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종교간 만남의 허구성과 그 극복을 위하여(3)
그러나 세 가지 의문사들을 연속적으로 등장시키고 보니 이와 관련된 물음이 당연하게도 고개를 쳐드는데 그것은 바로 소위 여섯 개의 의문사 중에서 아직도 거론되지 않고 남아 있는 '누가, 언제, 어디서'입니다. 도대체 이 세 의문사들은 여지껏 어디에서 웅크리고 있었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바로 '참'을 향해 물음을 던질 것을 죽음으로부터 끈질기게 요구받고 있는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누가, 언제, 어디서'는 삶과 죽음의 얽힘으로 인하여 '참'을 향해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왜'라는 물음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왜'라는 근거물음의 포장을 벗기면 그 안에는 바로 그 '왜'라는 물음을 묻게 한 '삶과 죽음의 얽힘'이 도사리고 있고 이 얽힘이란 바로 '누가'가 시간을 가리키는 '언제'와 공간을 가리키는 '어디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에 '언제/어디서'와 한 묶음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누가-언제/어디서'라는 한 묶음의 물음으로 표현되는 몸이 바로 그 몸 자체인 '삶과 죽음의 얽힘'으로 인하여 '왜'를 묻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참'을 묻고 신을 묻게 했으면서도 이처럼 '무엇'에서 '어떻게'를 거쳐 '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죽음과 얽힌 삶이 '참'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희극적인 비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죽음으로 인한 삶의 가변적 일시성에 대한 불안이 불변적 항구성을 찾게 하였고 바로 그러한 불변적 항구성을 만족시킬 물음은 자연스럽게도 동일성을 전제하는 '무엇'으로 결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누가 묻든지, 언제 어디서 묻든지, 심지어 왜 묻는지 상관없이 '무엇'이라는 물음은 항시적 동일성을 요구하고 보장해 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맥락에서 신(神)이 등장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러기에 신에 대한 물음도 당연하게 '무엇'으로 시작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무엇' 물음에 대한 대답인 '있음'과 '없음'이라는 상호 모순적 요소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양자택일이 요구되었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불변적 동일성이라는 안정성에 대한 욕구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러다가 '어떻게'로 넘어가면서 어찌 해볼 틈바구니를 엿보게 되었는데, 이는 이미 '어떻게'의 생리상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고로 '무엇'이라는 정체 물음에 대해 '어떻게'라는 방법의 물음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이어서 '도달할 점'과 '그 점을 향해 갈 길'이라는 관계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의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물론 이러한 대책이 철학 자체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왔다기보다는 철학의 주류를 이루던 형이상학으로부터 때마침 독립을 꿈꾸던 근세 자연과학으로부터 귀띔을 받은 것이었음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그러나 본디 '참'을 향해 '무엇'을 물었던 이유나 동기의 뿌리에 놓여 있는 죽음으로 인한 불안을 넘어서려는 욕구는 '어떻게'의 다변성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이래서 오히려 '무엇'과 '어떻게'를 묶게 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목적과 수단의 관계라는 점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있음과 앎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도 같음으로 묶임으로써 '있음과 앎의 같음으로서의 참'을 귀결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있는 대로 알고 아는 대로 있으면 그것이 곧 참'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실로 그렇지 않나요? 무엇을 더 바랄 게 있을까요?
그러나 곧 '있는 대로 앎'에서 '있는 대로'가 어느 정도이며, 또한 '아는 대로 있음'에서 '아는 대로'가 어디까지인지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앎을 위해서는 있음이 어언간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며, 마찬가지로 있음을 위해서도 앎이 어언간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순환논리로 내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논리적인 문제보다도 더욱 중요했던 것은 '있음과 앎의 같음'이라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제기되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아무리 공식적으로 그럴 듯한 '참'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왜 참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그야말로 죽음과 뒤얽힌 삶의 과정일진대 죽음의 그림자도 얼씬거릴 수 없을 것 같은 '있음과 앎의 같음'이라는 삼박한 포장의 '참'이 도대체 죽음과 뒤엉킨 삶의 어느 구석에 자리 잡을 수 있는가라는 절규가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죽음을 떨칠 수 없는 삶에 의미롭게 닿을 수 없다면 어찌 '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저항이 폭발했던 것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할 것으로 여겨졌던 '있음과 앎의 같음으로서의 참'은 그럴 듯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음만의 논리였으며, 그것도 마음 중에서 오직 지성만을 만족시켜주는 도식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같음'은 마음만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야 하는 삶의 '다름'에 대해서는 지극히 공허하고 허울 좋은 그림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있음과 앎의 같음'은 죽음으로 인한 불안과 허무를 넘어서려는 숭고한 취지에서 출발한 물음에 대한 그럴 듯한 대답이었지만 도달점 자체의 생리로 인하여 출발점인 죽음을 망각함으로써 오히려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한갓 꿈일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몸은 죽음으로부터의 홀연한 요구에 새삼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임으로써 '삶의 다름'을 향하여 몸부림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참'을 향한 물음을 애당초 일으켰던 죽음과 삶의 얽힘은 '무엇'에서 출발하여 '어떻게'를 거치는 동안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듯 했다가 '왜'에 이르면서 다시 본래의 자리를 되찾게 됩니다. 그런데 앞서 살폈듯이 '왜' 물음은 '누가-언제/어디서'를 전면에 나서게 하였을 뿐 아니라, 좀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오히려 '누가-언제/어디서'가 '무엇-어떻게'를 거슬러 '왜'를 묻게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몸은 '있음과 앎의 같음'에 대항하는 '삶의 다름'의 근본동인으로서 '참' 이야기, 그리고 신 이야기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민중신학, 생명신학, 여성신학 등 인간해방을 주제로 하는 신학의 움직임들이 이와 같은 몸의 자리 회복을 공유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정신의 당연한 반향이기도 하다.)
