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서 1장 21-34절, 사도행전 5장 12-16절
[현직 대통령의 탄핵을 바라보며]
지난 주 금요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하였습니다. 국회가 작년 12월 9일 찬성 234대 반대 56, 무효 7표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의결하고 헌법재판소에 사건을 접수한 뒤 90여일 동안 진행된 재판과정의 결과였습니다.
국민의 80%가 탄핵이 되기를 희망하였고, 약 20%의 국민은 탄핵을 반대하였습니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선고를 마쳤을 때 한쪽에선 환호가 울려 퍼졌고, 다른 한쪽에선 강렬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흥분한 상태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세 분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습니다.
탄핵을 찬성하는 대다수의 국민은 이번 선고를 통해 대한민국의 법치가 지켜지고, 실질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했지만,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었던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측은 탄핵 심판 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탄핵심판 최종변론이 무효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헌법학자들은 이번 헌재의 판결이 대통령 또한 헌법 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우리 사회의 합리성이 정착되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고, 주요 언론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은 이제 국민의 분열을 넘어 새로운 나라와 사회를 향한 길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저 또한 만감이 교차하였습니다. 만감이 교차하였다는 말이 이번 경우에 정확히 들어맞는 말 같습니다. 내 자신이 뽑지는 않았지만 우리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자체는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서 투표로 다수의 국민에게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배신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고통당한 것은 역시 국민입니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어 그로 인한 국정공백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도 국민이고, 국론이 분열되어 아버지는 태극기 집회에, 아들은 촛불 집회에 나가 가정의 불화, 세대간 갈등을 겪게 되는 것도 국민이요, 탄핵 변론 과정과 특검의 수사에서 밝혀지는 온갖 형태의 국정농단을 보며 실망하고 좌절하고 황망해 하는 이 또한 국민입니다.
그러나 한편 이런 고통 중에도 평화로운 시위와 법치에 근거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불법을 저지른 세력을 단죄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도 느껴집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불리는 프랑스 혁명은 1만 여명의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전국 각지의 농민 반란을 통해 절대왕권을 휘두르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뚜아네뜨를 단두대에 처형하였고, 많은 피를 흘리고서야 성공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미국, April 13 또는 April 2, 1743 - July 4, 1826])의 말대로 때때로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폭군의 피를 먹고 자라는지도("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는 최고 권력자의 불의를 어떤 폭력도 없이 순전히 민중의 평화로운 힘으로 국회와 함께 폭로하고 헌법에 근거하여 정당한 절차를 거쳐 불법을 행한 대통령의 파면을 이끌어 냈습니다. 반외세, 반봉건을 외쳤던 동학 농민항쟁은 외국군에 의해서 짓밟혔고, 3.1 만세운동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받았으며, 1960년 4.19혁명은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980년 5월, 서울의 봄이 오리라 기대했으나, 신군부의 광주 학살로 민주주의의 꽃은 피지도 못하고 꺾입니다. 1987년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냈으나, 군사정권의 후예인 노태우에게 대통령의 자리를 넘겨줌으로써 민주주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 땅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정과 한 세기 동안의 경험이 오늘날 세계가 찬탄해 마지않는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초유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 사건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일지, 앞으로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지, 하나님께서는 이번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 지 머릿속이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이번 탄핵 사건에 대해 설교를 듣고 싶다는 교우의 요청도 있고, 스스로 이 사건에 대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복잡한 심경입니다.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 꿇고 묵상하던 중 프란치스코 수도회 학교 교장이었고(1257년), 교회박사라는 칭호를 받았던(1588년) 중세의 뛰어난 신학자 성 보나벤투라(San Bonaventura)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여러분도 차분히 이 기도를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님, 하나님의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 당신 위에 머무셨듯이, 같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리시어 일곱 가지 선물을 베풀어주시기 바라나이다. 첫째, 우리에게 이해의 선물을 주시어, 당신의 교훈으로 우리 마음이 밝아지게 하소서. 둘째, 우리에게 분별의 선물을 주시어, 당신의 의로운 발자취를 따르게 하소서. 셋째,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어, 악마의 공격을 물리치게 하소서. 넷째, 우리에게 지식을 주시어, 악에서 선을 가려내게 하소서. 다섯째, 우리에게 경건을 주시어, 자비로운 가슴으로 살게 하소서. 