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레23:23-2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일곱째 달, 그 달 초하루를 너희는 쉬는 날로 삼아야 한다. 나팔을 불어 기념일임을 알리고, 거룩한 모임을 열어야 한다. 이 날 너희는 생업을 돕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주에게 살라 바치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
설교문
- 뿔 나팔 소리가 들릴 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이제부터 정유년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라지요? 닭은 새벽을 알리는 상서로운 동물로 기억되고 있지만, 성경에 '닭'이 등장하는 것은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끄러움을 상기시켜줄 때가 유일합니다. 조류 독감으로 수많은 가금류가 땅에 묻히고 난 후에 맞이하는 닭띠 해가 뭔가 아이러니한 느낌을 줍니다. 새해를 맞이한지 한 달만에 다시 찾아온 새해 어떻게 맞이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일곱 번째 달, 지금으로 하면 10월 경이 됩니다만, 초하루를 '새해'로 기념했습니다. 그걸 히브리 말로 로쉬 하샤나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시간과도 다소 동떨어진 것 같지만, 그들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유대력의 칠월이면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은 올리브와 포도 수확을 거의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첫번째 가을 비가 내려 땅이 촉촉하게 젖어들고, 풀들이 푸릇푸릇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때입니다. 수확의 기쁨과 다가올 농사철에 대한 기대와 설렘 사이에서 그들은 새로운 날을 기념했던 것입니다.
이날 사람들은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어 기념일이 시작되었음을 알렸습니다.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그 소리는 새로운 시간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 소리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는 소리였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돌아보라는 초대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를 뒷받침하기 위해 갖가지 전설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그 날이 아담이 창조된 날이라고도 하고, 요셉이 애굽의 감옥에서 풀려난 날이라기도 하고, 모세가 바로 앞에 선 날이라고도 합니다. 20세기의 유대교 철학자인 마이마너디는 뿔 나팔 소리에 담긴 메시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그림자를 사냥하는 사람이 되지 말며
공허한 것을 찾느라 인생을 소비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너의 악한 방법과 생각에서 떠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변순복, <성경 속의 절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탈무드에듀아카데미, 2015년 4월 30일, p.221)
로쉬 하샤나는 창조주를 기억하는 날, 허비한 인생을 부끄러워하며 회개하는 날, 하나님께 돌아가는 날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네 이름이 기록되는 좋은 해가 되길 바란다"고 새해 덕담을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바란다는 축원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이날 할라 빵과 사과와 꿀을 먹었습니다. 솜씨 좋은 제빵사들은 그 빵을 사다리 모양, 새 모양, 왕관 모양으로 구워냈습니다. 사다리는 새해의 기도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바란다는 뜻이고, 새는 은혜의 상징이고, 왕관은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사과는 그 둥근 모양처럼 한 해가 원만하게 진행되기를 바란다는 뜻이고, 꿀은 달콤한 한 해가 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로쉬 하샤나 첫날 오후가 되면 사람들은 '죄를 바다의 깊음 속에 던져버리기 위해' 흐르는 물가로 모이곤 했습니다. 이것을 타슐라히라고 하는 데 '던져버려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상징이 풍부한 민족입니다.
- 두려움과 매혹
유대인들은 새해부터 대속죄일인 욤 키푸르까지의 열흘을 두려운 날들 혹은 거룩한 날들이라 일컬었습니다. 새해의 몇 날을 그들은 마냥 신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엄중하게 돌아보며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날로 삼았습니다. 새로운 시간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참회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거룩 체험의 두 요소를 '신비한 두려움'과 '매혹'(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이라고 요약했습니다. 거룩함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먼저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모세는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 앞에 엎드렸고, 베드로는 물고기잡이 기적을 체험한 후에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 하고 청했습니다. 거룩함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의 유한함과 죄성을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상은 바로 이런 체험을 객관화한 것입니다. 절 입구에 있는 사천왕상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들은 세상의 온갖 악한 것들을 제압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힌두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칼리 여신은 허리에 잘린 팔을 주렁주렁 매달고, 목에는 해골을 매달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합니다. 신성 안에 있는 무시무시한 요소를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 체험에는 달콤하고 따뜻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출34:6).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이런 이미지에 매혹됩니다. 문제는 이런 이미지에 사로잡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출34:7b).
