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올해는 기장 탄생의 산파였던 장공 김재준 목사가 태어난 지 115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9월27일에 열린 예장통합의 101회 총회에서는 장공의 제명을 철회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기장과 예장이 분립하게 된 제명 의결이 철회됨으로써 장로교 분파 내의 화해에 첫걸음이 디뎌진 것이다. 장공의 제명 철회가 갖는 교회사적 의의에 대해서 장공기념사업회 이사장인 김경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와 대담을 나누었다. 대담은 본지 이인기 편집국장이 진행했고 김진한 대표가 배석했다. 대담의 내용은 3회로 나누어 소개된다.
이인기 편집국장(이): 올해로 장공 김재준 목사 탄생 115주년을 맞았습니다. 또한 하나 더 기념할 일로서 예장통합 총회에서 장공의 제명을 철회하는 결정이 있었습니다. 분열을 거듭하는 한국교회사에서 큰 의의가 있는 결정입니다. 장공기념사업회 이사장님으로서 이 결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경재 교수(김): 한국개신교회 장로교의 역사 속에서는 의미 깊은 일입니다. 예장통합 총회장인 이성희 목사님을 위시한 임원진들이 지난 101회 총회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그 사건 자체가 역사적입니다. 그래서 기자들도 20-30여분이 취재하였습니다. 개신교는 그동안 분열로 점철된 역사를 이어왔는데, 그 와중에 예장통합 총회에서 과거 사건인 제명을 철회하는 아름다운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통합총회에서 보내온 공식 문건은 고(故) 김재준 박사에 대한 제38회 제명 결의 철회 통지라는 제목 하에 1953년 서문교회에서의 총회 결정이 '권징 없이 책벌할 수 없다'는 헌법 조항에 위반되기 때문에 그 결정을 철회한다고 기재하고 있습니다. 즉, 김재준 박사님의 신학에 대한 연구 결과로 도출된 신학적인 반성이 아니라 행정적인 잘못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김재준 박사의 제명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김: 기독교장로회(기장)이 출현하기 전인 1952년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가 김재준 박사가 속해 있는 경기노회에 지시하기를, 성서해석에 대한 김재준 박사의 신학적 입장에 문제가 있으니 김 박사를 제명처분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신학교 출신자들의 직역도 취소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경기노회에서 37회 총회의 결의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경기노회 입장에서는 총회의 결의가 잘못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자 그 다음해인 1953년 대구 서문교회에서 다시 열린 제38회 총회가 직권으로 김 박사를 파문했습니다. 권징절차에 위배되는 결의를 하였던 것입니다. 중세도 아닌데 총회가 해당 목사에게 충분한 소명 기회도 주지 않고 노회도 거치지 않은 채, 직권으로 권징절차를 밟았습니다.
이: 그러니까 이번 101회 총회에서 제명 결의를 철회한 것이 바로 제38회 총회의 행정적 절차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신학적인 측면에 대한 해명은 전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김: 그렇습니다. 권징절차의 위법성에 대해서만 인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제명 철회가 의미가 있는 것은 금년 가을에 안산 제일교회에서 열린 예장통합 총회에서 제명철회를 만장일치로 결의하였으며 총회장 및 임원들이 그 사실을 통보하면서 직접 기장총회를 '방문'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체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신학적인 언명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또 다른 신학적인 논쟁이 시작될 것을 우려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총회장과 임원이 기장총회를 방문한 사실 자체가 과거의 결정에 신학적인 잘못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였지요.
