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동기가 천국에서의 보상 때문이라고 가르치는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어본 것이 언제인가? 내 생각으로는 우리 대부분에게 매우 오래된, 아니 심지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대개 설교나 신앙서적에서 순종의 동기를 설명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감사 때문이라고 거의 항상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으로 유일한 동기인가?
신약성경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신실하게 박해를 견디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누가복음 6:23)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린도전서 3:8). 히브리서 기자는 심지어 모세가 보상을 바라고 일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브리서 11:26).
이처럼 천국의 보상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요한 동기로 분명히 제시되고 있는데, 왜 오늘날의 강단으로부터 천국의 보상에 대한 설교를 더 이상 듣지 못하는가? 그 의문에 대한 대답들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한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리의 순종이 중요하지 않다고 교육받아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었고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다는 말씀이 강단에서 많이 선포되는 동안에 우리의 순종은 상대적으로 적게 관심을 받은 것이다. 칭의가 중심 무대라면, 성화는 주변 무대였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중시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선한 동기에서 유래한다. 즉, 우리가 우리의 순종을 무시할 때 그리스도께서 가장 영화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행은 그저 "더러운 누더기"(이사야 64:6)에 불과하다는 말씀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생각은 불신자가 법을 지키려는 시도와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시도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두 시도는 구원이나 칭의에 온당한 값이 될 수 없다. 둘 다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는 슬플 정도로 모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자의 순종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노력이 불완전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존 파이퍼 목사의 논평을 참고해보라:
"가치있는 유일한 의로움은 그리스도께서 부여한 의로움뿐이라고 사람들이 말할 때 매우 혼란스럽다. 나는 칭의가 우리의 의로움에 전혀 기반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마치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일들이 전혀 없는 양 인간의 모든 의로운 행위들을 무시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부주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의로움은 '더러운 누더기'라고 말하는 이사야 64장6절을 자주 인용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아들들이 내가 한 말에 순종할 때 비록 그것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순종을 '더러운 누더기'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하나님도 그러하지 않으신다. 게다가 그분은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히브리서 13:21) 원하신다. 그분은 자신이 이루신, 성령으로 맺은 열매를 '누더기'라고 부르지 않으신다." (『더 큰 은혜』, 151-52)
성경에 나오는 천국 보상과 관련된 말씀이 의미를 갖게 될 때는 우리 믿는 자들의 순종이 진정으로 중요하며 우리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뿐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역에 혼신을 다하는 우리들이 엄청난 격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를 쓸 때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한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린도전서 15:58)는 말씀을 듣고서 격려받기를 원한다.
기사출처:
http://www.biblestudytools.com/blogs/michael-j-kruger/why-do-modern-christians-rarely-talk-about-rewards-in-heave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