<세속도시>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어느 책에서 셰릴 브리지스 존스(Cheryl Bridges Johns)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셰릴은 미국 내 종교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살피기 위해 일년 동안 미국 전역의 교회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종파의 차이를 막론하고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을 유쾌하게 은혜를 베푸는 분으로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천둥을 울리던 야훼,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던 야훼, 아모스가 '약자를 억압하고 가난한 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멸망시키실 분으로 소개했던 야훼는 제단과 강대상에서 사라졌다. 교회와 회당은 '사용자 친화적'(user-friendly)인 하나님을 고안해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Harvey Cox, , Mariner Books, 2001, p.27)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교회의 모델로 꼽히는 대형 교회들은 시장 조사에 근거한 예배와 음악 그리고 설교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비 콕스는 '두려움과 떨림'의 요소가 약화되면 '매혹'의 요소 또한 약화된다면서, 오늘날 미국의 문화화된 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두려워 떠는 사람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깊은 매혹 속에서 자기 삶을 반성적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
로쉬 하샤나의 첫날 유대인들은 이삭의 탄생 이야기를 낭독했습니다. 아들을 약속받았으나 나이 100세가 되도록 아들을 얻지 못했던 아브라함의 집에 아들이 태어났으니 그 기쁨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라는 이삭을 낳은 후에 이렇게 홀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창21:6). 이삭이라는 이름 뜻 자체가 '웃음'이니 그의 존재 자체는 인생의 밝은 면을 상징한다 하겠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놀랍고 기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둘째날에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던 이야기를 낭독합니다. 그것은 정말 두렵고 떨리는 날, 밝음은 사라지고 비통함과 어둠만 있는 날입니다. 이삭의 존재 자체는 후손과 땅을 주신다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기 위한 단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삭을 바치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창22:2) 하고 이르십니다. 연이어 나오는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이라는 말 속에 담긴 아픔이 지극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기에 두말 없이 그 아들을 바쳐야 할까요? 이 물음 앞에서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무화되고 맙니다. 종교는 윤리의 세계를 넘어선다고들 말하지만 그 속에 충격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 광경을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고, 이삭과 두 종에게도 길 떠날 준비를 시킵니다.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떠납니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22:4). 이 구절을 보면 그 사흘 길을 걷는 동안 아브라함이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사흘 길은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가장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흘 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주지 않습니다. 깊은 아이러니 속에서 말조차 스러진 것입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놓고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 할 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만류했습니다. 그리고 외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려 있던 숫양 한 마리를 잡아 번제로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로쉬 하샤나의 둘째 날 이 본문을 읽는 것은 새해에도 여러 가지 난감하고 어려운 일들이 찾아오겠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면 해결의 길도 열릴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은 이삭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22장은 잔혹하고 변덕스러워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인생의 풍경이 바로 이러합니다. 좋은 일만 있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찾아오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어려움은 결국 지나갈 것입니다.
-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으로
새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것이고, 또 그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유명한 유대교 학자인 제이콥 노이스너는 새해가 되면 유대인들이 이런 기도를 바쳤다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당신의 영광으로 온 세계를 다스리소서....당신 나라의 시민인 모든 이에게 당신 영광이 권능을 나타내소서. 그리하여 만물로 하여금 당신이 만드셨음을 알게 하시고 모든 피조물로 당신이 창조하셨음을 분간하게 하셔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왕이시요, 그의 나라가 온 세계에 미치시도다'라 말하게 하소서."(제이콥 노이스너, <토라의 길>, 서휘석·이찬수 옮김, 민족사, 1992년 5월 10일, p.81)
주님의 영광과 권능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모든 이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시간을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몹시 어지럽습니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세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주 다릅니다. 검증되지 않은 말들이 마구 유포되고, 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멸시하거나 적대시합니다. 냉소와 저주, 몰상식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좀 차분해져야 합니다.
로쉬 하샤나 오후가 되면 흐르는 물이 있는 곳에 모여들어 부끄러웠던 과거를 다 흘려보내려 했던 유대인들의 풍습이 참 지혜로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세계관에 따라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예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본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누구보다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되게 하신 주님의 마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깃들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는 사실을 화들짝 깨닫고 바깥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새해에는 내내 우리 교우들이 삶이 어둠 속에서 솟아나오는 빛처럼 은은하면서도 밝게 세상을 비출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