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중신학회(회장 강원돈)는 2월6일(월) 오후 6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제홀에서 정기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서광선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야기와 민중, 회상과 단상: 현영학과 서남동을 기리며"를 발제했다.
서광선 교수는 발제문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난 1월 14일은 현영학 교수(1921-2004)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4번째 기일이다. 제1세대 민중신학자의 한 분인 현영학 교수를 기억하며 그의 유작 『예수와 탈춤』을 다시 읽었다. 지난해 마지막 민중신학회 월례 세미나에서 감신대 박일준 교수는 현영학 교수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민중과 이야기를 연결시키며 '문화는 언제나 정치적이며, 정치는 언제나 문화적이다'라는 격언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해외 젊은 학자들의 '이야기 연구'를 소개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쓴 이 글은 현영학 교수의 탈춤의 신학과 서남동 교수의 '탈(脫)신학 혹은 반(反)신학으로서의' 이야기 신학을 반추하고, '정치신학으로서의' 이야기신학의 재정립을 시도한 것이다."
아래는 발제문의 전문이다. 서광선 교수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야기와 민중, 회상과 단상: 현영학과 서남동을 기리며
블랙리스트
작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광화문 촛불 저항으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했다. 그 일련의 시민혁명 사태의 와중에 한국 문화예술계 및 언론계의 "블랙리스트" 사건이 폭로됐다. 9천여 명에 이르는 저명인사들의 이름이 언론에 단편적으로 소개됐는데, 이 명단의 작성자들은 박근혜 정권 실세들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런 리스트가 있다는 것 자체부터 부인하고 있는 형편이다. 인터넷 보도에 의하면, 노벨상 수상 추천 명단에 들어 있는 "민중시인" 고은 씨도 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광입니다만 구역질난다"고 반응했다. 이 발언이 회자되고 있는 형편에, 배우로는 김혜수, 송강호, 손숙, 하지원 등이, 영화계에는 이창동, 문학계에는 한강, 도종환, 김홍신, 미술에는 민중 판화가 홍성담, 재미있게도 요리계에 박찬일의 이름 역시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니까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은 만 명에 가까운 문화예술가와 언론인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역시 불의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권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리스트이다. 얼마나 이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비난의 바른 소리가 무서웠으면, 이런 짓거리를 했을까 싶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박근혜 정권이야말로 문화의 위력을 제대로 인식한 것이 아닌가하는 아이러니로 고소를 금치 못하겠다. 문화의 정치적 위력을 인지하고 뼈아프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시 지난 해 두 달 동안, 1000만이 넘는 촛불 집회가 문화적 항거집회였고 집단 지성과 민중의 평화집회였던 것을 생각하면, 지난 2016년 12월 우리 민중신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한 박일준 교수가 한 말, "문화는 정치이고 정치는 문화"라는 것을 우리 눈앞에서 똑똑히, 분명하게 감동적으로 보아왔다고 하겠다.
봉산 탈춤 이야기와 현영학
박근혜 블랙리스트 소문을 접하면서 탄식과 분노와 함께 떠오른 것은 우리 70년대 대학가에 유행한 탈춤 공연이었다. 박정희 유신 반대 데모 직전에 혹은 데모가 끝난 다음, 최루탄 악취가 자욱한 대학 캠퍼스 마당에서 공연한 봉산 탈춤 장면이 떠오른다. 봉산 탈춤은 대체로 3(세) 과장으로 구성되어 마당극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 첫째 과장은 "노장과장"이라고 한다. "노장"이란 노인 스님을 말하는데, 마당극에서는 다 늙어빠진 노장이 젊은 중들에게 끌려 탈춤 마당 한가운데 나타난다. 늙어서 힘을 쓰지 못하는 노장 앞에 하얀 탈을 쓴 몸매가 가늘고 늘씬한 소무가 보였다. 노장이 소생해서 소무를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하면서 둘이 어울려 사랑을 나눈다. 여기에 오입쟁이 취발이가 뛰어들어 노장을 완력으로 밀어 내고 돈으로 소무를 사서 아들을 낳는다. 이 과장에서 취발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장의 파계를 꾸짖고 조롱한다. 종교지도자이며 금욕을 가르치는 스님이 지금 파계하고 있다고 야단도 치고 조롱도 한다. 마당극을 즐기는 관중은 한 목소리로 노장에게 야유를 던진다. 스님과 소무가 서로 엉키고 있는 것을 보며 야단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웃어댄다. 관중은 오늘의 한국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무능과 파계를 꾸짖고 있었던 것이다.
