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선신학교 설립

<만우 송창근 바로보기 13>

송창근이 충옥하고 보니 그간 시국은 더욱 많이 악화되어 있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성빈학사’는 완전히 문을 닫고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도저히 되돌릴 수가 없는 상태였다.

나빠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집요하고 잔혹한 신사참배 강요에 조선 천지가 굴복했다. 마지막까지 홀로 버티던 조선 장로교조차 1938년 9월에 열린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애국적 국가의식이다”라는 매우 구차한 논리를 내세운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타협이었다. 그러나 선교사 윤산온 교장이 이끌고 있던 숭실전문학교는 과감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폐교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창근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1938년 여름방학을 끝으로 평양신학교가 사실상 문을 닫은 일이었다. 그 역시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조치였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것은 곧 외국 선교사들에 의한 신학교육의 시대가 끝난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비상상황이었다.

“이런 상황과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송창근은 고민하고 고뇌했다.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육기관이었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은 사태를 그저 감수하고 바라보고 있다면, 조선의 기독교 신학교육은 아주 끝이 난 암흑상태에 떨어진다. 그런 암흑의 길을 막는 유일한 대안은 ‘조선인에 의해 운영되는 신학교를 새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해결방식은 보다 더 참혹한 사태에 처함을 의미했다. 현 시국에서 신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일제당국의 ‘신사참배’ 요구를 받아들여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진퇴유곡의 딜레마에 속하는 문제였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만 해도 신사참배문제는 두 번 다시 생각할 것도 없는 사안에 속했다. 산정현교회에서 열렸던 총회 석상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3숭(숭전, 숭실, 숭의) 학교’ 존폐문제를 토론할 때 종교교육부 총무이던 정인과 목사 등이 “신사에 참배해서라도 학교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자 송창근 박사가 회의장에서 정 목사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다가 회장 밖으로 밀어내쳤던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은 지금, 상황이 달랐다. 기독교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신학교육을 아예 포기하는 것은 기독교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선택할 길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암흑을 받아들여 암흑 속에서 칩거할 것인가? 아니면 ‘신사참배’를 하면서라도 ‘조선인에 의해 운영되는 새로운 신학교’를 세워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것인가? 그것은 조선 기독교계의 역사가 좌우되는 매우 중대한 고비에 해당했다.

참혹하고 처절한 고뇌 끝에 송창근은 기독교 신학교육이 단절된 암흑상태를 거부하고 ‘조선인의 손에 의해 운영되는 신학교’를 새롭게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비상한 기운을 내어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에 올라가서 신학교 설립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신학교 명칭은 ‘예수교 장로회 조선신학교’로 정했다.

무엇보다도 학교 설립에 먼저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믿음 좋고 부유했던 김대현 장로를 설득하여 설립자금 25만 원을 내기로 약속 받았다. 신학교 설립사무를 맡을 사람들도 모았다. 채필근, 김우현, 윤인구, 이학봉, 인인식, 조희염, 함태영, 김길창, 차재명, 한경직, 김관식, 김응순 등이 호응했다.

신학교육 전반에 관한 구체적인 청사진도 만들었다.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새로 세울 신학교 건물도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그렇게 바쁘게 뛰고 있는 송창근에게 조선총독부에서 강한 압력이 들어왔다. “동우회 사건으로 보석 중에 있는 자가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 도로 잡아넣겠다”고 협박했다. 압력이 들어온 시기는 1939년 여름 이후로 고증된다. 1939년 여름에 정대위가 원산에서 결혼할 때 결혼식 주례를 하기 위해서 송창근이 원산에 갔었다. 그는 당시 ‘조선신학교 기성회’의 ‘총무’로서 실무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으며, 원산에서 정대위에게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자세하게 이야기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독부가 본격적으로 압력을 행사하자 송창근은 도리 없이 신학교 사무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추진되었던 ‘조선신학교’의 규모와 실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조선신학교 설립 개요’라는 제목의 서류이다.

조선신학교 설립 취지
조선신학교 설립 개요 : 1. 목적, 2. 명칭, 3. 위치, 4. 수업연한, 5. 정원, 6. 입학자격, 7. 각과 학과 과정, 8. 강좌 그 교수, 강사, 9. 시설, 10. 경상비 급 기금, 11. 장학금 또는 산업부 기금, 12. 재단법인 조선신학교 유지재단.

위와 같은 체제로 작성된 서류에는 앞으로 신축할 건물들의 정면도와 평면도도 첨부되어 있다. 인쇄하여 총독부에 납본한 날이 1939년 5월 27일이고, 거기서 통과되어 발행한 날은 1939년 6월 5일이었다.

여기서 ‘조선신학교 설립 취지’를 읽어 본다. “조선신학교를 왜 세워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의사와 의지가 확고하게 표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립 취지서’는 다음과 같다.