여섯째,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시어, 악에서 물러나 선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일곱째,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어, 당신 사랑의 달콤함을 맛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첫 사역 1: 권위 있는 가르침]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서의 본문은 제자를 부르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행했던 첫 사역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시고, 회당에 있는 악한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고, 예수께 몰려 든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고 했지만 무엇을 가르쳤는지 내용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랐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어제 사순절 아침 묵상에도 썼지만 어떤 말씀이 권위가 있을까요? 논리적이고 명료하며 사리에 들어맞고 올바른 말은 권위가 있습니다. 거짓을 늘어놓고 속이려는 말은 조리가 없고 억지를 부립니다. 소리를 질러대고 목소리는 점점 커지지만 제풀에 꺾기고 맙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판별하여 정확하게 핵심을 말하는 언어는 그 자체로 힘이 있습니다. 그런 언어를 사용하려면 합리적 이성이 있어야 하고, 감정이나 상황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저는 이번 탄핵 재판에서 이정미 재판관이 읽어가는 선고문을 보면서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을 피청구인 신분으로 놓고 13가지에 대하여 잘못을 지적했는데, 헌법 재판관들은 이것을 다시 5가지 범주로 정리하고 후에 다시 4가지로 더 압축합니다. 90여일 동안 증인을 부르고, 변론을 해 가며 휴일을 뺀 나머지 60일 동안 매일 평의를 열면서 철저하게 증거에 기반하여 가장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대통령 파면 선고를 내립니다. 재판이 매우 성실하고 꼼꼼하게 재판관 전원의 회의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밝히고, 대통령 변호인단이 제기한 가결 절차에 대하여 문제없음을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그리고 탄핵 사유로 압축한 4가지를 살피는데, 마지막 사유인 최서원, 즉, 최순실의 국정 개입 허용과 권한 남용에 대해서는 헌법과 법률에 위배됨을 밝힙니다. 마지막으로 위법행위가 대통령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것인가를 확실하게 점검한 후 대통령의 일련의 모든 행동이 헌법과 법률을 위배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헌법을 수호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재판관 전원 일치의 판결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합니다.
이번 헌재의 판결은 정치적 고려나 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따른 것이 아니고, 온전히 법리적 해석에 근거하여 추후에 어떠한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확실한 증거만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헌재 판결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이유는 이번 재판이 전국에 생중계 되었고, 21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시간을 통해 우리나라의 합리적이고 보편적 이성의 힘이 증가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매우 아프고 슬픈 역사입니다. 나라를 잃었고, 같은 동족이 서로 죽이는 전쟁을 해야 했고, 허리 잘린 산하에서 정신을 바로 차리고 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트라우마를 겪으며 지냈습니다. 최근에는 세월호 참사가 바로 그러합니다. 심리 상담을 전공하는 많은 이들과 또 정신과 의사들을 만나서 얘기해보면 한국이 OECD 국가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은 이유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 민족과 집단이 단체로 겪은 트라우마에서 오는 매우 속 깊은 상처와 아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별 것 아닌 것에서 쉽게 분노하고 감정 조절을 하지 못했고, 경제적 상황이 어렵거나, 안보가 조금이라도 불안해지면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기보다는 감정적인 대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탄핵을 둘러싼 이번의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 국민의 건전한 합리성이 훨씬 증가하였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진보나 보수적 가치의 싸움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말이 곧 삶으로 실천되고 현실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입을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명령에 따라 악한 귀신이 물러났는데, 누가복음에 의하면 사람은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고 귀신만 물러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악을 물리치되 악이 행하는 똑같은 방식이 아니라, 악을 물리친다면서 자신도 악에 물들고 마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깊고 넓은 선과 사랑의 가치로 악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모든 빛은 그 존재 자체로 어둠을 몰아내듯이, 말만 번드르르 한 것이 아니라 삶과 존재 그 자체가 빛이 되는 사람, 말이 곧 행동이고, 행위가 곧 그 사람의 표현인 그런 사람은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사역 2: 악한 귀신을 쫓아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 악한 귀신의 모습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필이면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고, 거룩한 예배가 시행되는 신앙공동체의 공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악한 귀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귀신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머리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악한 귀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으로 알았다면 자기의 악한 삶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것을 꽉 붙잡고 있으면서 예수가 자기네 일에 간섭하고 자기들을 없앨까봐 걱정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악한 귀신에 물들면 이렇게 됩니다. 겉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는 싫고, 예수를 따르다가는 이 세상에서 실패할 것 같고, 그래서 도리어 예수님 말씀이 귀찮고 나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럴 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제자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도리어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일들이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늘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제자의 모습]
