, 놀랍게도 이것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마태24:10).
더 큰 재난이 벌어지고 있으니, 바로 사람들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는 사회적 지진이다. 이처럼 정의와 공감이 사라진 상황은 인간의 탐욕이 진앙 역할을 하는 지진의 양태이다. 북한의 인공지진이 정의와 공감의 파열이듯이 백남기 농민이 숨을 거둔 오늘(9월25일) 우리 사회도 인공적 지진의 와중에 있다.
그러나 이처럼 삶의 터가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가진 자'는 재난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을 보호하며 자신과 동일한 계층의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고 있었다. 정치인, 관료, 기업인, 종교인, 교육자, 의료인들은 자기보호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는 아수라장 속에 뒤엉겨 있으면서도 '사자의 몫'(lion's share)을 누렸고, 또한 누리고 있다. 그러한 불법이 (은밀히) 난무할 때 누가 누구를 사랑할 것이라 기대하겠는가?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태24:12).
사랑이 식어지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지평이 흔들린다는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결국 사랑을 몸소 행하는 것일진대, 결속과 연대와 유대가 제도화되어버리고 공감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사랑이 힘을 잃게 되어 있다. 사랑이 사라지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더 노골적으로 전개될 것인데, 흔들리는 터 위에 세워진 바벨탑이 혼란의 구현체가 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마태11:15). 피리 소리가 들리는 데도 춤추지 않고 애도하는 노래를 불러도 슬퍼하지 않는 공감부재의 상황 속에 더 이상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영적 맹인의 상태에서 깨어나 예수께서 바벨탑 아래에 버려진 자들을 찾아다니고 계신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삶의 터가 흔들려서 공포를 느끼며 연명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하나님께 확성하여 들려드려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렇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24:13).
*사자의 몫: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일화와 관계있으며 강자가 부당하게 모든 것을 차지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 우화에서 약자는 강자의 노동에 참여할 수는 있으나 그 노동의 대가를 함께 누리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