이: 화해와 일치의 문제라면 예장통합이 아니라 예장합동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왔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쉬운 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총회에서 장공의 신학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두 교단이 화해와 일치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회복한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1952년의 결정 자체의 의미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장공에 대한 제명 처분이 과연 신학상의 문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장공을 둘러싼 교권의 문제였는지 그 핵심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 그 시절에 일어난 일에 관하여 교파적 입장을 초월해서 가장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자료는 김양선 교수의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입니다. 이 책은 1945년부터 1955년까지의 장로교의 분열 과정, 내막, 역사적 의미에 관하여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1953년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8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파문한다, 조선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한다, 조선신학교에서 교육받은 전도사가 목사 안수 받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자,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공감을 하여 같은 해 한국신학대학 강당에 모여 38회 총회 결정이 위법임을 선언하고 새로운 교단 출발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내막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분명히 성서해석을 둘러싼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역사의식이 고조되고 시대정신과 문화가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자 성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사상에 관하여 성경에 씌어진 문자 그대로 오류가 없다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박형룡과,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문자 그 자체가 무오하다는 축자영감설이 아니라 그 성경 안에 복음의 정신과 하나님의 뜻이 무오하다는 입장(저는 이런 입장을 축자영감설에 대비하여 목적영감설이라 부릅니다)을 취하는 장공의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장공 정신은 문자에 구애받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성서에 관하여 문자주의에 빠져서 자칫 복음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에 대해 문자에만 연연하게 되면 그 정신을 살릴 수 없습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성경의 말씀대로 문자보다는 참된 영성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약 신학적인 문제만 있었다면 서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연구하고 논의를 하면서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배워가면서 해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38회 총회는 교권적 결행으로서의 파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번 101회 총회의 결의는 교권적 결행으로서의 파문 바로 그 점에 대해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이: 그런데, 사실 신학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간접적으로나마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습니까? 예장합동 신학교에서도 역사비평적 방법을 비록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지 않지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신학대학과 기장의 교육기관인 한신대학교 양 측에서 교수들이 서로 강의도 교환하며 양 측의 신학자들이 쓴 책을 모두 교재로 사용하면서 토의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신학적으로는 이미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지요? 물론 공식적으로 천명한 적은 없습니다만.
김: 그렇습니다. 60여 년 전 장공의 성서해석학적 입장인 소위 역사비평적 방법이 현재 두루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은 이 방법을 더 이상 이단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론 교단과 목회현장의 목회자들이 교역자 양성기관인 장로교신학대학에서 성서비평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에 대해 모두 동의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신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김명용 박사가 18권으로 된 장공의 전집을 다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김명용 박사는 본인이 성서신학자는 아니지만 장공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니 장공의 신학에 무엇이 문제인지, 정말 비복음적인지 보기 위해서 읽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장공이야말로 건전한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너무 오해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성서비평학도 그 스펙트럼이 불트만에서 몰트만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한데 장공은 그 중 보수적 진보주의자,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현 시점에서 교단의 통합이 곧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거나 교단의 통합이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지가 여럿이 쳐져 있어서 또 발전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더 이상 신학적인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해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김재준 목사를 비롯하여 분립선언을 한 200여명의 목사들이 분파를 결정한 것은 스스로 교권을 잡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장공의 표현을 빌리면 가인의 아벨 살인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권을 잡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또 다른 형제를 살해한 것이라고 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분파를 자발적으로 원한 것이 아니고 쫓겨난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화해가 이루어진다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제까지 제 생각을 정리하면 장로교의 제38회 총회는 성서해석에 있어서의 신학적 입장이 고려되었고 그와 별개로 교권주의자들의 대심문관적 행태가 벌어졌습니다. 주의 종 답지 않은 분들의 신앙적, 인격적 폭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101회 총회가 그 교권주의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반성을 했습니다. 물론 총회 결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신학적인 언급이 없어서 아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최근 독일을 방문했었는데, 베를린의 한 복판 광장에 선조들의 유태인 학살 사건에 대해 석탑을 세우고 후세들에게도 역사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용기와 자세가 부러웠습니다. 젊은 세대가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선조들이 학살 범죄에 대해 가담하거나 침묵한 것에 대해 공식적인 참회를 하는 것을 보고 많이 느꼈습니다. 일본과 우리의 관계, 한국교회 내의 풍토 등을 생각해 볼 때,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해서 당시 성서에 대한 역사비판적인 학문적 연구방법을 세계적 조류에 어긋나게 이단으로 단죄한 것은 당시의 한국교계가 세계 학문계의 흐름에 투철하지 못한 증거라는 정도만이라도 인정했더라면 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결정이 될 법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 교단이 결정할 문제이지요. 우리 편에서 요구하거나 주장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