물음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위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표에서는 '무엇,' '어떻게,' '왜'가 단순히 일직선상에서의 연결항목들로 보이지만 앞의 논의에서 함축되었듯이 이들 사이의 관계는 사실상 입체적입니다. '무엇'이 가로에 해당한다면 '어떻게'가 세로에 배정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가로와 세로의 엮음으로 면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토대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씨줄과 날줄의 얽힘이 자아내는 넓이의 구성방식이란 당연히 평면적 사고를 구성할 것인바 그러한 평면적 사고로부터 착실하게 건사되어 온 논리가 바로 형식논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형식논리학이란 보편적 본질을 의미하는 형상의 논리일지니 같음의 철저한 체계화를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다름이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거짓'이거나 '못난 것들'이어서 '잘난 것들'만 판치는 세상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치달아갈 뿐이었습니다. '잘난 것들'이란 '못난 것들'을 억압하면서라도 이루어내려는 같음으로의 집중적 우상화가 빚어낸 허상일 따름이니 말입니다. 여기서 바로 다름의 지위 선언이라는 의미를 지닌 물음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왜'이며 따라서 이 '왜'는 가로와 세로가 엮어낸 넓이에 높이를 세우거나 깊이를 파들어 감으로써 그러한 면의 입체화를 위해서 결정적으로 공헌하게 했습니다. 이제 이렇게 '무엇'과 '어떻게,' 그리고 '왜'가 각각 가로, 세로, 높이로서 얽혀 현실에 근접하는 입체적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면 '왜'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누가-언제/어디서'는 그야말로 죽음과 얽힌 삶인 몸으로서 '무엇-어떻게'와 얽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 동안 몸이 짓눌리고 천대받아왔던 이유를 가늠할 계기를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껏 '참' 이야기가 주로 '무엇'에 한정되고 기껏해야 '어떻게'만이 이와 엮여져왔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은 같을 뿐 아니라 나아가 마땅히 하나이어야 할 동일성을 필연성과 보편성의 본성으로 설정하는 생리를 지니고 있어서 과연 '참' 뿐 아니라 신(神)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가장 탁월한 물음으로 모셔져왔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떻게'라는 것도 그 물음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무엇'이라는 목적에 대한 수단적 지위를 지니는 것이어서 결국 '무엇-어떻게'로 엮일 수밖에 없었으니 철저히 같음의 논리에 지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불안과 허무를 넘어선다는 구실로 같음으로 귀속하려는 본능에 지배되다보니 이러한 같음에 대해 감히 도전이라도 할 것 같은 '왜'라는 물음은 유구한 세월을 지배해 온 '무엇-어떻게'의 얽힘 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했습니다. 사태가 이러하니 '왜를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다름으로 이루어진 '누가-언제/어디서'는 불가피하게도 숨겨지거나 억눌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누가-언제/어디서'란 다름 아닌 죽음과 얽힌 삶이었고, 결국 그러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몸이었던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서양정신문화사에서 고중세의 형이상학을 지배했던 '무엇,' 근세 인식론의 근본물음인 '어떻게,' 그리고 전통형이상학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현대적 물음인 '왜'는 그야말로 각 시대의 지배적 사고유형을 대표한다. 예를 들어 자살에 대한 이해도 이러한 시대별 유형의 전환을 반영하는 좋은 사례에 해당한다. 즉, 고대 그리스나 초기 로마에서는 자살이 널리 인정되었다. 하지만 노예의 자살만큼은 법으로 금지했다. 로마에서는 노예의 자살은 주인의 경제적 손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후기 로마에 들어서부터 자살은 신에 대한 모독이자 자연과 사회에 저지르는 범죄로 간주되었다. 중세에 들어 자살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일종의 살인죄로 취급되었다. 18세기까지 성공한 자살에 대해서는 불명예스럽게 매장하는 방법으로, 자살 미수는 법정형으로 처단했다. 18세기 중엽부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자살에 대한 처벌금지 운동이 일어났다. 19세기에 들어서 자살은 더 이상 형사처벌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몸이란 곧 '누가-언제/어디서'일까요? 이 대목에서 새삼스럽게 '실존'을 들먹거리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이해가 정신으로부터 육체로까지 넓혀가게 된 과정 안에 양자의 이분법을 넘어서 이들을 아우르는 실존이라는 개념이 몇 안 되는 결정적인 가교들 중의 하나로 등장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세 스콜라철학시대가 가장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겠지만 전통적으로 실존은 본질과 매우 사이좋은 관계에 있었습니다. 즉, 본질(essentia)이 원초적으로 주어져 있는 원형이라고 한다면 실존(existentia)이란 다만 그렇게 주어진 본질의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과제를 부여받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실화라는 것이 개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존은 줄곧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었습니다. 