제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오늘 시몬의 장모의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시몬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아팠습니다. 여기서 열병이란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홧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속에서 열불이 나는데 그것이 감당이 안 되는 것이지요. 가부장적 사회에서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여성들은 홧병이 납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에 장모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여성은 아마도 사위집에 얹혀사는 신세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주눅든 삶이었을 확률이 있습니다. 게다가 사위는 자기 딸을 위해서 열심히 돈도 벌고 장사도 하고 아무튼 잘 살아야 하는데 예수 청년을 만나 사람을 낚는다면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속으로 말도 못하고 그래서 홧병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장모도 예수의 치유의 손길로 병에서 해방되자 일어나서 예수와 제자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중들다"라고 번역된 말은 섬긴다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기기 위함이라고 했는데(10:45) 바로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과 같이 지금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이 여성의 섬김으로 힘을 얻고 또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습니다. 이 또한 세상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악의 세력을 보면서 억울함을 당해도 말 못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민주주의란 이 나라의 주인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리도 있고, 그만큼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제 고치고 나쁜 것들은 몰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했지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사도들의 손을 거쳐서 많은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이 이들을 칭찬하고, 남녀 신도들이 늘어나고, 심지어는 병자들을 거리로 메고 나와서, 침상이나 깔자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근방의 모든 병자들과 악한 귀신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사도들에 의해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전부 이제 예수님처럼 그 능력을 이어가고, 저 세상으로 파송 받은 사도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우리 사회가 바뀌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선두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정직함과 떳떳함, 사랑과 정의를 지닌 힘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고귀한 가치 속에서 진실이 승리하고 정의가 서로 입을 맞출 것이라는 희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짜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어제 지하철 을지로역에서 지갑 하나를 주웠습니다. 남성용 장지갑이었는데, 안을 열어보니 다행히도 그 안에 주인의 명함이 있었습니다.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신이 지갑을 떨어뜨린 사실을 이제 막 알아차린 지갑 주인은 상기된 목소리로 제가 있는 곳을 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쏜살같이 달려왔습니다. 한 손에는 감사하다면서 전주 초코파이 다섯 개를 들고 왔습니다. 우리도 지갑을 잃어 버렸는데 누군가 주웠다는 전화를 받으면 아마 쏜살같이 달려갈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바른 양심을 흘리고도 도무지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우직하게 따르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교회를 이끌었던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베드로 사도도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노력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능력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배우고 실천합시다. 물론 우리 삶의 여건이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시간 안배를 잘 해서 다시 한 번 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실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온갖 병을 고치려면 내가 건강해야 합니다. 내가 튼튼해야 하고 내가 옳은 신앙과 참된 지식을 지녀야 합니다. 신앙의 측면에서도, 이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에서도, 역사적 사건에서 의미를 발견하는데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지금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우리 모두 힘을 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처럼 지금 이 땅에도 여기저기에서 신음하며 도움을 기다리는 손길들로 가득 합니다. 바로 그런 자리에 언제나 우리 생명사랑교인들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온갖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 땅의 수많은 악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거짓과 속임수, 헛된 욕망과 아집이 사람들을 병들게 합니다. 주님! 오셔서 고쳐주소서. 우리 생명사랑교인들이 당신의 손발이 되어 추운 겨울 떨고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봄바람이 되게 하소서.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욕심은 십자가에 못을 박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의 나라를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는 이 나라를 사랑하여 주셔서, 지금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 더 나은 사회가 되도록 국민들에게 지혜를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