봉산탈춤의 두 번째 과장은 "양반과장"이다.
말뚝이: 쉬이, 양반 나오신다!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 소론 호조 병조 육당을 다 지내고 삼정승, 육판서를 다 지낸 퇴로 재상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아지 마시오. 제갈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소반이라는 '반'자를 쓰는 '양반'이 나오신다는 말이오.
양반들: 야, 이놈 뭐야?
말뚝이: 아 이 양반들 어찌 듣는지 모르갔소. 노론 소론 호조 병조 육당을 다 지내고 삼정승, 육판서를 다 지내고 퇴로 재상으로 계신 이생원네 삼형제분이 나오신다고 그러하였소.
양반들: 이생원이라네. (현영학, 『예수와 탈춤』 [한국신학연구소, 1997], 65에서 재인용; 이두현, 『한국가면극』 [문화재관리국, 1969], 316)
현영학 교수는 이 책에 수록한 "한국탈춤의 신학적 이해"라는 유고에서 민중 탈춤의 종교적 의미를 "민중의 비판적 초월의 경험"이라고 지적하였다.
민중 말뚝이의 비판의식은 양반 집안 어른과 아이들에게로 간다. 봉산 탈춤 제2막장이다. 동네 양반집 어른과 사내아이들이 등장한다. 4서3경을 줄줄이 외어야 하는 유식한 유생들에게 다가가 한문 지식을 시험해 본다. 정말 말뚝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유생" 부자들을 말뚝이는 조롱한다. 그리고 관중은 소리를 지르며 양반 유생들을 야단친다. 민중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갑"질하는 양반들이 저토록 무식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마당극판은 온통 욕질과 조롱하는 웃음으로 난장판이 된다.
나는 이화여대의 학생들이 벌이는 마당극을 여러 번 즐겨 보았다. 같은 기독교학과의 현영학 교수님과 함께 학생들 틈에 끼어 소리도 지르고 박수도 쳐가면서, 그리고 최루탄 냄새 때문인지 마당극의 감동 때문인지 눈물도 많이 흘렸다. 학생들 틈에 끼어서 워키토키로 상부에 보고하는 정보원들과 관할 정보과 경찰관의 굳어 있는 표정에 신경을 쓰기도 하면서, 이제 학생들 몇은 오늘 밤 안으로 경찰서로 연행될 것을 걱정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당시의 탈춤 연구가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 탈춤 판에는 말뚝이 같은 민중들, 5일 장을 보러 시골에서 올라온 농사꾼들,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모여든 장사꾼들, 동네 아낙네들과 아이들 틈에, 마당극 주인공으로 나오는 무식한 양반들과 같은 동네의 양반집 어른들, 유생들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동네 관아에서 나온 "공무원," "경찰"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도 다른 관중들과 함께 말뚝이의 연기에 웃고 소리 지르고 즐겼다. '어떤 놈이 저런 연기를 하는가? 민중의 비판의식을 고취하고 의식화 작업을 하는 외부 세력이 하는 짓 아닌가? 어떤 놈들이 저런 수작을 부리는지 명단을 확보해서 올려야겠다.... 그리고 한두 놈 잡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나 계획이나 행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놀이는 놀이다. 웃고 즐기자.