이러한 고전적 구도에서 실존이란 단지 본질의 '주어진 잠재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임의성일 뿐이어서 오늘날 실존에 새롭게 부여된 '열려진 가능성'이라는 의미는 차라리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본래 같음'으로서의 본질에 대해 실존이란 '어쩌다가 다름'일 뿐이어서 '참'을 위해 이바지하기는커녕 거추장스럽다 못해 심히 방해스러운 '잡동사니들'로 간주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참'의 보편성이라는 미명 아래 '본래 같음'이 '어쩌다가 다름'을 도대체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횡포를 부리고 억압하게 됨에 따라 '다름'의 아우성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 이 '어쩌다가 다름들'이 더 이상 '본래 같음'의 족쇄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다는 항거와 함께 해방을 절규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편성이 그 자체로서 문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보편성이 죽음과 얽힌 삶을 살아가는 개별적인 인간들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그저 허울좋은 것'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당연한 것인 양 부과됨으로써 오히려 억압적인 족쇄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현대적 반동에서 외쳐진 개체적 다름을 가리키는 실존이란 보편적 본질이 표상하는 같음(sistere)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ek) 행위라고 할 때 실존은 인간의 자기이해에서의 현대적 혁명을 위한 신호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전통에서의 실존은 본질의 '주어진 잠재성' 실현을 지상과제로 지니고 있었던 명사였지만, 현대적 반동에서의 실존(Ek-sistenz)은 본질의 원형적 껍질을 깨고 '열린 가능성'으로 터져 나가는 사건-행위로서 동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가-언제/어디서'는 우선 '개체'를 가리키지만 결코 이에 덜하지 않게 '관계'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실존은 한편으로 있음의 차원에서 보면 완결적으로 규정된다기보다는 규정을 거부하는 과정성을 지니며, 다른 한편으로 앎의 차원에서 보면 전제 없는 순수성이 환상임을 폭로하면서 특정성을 불가피하게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반규정성과 특정성은 어언간 상호 모순적인 긴장관계를 이루는데, 이것이 바로 실존의 역동성의 근거가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존의 구성요소인 반규정성과 특정성 사이의 상호모순은 어떻게 해서 실존의 역동성에 이바지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상호 <모순>의 <역설>로의 승화를 통해서입니다. 여기서 모순이란 같음을 지키기 위해 다름을 버리는 방식이라면, 역설은 같을 수 없는 다름들이 서로 관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만날 수도 없을 것 같은 '다름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하는 걸까요?' 마음에게는 다름이 분명 불편합니다. 마음은 생리상 다름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다름을 극복되고 지양되어야 할 모순으로밖에 볼 수 없고 내내 이에 대해 불편해하면서 가슴앓이를 합니다. 그러나 몸은 이미 늘 다름과 마주하면서 다름을 받아들이고는 결국 다름과 뒤엉켜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몸은 몸으로서 지탱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다름들이 다름으로 서로 만나는 방법을 몸은 이미 체득하고 있었으니 이를 역설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몸은 몸 스스로를 영위해 왔습니다. 몸에게서 종국적인 다름이 죽음이라면, 몸은 사실상 끊임없이 다름을 받아들여가면서 죽음을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삶의 논리이며 몸의 생리입니다. 아니 이미 삶과 죽음의 얽힘이라는 것이 역설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몸이란 바로 그러한 역설의 사건으로서 동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존철학 이후 요즘 부각되는 상호모순의 역설적 승화는 결코 새로운 구도가 아닙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실존, 또는 몸이라는 동사로 드러나게 한 '삶과 죽음의 얽힘'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로 상호모순의 역설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일상에서 모순으로 겪어지는 것들이 사실상 역설적으로 얽히는 관계에 있다는 통찰은 삶과 죽음의 얽힘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왜'라는 물음에 와서야 비로소 널리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무엇' 물음은 철저한 동일성의 논리에 지배됨으로써 언제나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내몰았다면, '어떻게'라는 물음은 갈래의 가능성을 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는 동일성의 신화를 떨쳐내지 못했었으니 '왜'에 이르러서야 죽음과 얽힌 삶의 몸부림을 통해서 대책 없는 <모순>을 이미 그렇게 생겨먹은 몸 안에서 비로소 <역설>로 승화시켜 낼 수 있는 지혜를 더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절실한 듯하면서도 다소 유희적으로, 그래서 여전히 희롱되고 있는 몸으로부터의 요구인 역설은 기실 이렇게 처절한 다름의 해방선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