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날을 박 대통령은 어떤 마음으로 맞이할까? 유행가 "잊혀진 계절" 속의 그 날은 말 못할 사연과 이별의 슬픔을 반추하는 날인데, 우리의 대통령은 황망함과 곤혹스러움과 배신감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날일 것 같다. 80년대를 풍미했던 그 유행가로 인해 10월의 마지막 날은 낭만적 추억을 '조성'했던 날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박 대통령은 눈앞이 하얘져서 현기증과 구역질만 느끼고 있을 날일 수도 있겠다.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의논했던 '영혼의 친구'가 사실상 자신을 이용해서 치부하고 국정을 농단했기 때문이다. 옷 색깔, 보톡스 시술 날짜, 공직자의 임면, 대북정책, 한일관계 등 사소한 개인사로부터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일들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귀신이 시킨 대로 한 것에 불과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할 것 같다.
이러한 사태의 근원에는 박 대통령이 '얼음 공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삶의 이력이 놓여 있다. 그녀는 부모를 차례대로 총탄에 잃은 사건들의 트라우마와 홀로서야 하는 상황의 불안함 속에서 살아와야 했다. 그녀에게 위로와 예지는 늘 갈급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녀는 위로와 예지로 보이는 '독 발린 사과'를 거머쥘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도 이와 비슷한 삶의 족적을 보여준다. 블레셋과의 전투가 있은 뒤 백성들이 애송이 청년 다윗에게 "만만"의 칭송을 돌리자 왕으로서의 자존심은 상처를 받았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재위기간 내내 다윗을 추적하느라 정력을 소진하게 되었다. 사울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지기도 했다(사무엘상19:9). 이처럼 상처와 불안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이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신접한 자에게 의지하게 된다.
사울 왕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사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역대상10:13-14)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몰락했다. 그런데 사가는 그 범죄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 한 것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였지만 상처와 불안과 권력욕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몰각했다. 박 대통령의 상황이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가톨릭의 영세도 받았고 요청만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와줄 '큰 목사들'도 많이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기독교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처와 불안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일이다. 그것이 귀신의 영향을 몰아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귀신에 의존하면 망하게 되어 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4:6). 그리고 그 상처와 불안은 사울이 창칼에 의지한 것처럼 법의 칼을 휘두르는데 익숙한 사람들의 울타리 속에 있다고 치료되거나 해소되지 않는다. 게다가, 상처와 불안과 권력욕 때문에 신접한 사람을 찾아가게 될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들이 몇 명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박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농락당한 국정을 갱신하는데 매진해야 한다. 여야의 정치인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침 10월의 마지막 날이 기독교가 발아한 종교개혁기념일인 것처럼, 이날이 교회에나 우리나라에 개혁과 변화의 날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박 대통령에 대해 쓸쓸한 기억을 남기며 잊혀져버릴 것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 모든 국민이 기도했던 날로 기억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