오늘 날 21세기 소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박근혜 정권은 100년 전, 아니 200년 전 조선조 양반 집권세력보다 더 취약했던가? "창조적 문화 융성"을 국책으로 내세우면서 노래하는 정권의 민낯은 반문화적이고 반창조적이고 반민주, 반 민중이었다는 현실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광장의 문화 저항 운동은 문화와 예술과 해학과 비판을 억압하고 말살하려 한 정권을 탄핵하게 된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민중신학과 이야기신학: 서남동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2016년 12월 민중신학회 월례연구회에서 발표한 박일준 교수의 논문을 듣고 다시 읽고 그가 소개하고 인용한 두 권의 책을 통독하면서 민중신학의 선배, 현영학 교수와 서남동 교수의 이야기들을 회상하고 싶어서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뒤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여기서는 서남동의 "이야기 신학"을 다시 음미할 생각이다. 박일준 교수가 소개한 두 권의 "이야기 담론" 책들은 서남동의 이야기 신학을 연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서남동의 민중신학 논문집,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에 게재된 두 편의 논문들은 "민담에 관한 탈(脫)신학적 고찰"과 "민담의 신학-반(反)신학"인데 이야기와 민중신학을 연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면서 "민중신학"이 탈신학적이며 반신학적이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야기 신학은 신학 아닌 시학"이라는 것이다.
서남동은 이야기 신학의 단초로 "안동 신랑 이야기"를 제시한다. "판서에다 대제학을 겸한 김숙의 아들 안국(安國)은 이목이 수려하였다"로 시작되는 안국의 이야기로 '이야기 담론'을 전개한다. 아버지는 아들 안국이 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하늘 천(天)자도 떼지 못하여 아버지의 속을 상하게 하였다. 그러고 있는 터에 김숙의 친 동생이 마침 안동 통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김숙은 동생 청(淸)에게 아들 안국을 데리고 안동에 가서 글공부를 시켜 보라고 내어 쫓았다. 청은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조카 녀석은 한문 한자도 떼지 못했고 두통만 호소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다 못해 삼촌은 안국을 장가보내기로 하고 안동 본읍의 좌수(座首)되는 이유신 집안의 딸과 성혼하게 한다. 새 색시도 안국에게 글을 가르쳐 보려고 가진 애를 써보았으나 헛수고였다.
"이야기 꾼" 서남동의 글을 그대로 옮기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신부는 한숨을 쉬고 물러서지 아니 할 수 없었으나 날이 갈수록 더욱 민망하여 다시 기회를 보고 말을 꺼내서 '사랑에 나가서 저의 아버지, 오라버니들과 어울려 글도 하고 시도 짓고 해보셔야지요' 했다. 안국은 성을 불끈 내며 '먼젓번에 내 귓가에서 글말은 꺼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아이고 골이야!' 하며 골머리를 싸매고 두러 누워버리는 것이었다." (『민중신학의 탐구』, 302)
아무리 아내가 사서삼경에 통달한다 해도, 남편에게 글을 가르치려드는 것은 예법이 아니라고 생각한 신부는 생각 끝에 '글이 아닌 이야기를 들려주어 보자'는 생각으로 역사 이야기를 옛날이야기로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야기에 재미를 붙인 안국은 아내에게 그 이야기는 어디에서 얻어 들은 거냐고 묻자 아내는 책에서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된 이야기라고 했다. 이때부터 안국은 이야기와 글을 연결시켜 드디어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결국 안국은 과거에 응시하는데 까지 이르렀고 장원급제했다는 이야기이다.
서남동은 안동신랑 안국의 이야기 이외에도 "쇠똥에 미끄러진 범"(같은 책, 275-277), "은진미륵과 쥐"(같은 책, 277-279), "에밀레종"(같은 책, 280-281), "봉산 탈춤"(같은 책, 283-284), "홍길동전"(같은 책, 284-288), "춘향전"(같은 책, 288-290), "지성스님" 이야기 등을 소개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김지하의 전성기 작품, "금관의 예수"(같은 책, 290-294), 동화작가 권정생의 "몽실언니"(같은 책, 294-296) 등도 소개하면서, 구약성서의 "사사 입다와 이름 없는 그의 딸" 이야기(같은 책, 281-283)는 신약성서 마가복음의 "예수 이야기"(같은 책, 296-300)와 연결시킨다.
이야기의 "분석"
서남동은 이야기 한편을 소개 할 때마다 "이야기"를 분석하고 있다. "이야기는 분석적이 아니고 통전적이다"고 전제하면서 이야기를 분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야기"와 "신학"이 연결되는가 보다. 그러면서도 "이야기 신학"은 탈신학이고 반신학이라고 규정했다. 대표적인 분석은 다음과 같다.
