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파크가 시간제 및 정규직 근로자들의 임금을 교묘하게 착취한 것뿐만 아니라 기독교기업이라는 간판에 걸맞지 않은 경영활동을 한 것 때문에 여론의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랜드파크는 비난 여론을 의식한 듯 1월5일에는 5대 혁신안을 제시하고 체불임금 정산, 정규직 채용, 직원 권리장전 실행, 내부고발 시스템 확충, 전면적인 인사 개편 등을 공언하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 기업의 행태를 공론화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혁신안이 모면책에 불과하다며 1월9일 근로기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이랜드파크와 전·현직 임원 3명을 서울 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랜드파크의 이러한 비윤리적 경영활동은 많은 성도들에게 허탈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에게는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되짚어보게 하는 계기도 됐다.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인데 반해, 기독교는 자기희생을 강조한다. 따라서 애초 이랜드파크가 기독교의 이미지를 기업 홍보에 이용하려 시도했을 때부터 파국의 씨앗은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나눔,' '바름,' '자람,' '섬김' 등의 경영이념이 기독교의 정신과 맞닿아 있기는 하지만 기업의 이익 창출을 위해서는 결코 효율적이지 않은 개념인 것이다. 만일 그 이념을 홍보하여 도덕적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상업적 이익을 취하고자 했다면, 그 기업은 자본주의에 도덕의 가면을 씌운 것이나 다름없다. 이랜드파크는 기업의 존립 이유인 이익창출을 위해서 감당하지 못할 경계선까지 침범하면서 효율성을 극도로 추구한 셈이다. 자기희생을 내세우면서 어떻게 최대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혹시, 소비자로 하여금 자본주의를 신성시하도록 만듦으로써 '효율적' 경영활동이 드리울 그늘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부수적인 효과를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기독교와 기업이라는 것 자체가 개념상 모순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기업이 자기희생의 가치마저 효율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행위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요소가 원래 모순된 것이 아닌 것은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알려준 바이다. 그는 존 칼빈의 예정설과 금욕적 근로의욕과 자본주의의 결합관계를 해명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윤리성을 옹호한 전례가 있다. 그런데, 칼빈은 이러한 윤리성뿐만 아니라 돈의 생산성도 인정함으로써 기독교인의 이익창출 행위 자체를 긍정했다. 그는 부동산 임대사업과 투자자들에 대한 대부행위도 인정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자본에 의한 이익증식에도 나설 수 있는 전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익창출을 위한 기업경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이익창출의 과정에서 효율성을 극도로 신봉하면서 정신적 가치마저 이익창출의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면, 기독교기업은 망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각할 필요는 있다. 효율성을 극도로 추구하다보면 자기희생의 정신은 사라지고 그 빛이 사라진 뒤 드리워진 어둠이 결국 효율성마저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율성이란 "적은 투자, 많은 결실"의 공식으로 증명되는 '신화적' 개념으로서 그 현실적 역기능성이 이미 역사적으로 많이 지적되어 왔다. 산업혁명 이래 20세기를 지내오면서 기업들은 효율성을 금과옥조처럼 신봉했다. 그 과정에서 상식은 무시되었다: 만일 기업이 효율성을 신으로 섬기게 되면, 그 기업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초인적인 노력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는가? 세기말에 다가오면서 이 신화에 대한 반성이 사회각계에서 꾸준히 제기되었고, 그처럼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게 되면 그 기업은 현실 세계를 떠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인식도 확산되었다. 이와 같이 효율성의 신화는 이미 20세기 동안 역사적인 평가를 통해 그 비인간성을 비판받아온 상황이다. 그런데도 기독교의 이름을 내건 기업이 경영활동의 최고가치를 효율성으로 설정한 것은 기업경영을 위한 역사의식상의 고민이 없었음을 드러낸다.
이제 이랜드파크가 혁신안을 내어놓았으니 그것을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기대해보자. 그리고 소위 기독교기업이 이처럼 비기독교적이기도 하고 비역사적이기도 한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자. 첫째, 기독교기업은 기독교정신을 소위 '돈 들지 않는' 도덕적 홍보수단으로 삼는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네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자기 선행을 선전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경우에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평가하신다. 그 선전도 일조를 했겠지만 이랜드파크의 간판인 애슐리는 패밀리레스토랑 업계에서 1위를 차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제 그 1위의 '자기 상'은 자랑스럽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계열사에게까지 음양으로 피해를 끼치게 됐다. 이제는 도덕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뒤에 그 허상이 폭로되어 마지못해 혁신안을 내놓는 방식이 아니라 5대 혁신안 자체를 경영활동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그러한 도덕적인 노력을 사회가 인정해 줄 때 그들이 "더 큰 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둘째, 기업의 구성원들을 효율성 추구를 위한 개별 단위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동일한 생명체로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생명체에게는 임금이 그들의 생계와 꿈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들려준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복음20:1-16)에서 그 주인은 제일 늦게 온 일꾼에게도 하루치 임금을 지불했다. 임금체계의 부당성을 주장했던 아침 일찍 왔던 일꾼을 꾸짖기도 했다. 하루치의 임금을 보장해줘야 어느 일꾼이든 하루를 먹고 살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이 비유는 노동의 대가가 생명의 유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일러준다. 오늘날은 보다 다양한 임금체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특정한 지불방안을 권고할 수는 없지만, 기업은 임금이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의 생명유지와 연계되어 있다는 의식을 구현하는 지불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셋째, 그룹의 총수는 계열사들 사이에서나 동종업계 내부에서 과다경쟁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이랜드파크도 이랜드 그룹의 한 계열사인데, 임금착취 행위를 교묘히 시도하여 금도를 어기게 된 배경에 과연 이랜드파크의 열의만 존재했을까? 그룹 총수는 계열사들 사이에서 사실상 신의 자리에 위치해 있는 존재인데, 그 신이 경쟁을 조장해서 최대의 이익을 수취하고 그 이익의 일부로 '기독교적 선행'을 베풂으로써 명예까지 독차지하고 있다면, 그가 바로 효율성 신화의 핵심에 해당한다. 역사는 그런 존재를 비인간적이라고 규정하고, 성경은 그를 '외식하는 자'라고 비판한다. 기독교정신은 선전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룹의 총수는 효율성의 가치를 신화의 차원으로까지 실현하도록 기계처럼 계열사들을 혹사시키지 말고 계열사 자체도 생명을 가진 개체로 인식하고 이 인식을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