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담임목사 이재철) 부설 양화진문화원(원장 김성환)과 도서출판 홍성사(대표 정애주)는 『로제타 홀 일기 4』를 발간했다. 양화진문화원은 『로제타 홀 일기』 시리즈를 모두 6권으로 발행할 예정이며, 2015년 9월에 『로제타 홀 일기 1』을, 2016년 3월에 『로제타 홀 일기 2』를, 2016년 7월에 『로제타 홀 일기 3』을 출간한 바 있다. 양화진문화원은 이 책을 한국교회사와 선교사의 사역을 연구하는 전문가, 한국 근대사와 교회사 관련 도서관 및 로제타 홀과 관련이 있는 기독교 기관들에게 배포할 계획이다.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한국에서 2대에 걸쳐 77년 동안 의료선교사로 헌신한 홀 선교사 가족 중 가장 먼저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이번에 출간된 『로제타 홀 일기 4』에는 로제타가 서울에서 맞은 세 번째 해인 1892년 3월 8일부터 1894년 10월 1일까지, 약 2년 7개월 동안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윌리엄 홀과의 결혼과 평양 선교 개척과정, 그리고 남편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겪은 스크랜턴 등 동료 선교사와 에스더를 비롯한 한국인 조력자 사이에 겪은 경험을 아주 솔직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녀는 김창식 목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 에스더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을 제공한다. 그녀의 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로제타는 평양 선교 초창기 발생한 '평양 기독교인 박해 사건'에 대해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겪은 바를 매우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윌리엄 홀과 마펫 선교사의 조사로 함께 평양에 갔던 김창식의 행동에 대해 '순교자와 같았다'고 기록할 정도로 좋게 평가하고 있다. 1894년 5월 11일 일기에서 그녀는 김창식을 '한국의 바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아마도 후일 김창식 목사가 이 같은 별명을 얻게 된 것도 그녀의 일기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기록했다.
감사가 이렇게 늑장을 부리며 전보에 적힌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있으니 그가 풀려나기 전에 죽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의사 선생은 창식을 보러 갈 때마다 그 광경이 너무 처참하여 울고 만다. 그들이 창식을 오 씨나 한 씨보다 더 심하게 때리고 위협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포기하라는 요구에 불응하고 있을 뿐 아니라 풀려나면 복음 전파를 그만 두겠느냐는 물음에도 계속 전파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바울'(Korean Paul)로 인해 주님께 찬양을 드린다! (1894년 5월 11일 일기에서)
에스더는 로제타가 서울 보구여관에서 사역하게 된 직후 보조자로 만난 이후 우리나라 최초 여성 의사가 된 후에도 동역했다. 따라서 이 일기 속에 가장 자주 그리고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에스더이다. 아울러 처음 만난 순간부터 평양 사역에 동행하기까지 주고받은 대화와 편지도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로제타는 일기에서 에스더의 믿음이 커가는 과정, 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아주 소상히, 애정 어린 눈으로 기록했다. 선머슴 같았던 김점동이 김에스더를 거쳐 박에스더가 되는 신앙의 역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 소녀에게 일어난 영적 성장은 실로 놀랍다.... 에스더는 성경 공부도 하는데, 성령께서 스승이 되어 그녀를 가르치시는 것이 분명하다. 이해도 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무척 잘한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서 분별력이 있고 현명하다. 그런데 그것이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 심지어 이 씨 부인까지도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질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랑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에스더의 인격의 깊이는 그녀를 잘 아는 사람만 공감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외모나 태도 때문에 낯선 사람에게는 절대로 깊은 인격의 소유자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게는 정말 아름다워 보인다.(1893년 3월 28일 일기에서)
로제타는 스물아홉 번째 생일인 1894년 9월 19일 일기에서 에스더 부부로부터 생일 축하 편지를 받고 윌리엄 홀로부터는 비취 조각이 달린 예쁜 베갯모 선물을 받았으며, 가족들과 생일파티를 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평양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없다면 곧바로 평양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일기를 마쳤다. 일기 중간에는 조선에서 시작된 청일전쟁의 소식을 들은 고향 가족들의 우려하는 편지를 받았음도 밝히고 있다.
윌리엄 홀은 마펫 목사와 함께 10월 1일 다시 평양으로 떠나 6일에 평양에 도착했으며, 8일 서울에 있는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다. 청일전쟁 상황이 치열해지고 평양에 있던 선교사들이 서울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윌리엄 홀은 전염병에 걸렸고, 서울에 온 지 1주일만인 11월 24일 순직하는 등 급박한 상황 속에서 로제타의 일기는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로제타는 10월 13일 자신에게 도착한 윌리엄 홀의 일기를 자신의 손글씨로 옮겨 적어 일기 뒤에 붙여놓았다. 결국 로제타 홀의 일기는 남편 윌리엄 홀의 편지로 끝을 장식하게 되었다. 윌리엄 홀이 로제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한 구절을 소개한다.
평양은 거의 죽은 도시 같구려. 한국인들이 막 돌아오기 시작했소. 그들 모두가 이곳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기뻐하고 있으며, 우리는 사역에 큰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오. 땅이 부드러워져 옥토가 되었기에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 믿고 있소. 주님을 위한 우리 사역에서 지금보다 더 희망적으로 보인 적이 없소.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게 기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줄 믿는다오.(1894년 10월 8일 윌리엄 홀의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