(1) 문자와 이야기를 대조하면서 문자는 간접적인 매체인데 반해서 이야기는 "한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귀로 들려져서 알게 되는 직접적인 매체"라고 정의했다(같은 책, 303). 글은 그 내용이 대개 관념적이고 일반적(추상적)인데, 이야기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나아가서 글과 책은 학문적 연구발표의 도구고 '머리의 언어'인데 반해서, 이야기는 '몸의 언어'이다. "문자가 정신적인 언어라면 이야기는 물질적 언어"이다(같은 책, 304). 뿐만 아니라 "문자는 억압적인데 이야기는 해방적이다. 문자가 두통을 일으키는데 이야기는 흥미를 일으킨다는 소년 김안국의 반응은 가히 알 만하다"(같은 책, 304).
(2) 성서는 이야기책이다. "하느님의 자기계시의 제1차적인 매체는 구속사건, 역사적 사건이고 그러한 사건에 관한 본래적인(authentic) 전달매체는 '이야기'이다. 첫째로는 구전적인 이야기이고 다음으로는 이야기 문학이다. 그렇기에 구.신약성서는 거의 이야기 문학으로 차 있다. 하느님의 언어(?)는 이야기고 예수님의 화법도 이야기였고, 성령의 통신매체도 '머리의 언어'가 아니고 '몸의 언어'이다.... (하느님)은 행함과 이야기로 계시하셨지, 사색과 철학으로 계시하시지는 아니셨기 때문이다"(같은 책, 305).
(3) 이야기 신학은 귀납적 신학이며, 반 신학(Gegen Theologie, Countertheology)이다. 전통신학은 "지배의 신학"이다. 전통신학이 정치적 지배질서를 정당화하고 민중을 억압하는 신학이라면 이야기 신학은 이에 저항하는 민중의 정치적 몸부림이다. 서남동의 이야기 신학의 통찰은 성서의 이야기를 민중의 이야기로 규정한다. "본래 성서적 계시의 삶의 자리는 노예제 사회에서 탈출한 가나안과 갈릴리의 민중들, 그들의 이야기다.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이야기며 그런 의미에서 반 신학이다. 통치 이데올로기와 지배체제와 그 문화를 비판하고 시정하려는 민중의 이야기는 반 신학이다...."(같은 책, 306). 이야기신학은 민중 저항과 혁명의 정치신학이다.
(4) 민중의 이야기는 "아래로부터 나온, 밑바닥 인생의 이야기"로서 윗사람(억압자)도 구원한다. 서남동은 민중의 이야기가 억압자도 해방시킨다는 취지로 안동신랑 이야기를 소개하지만, 동시에 비판적 불만을 제기한다. 이 이야기는 "이야기의 해방적" 역할을 말하지만, 민중의 이야기는 아니고 양반들이 하는 "출세와 성공 이야기"가 아닌가 하며 불평을 토로한다. 양반집 아들이 글을 못하다가 민중의 이야기 덕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풍자적 "성공 담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정말 좋은 이야기 실례가 아니지 않냐 하는 자성(自省)이다(같은 책, 307).
성서 이야기와 우리말
나의 목사 아버지는 생후 2년에 고아가 된 내력이 있다. 의병대장 아버지가 일제 헌병에 의해 함흥 감옥에서 옥사하게 되자, 어머니는 손위의 아들들을 음독하게 하고 자신도 애국자 의병대장의 뒤를 따랐다. 이틈에 살아남은 두 살배기 나의 아버지는 압록강 근처의 두메산골에 사는 고모 댁에 위탁되었다고 한다. 평안북도 (지금의 자강도) 산골에서 자라난 소년은 들과 산에서 나무도 하고 염소를 치는 목동생활을 하다가 지나가는 판서원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한글을 배운다. 그리고 난생 처음 읽은 책이 쪽복음성경이었다. 성경책으로 한글을 익히고 판서원 아주머니의 추천으로 강계읍에 소재한 선교사 학교 영실학교(교장 감부열)에 진학하여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한다.