우리 조선 반도에 들어온 기독신교가 과거 50여 년 동안에 급속한 발달과 장족의 진보를 보게 된 것은 참말 세인의 경이할 만한 바가 있었다. 이것은 물론 하느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환경의 복잡한 변천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거니와 또한 외국 선교사들의 다대한 공헌과 우리 선배들의 부단의 노력과 결정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우리 장로교회의 과거를 회고하건대 먼저 미북, 미남, 호주, 가나다 등 4교파의 선교사들을 생각하게 된다. 교파를 갈르며 개인을 들어 상세히 소개할 수는 없거니와 우선 맨 처음으로 도래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원두우 박사와 신학교를 평양에 창설한 마포삼열 박사와 같은 이는 조선교회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큰 은인들이었다. 그들의 열렬한 신앙과 건전한 인격이며 원대한 계획과 정밀한 준비는 오늘날 반도 교회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이들의 제반 사업과 위대한 공적에 대하야 거듭거듭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그들로선만은 독장난명(獨掌難鳴)이란 말과 같이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반도 안에 위대한 창업적 교역자를 많이 일으키셨다. 이제 누구누구를 다 열거할 수는 없거니와 최초에 목사의 성직을 받은 7인의 선각자만은 과연 대표적 인물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명치 34년(1901)에 창립한 평양신학교에서 제1회 졸업생으로 명치 43년(1907)에 목사의 성별식을 지나 그때부터 조선노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외람되히 한 마디씩으로 그들의 성격을 붙이여 그 씨명을 소개하면 헌헌장부(軒軒丈夫)의 서경조씨, 악악간사(鍔鍔諫士)의 한석진씨, 온후장자(溫厚長子)의 송인서씨, 독학군자(篤學君子)의 양전백씨, 친절강직(親切剛直)한 방기창씨, 충후열렬(忠厚熱烈)한 길선주씨, 인자순량(仁慈順良)한 이기풍씨 등의 7인이다. 아! 그이들은 지금 세상에서는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훌륭한 인격자들이었다.

조선신학교 설립 시절 송창근 목사(가운데)

이 최초의 목사들은 그 대부분이 벌서 천국에로 이적하였다. 오직 한석진, 이기풍 두 분이 지금까지 생존하였을 뿐이다. 그 중에 한 분인 이 목사는 멀리 남해 연안에서 80 가까운 고령의 노구로 아직 교역을 계속한다. 한 목사만은 현금 경성 교외에 거주한 관계상 필자가 신학교 설립 기성회 일을 처음 생각할 때에 먼저 그 고견에 고문하고 싶어 그 문을 두드렸다. 그는 노안에 미소를 띠우고 흔연히 영접하야 유감없이 진정을 토로하야 주었다. 예리한 비팜과 심절한 권면을 섞어가지고 이런 말씀을 건네주었다. <우리 손과 우리 머리로 신학교를 설립하야 보자는 말인가. 조선에 벌서 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이런 운동도 없었다는 것은 너머 늦었지. 선교사와 조선 교회야 언제든지 정의 좋게야 헤여질 줄 알았는가. 그 사람네야 이러든지 저러든지 우리가 할 일이야 우리가 하여야지. 그러나 나야 이제 80 가까운 것이 출마한들 무엇을 하겠나. 또 아직까지 조선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네. 좌우간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자네들이나 하야 보게. 나야 물론 마음으로야 전폭적으로 찬성하지.> 이런 뜻의 말씀이었다.

비록 간단한 말씀이나마 한숨과 눈물이 없이는 배청할 수가 없었고 분발과 결심이 없이는 퇴출할 수가 없었다. 참말 귀중한 훈시인 동시에 적절한 격려이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지금은 국가에서 동아의 신질서를 수립하고저 막대한 희생을 애끼지 아니하고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는 이때에 우리 교회에서도 자연히 신질서를 세우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초대에는 선교사가 주체이었고 반도의 신자가 객체이었으나 시대는 점차로 전개되여 양자의 관계는 호상 협조의 상태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반도의 신자인 우리들의 교회 사역의 주체가 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러면 교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인 신학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손으로 경영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는 몸과 마음을 받힐 이도 생기고 땅과 돈을 드릴 이도 생겨야 할 것이다. 유지독지(有志篤志)의 남녀 신도는 합흥호래(盒興乎來)리오. 모사(謨事)는 재인(在人)이어니와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니 오-성삼위(聖三位)의 하느님이시여 이루어 주옵소서. 아멘.

소화14(주후 1939)년 3월 일 경성부 아현정 462번지 2호 장로회 설립 기성회장/신학교 설립 동위원장 채필근

이 서류에는 설립 사무를 실제로 담당한 총무인 송창근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보석 중이라서 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무렵 평양에서도 조선인들의 손으로 신학교를 새로 설립하고 채필근 목사에게 교장 직을 제의했다. 새로 설립된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문을 닫은 평양신학교의 유산을 그대로 지닌 학교였다. 모든 것을 새로 마련해야 하는 서울의 조선신학교와는 비교될 수가 없었다. 채필근 목사는 조선신학교 설립 추진진에다가는 일체 아무런 말도 없이 평양으로 가서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총독부의 강한 압력으로 조선신학교 설립 사무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던 서울의 송창근은 당시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 성경교사로 있던 김재준에게 전보를 보내어 서울에 와서 ‘조선신학교’를 맡도록 부탁했다. 1936년 4월에 송창근이 부산으로 내려간 뒤에 평양에 남아 있던 김재준은 그 뒤 신사참배 문제에 협력하지 않는다 해서 숭인 상업학교 교장으로부터 물러나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표를 내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북간도 은진중학교의 성경교사 자리가 나서 거기 취직하여 북간도에 가 있었던 것이다.

김재준은 송창근의 부탁에 따라 서울에 와서 ‘조선신학교’를 맡았다. 경기도에서는 막상 인가를 내줄 때 신학교가 아닌 1년짜리 강습소로서의 인가를 내주었다. 그래서 1년마다 새로 인가를 받아야 하는 ‘학원’형태로 운영하는 ‘조선신학원’으로서 문을 열어야 했다.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의 문을 열어 1940년 4월 1일에 시험을 치러서 53명의 학생을 뽑아서 2일에 개강했다. 이사진과 교수진은 다음과 같았다.

제1대 원장 겸 이사장 : 김대현 장로.
이사 : 함태영, 김관식, 오진영, 조희염, 김길창, 김영주, 김영철, 한경직, 윤인구.
전임 교수 : 윤인구, 김재준, 궁내창.

송창근은 뒤에서 학생이 조선신학교에 가도록 주선하는 등 보이지 않게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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