목사 아버지는 재미있고 열정적인 이야기꾼이었다. 옛날에는 시골 마을에 장이 서면, 이야기꾼이 시장 한 복판에 이야기 마당을 열고 옛날이야기를 시작하면 동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구름떼처럼 모여 들어 이야기 꾼(변사라고 했다)의 신명나는 이야기를 듣고 울고 웃고 하면서 한나절을 즐겼다. 일요일이면 교회에서 우리 목사 아버지가 성경 이야기를 신명나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즐겨 노는 이야기, 뱀이 인류 최초의 여자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는 이야기, 왜 남자는 노동을 해야 하고 여자는 애기를 낳아야 하는지, 그리고 인류 최초의 형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그 목록은 끝이 없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야곱의 두 아들의 이야기, 요셉이 형들의 질투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가는 이야기, 그리고 애굽에서 높은 사람이 되어서 형들에게 원수를 갚는 이야기, 노아의 홍수 이야기....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였다. 목사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자랐다. 나도 이야기를 좋아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주일학교 선생을 하면서 어린 아이들 앞에 서서 목사 아버지가 하던 대로 성경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했다. 아이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목사 아버지나 내가 한 성경 이야기로는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 다니엘 이야기가 최고의 항일이야기이고 애국애족의 이야기였다.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해방과 독립을 역설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과 이야기로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웠고, 나라 사랑의 깊은 마음을 키웠다. 외국 선교사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출판하는 일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우리말 성경의 역사 이야기에는 1894년에 있었던 미국선교사들의 선교정책 수립의 이야기가 있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의 첫머리에는 "선교의 대상"을 밝히고 있는데, 민중과 여성을 대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자 농민들과 여성 민중을 대상으로 선교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한문성경이 아니라 우리말 성경으로 번역 출판해서 보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여덟 개 정책 사항 역시 민중 우선의 선교정책이었다. 19세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에게 성경을 읽기 전에 성경 이야기, 하느님 이야기, 예수님 이야기는 구술(口述)될 수밖에 없었다. 성경 이야기를 듣고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우치게 되고 글을 읽게 되는 것이었다. 성경 이야기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도덕적 교훈과 종교적 각성뿐만이 아니라 나라 사랑이라는 정치적 의식화로 진전하게 되었다. 성경을 읽고 하느님 이야기를 듣고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는 종교와 신앙심을 기르게 할 뿐 아니라 애국심과 독립정신과 자유와 정의와 사랑의 실천으로 확대되었다. 한마디로 성경을 읽고 성경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겁고 신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해방감이 있었다.
일제하에서 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는 한글 성경만한 이야기책이 없었다. 농촌계몽 활동에는 반드시 성경책을 들고 갔고, 밤마다 농사일이 끝나면 이야기 마당을 펴고 성경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한 일은 "한글 보급 운동"과 함께 "항일 애국심을 고취하고 신앙과 신념을 키우는 "의식화 운동"이었다.
나의 목사 아버지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우리말 성경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일제하 조선 문학 작품에도 심취해 있었다. 보수 근본주의 목사가 집안에서 유행가도 못 부르게 하고 화투도 못하게 하면서, 일체의 한국 풍습을 배제하고 사는 것이 성경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성경 이외에 조선 문학 작품은 열광적으로 탐독하였다. 그리고 어린 아들에게도 이광수, 김동인, 박계주, 이태준 등등 당대 작가들의 소설을 읽게 하였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러시아 작품들도 읽게 하였다. 나의 일본말 실력을 위해서 항일 목사 아버지는 일본의 나쯔메 소세끼, 타가와 도요히코 등의 명작 소설들도 읽고 독후감을 이야기하게 하였다. 성경에서 문학에로, 그리고 성경에서 정치로, 목사 아버지는 아들의 정신세계를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있었다.
내가 소년시대에 성경의 이야기에 심취하고 조선 문학에 도취하면서 민족의식과 자주 독립과 해방의 열망을 품었던 것을 생각하면,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해방의 정치학"이었고 조선 문학은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의 심미(審美)적 고취"였던 것이다. 박일준 교수가 "문화는 정치이고, 정치는 문화"라는 말은 새겨들어야 할 격언이다. 이로써 정치신학과 문화신학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폴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말하면서 종교는 문화의 진수이고 문화는 종교의 표현이라고까지는 말했지만, 문화가 정치이고, 정치가 곧 문화라는 말은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종교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곧 종교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민중신학은 정치신학인가? 아니면 문화신학인가? 라는 질문 역시 질문을 위한 질문에 불과한 것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