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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루터의 종교개혁 표제어 "믿음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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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올해 2017년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성채교회의 정문에 95개조의 논쟁문서를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시작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학적, 교리적 투쟁을 벌이면서 1520년에 세 개의 이른바 '종교개혁문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논문들은 '독일 기독교 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교회의 바빌론 포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논문이다. 필자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는 이 세 개의 '종교개혁문서'들을 바탕으로 3회에 걸쳐 루터가 생각했던 종교개혁의 방향들과 목표들을 오늘날 세계와 교회의 현실에서 비추어 재해석함으로써 교회와 세계가 새롭게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하나님의 세계통치, 하나님 나라

마르틴 루터는 1천년 동안 중세 봉건체제가 만들어낸 당시 유럽사회의 모순들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했었다. 이러한 모순들은 바로 그 시대를 지배하는 로마가톨릭교회, 특히 교황청의 잘못된 교리와 제도들과 관행들에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가톨릭교회는 봉건영주들과 결탁하거나 자신들이 영주가 되어 권력과 부를 독차지하고 가난한 농부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력으로 등장했었다. 거기에 더해 가톨릭교회는 동쪽에서 위협해오는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세력을 방어하는 구실로 농민들에게서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였고 기사계급들과 농민들을 십자군 전쟁터로 내몰았었다. 또 교황은 베드로 대성당건축 공사를 계획하고 그 재원조달을 위해서 비성서적인 면죄부를 강매하는 잘못까지 저질렀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러한 반성서적이고 타락한 가톨릭교회를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개혁하지 않고는 교회와 세상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1517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열거한 95개조의 "논쟁문"을 비텐베르크의 성채교회 정문에 제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마르틴 루터는 우선 교회개혁의 출발을 신구약성서의 연구에서 시작했다. 왜냐하면 성서만이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지침서였기 때문이다. 성서보다는 교리나 제도 그리고 관행에 의존한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성서를 철저히 연구하는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서만"으로라는 개혁의 중심원리가 나온다. 1520년 그의 중교개혁문서 중의 하나인 '독일 기독교 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제도가 잘못된 제도하는 것을 다음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 가톨릭교회가 서임권논쟁과 관련해서 주장하는 교황의 영적 권위가 황제의 세속적 권위 상위에 있다는 교황의 "정치적 수장권"을 반박한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적 권위인 교회와 세속적 정부인 국가라는 두 개의 세계 통치도구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의 "두 왕국이론"인데, 하나님은 영적 권위인 교회는 말씀으로, 세속적 권위인 국가는 법과 질서로 통치하는 각기 구별되는 직무를 허락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두 왕국이론"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듯이 "정교분리"(Separation)의 원리가 아니라 '정교구별'(Distinction)의 원리다. 루터의 두 왕국이론에서 정교분리의 원리를 찾는 것은 보수적 신학자들이 그의 사상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것이다. 성서에도 루터신학에도 정교분리의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루터는 교황만이 성서해석권리와 함께 천국의문(구원)을 열고 닫는 열쇠권을 갖는다는 "교리적 수장권"을 반박한다. 루터에 의하면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판단능력에 따라 성서를 해석할 수 있고(고후 12:8), 만인사제론에 근거해서 모든 신자는 구원의 열쇠의 직무를 갖는다.(누가 22:29-30).

셋째 루터는 교황만이 교회의 총회를 소집하고 그 결의들을 승인할 수 있다는 "공의회 수장권"을 반박한다. 기독론을 다루었던 325년 최초의 초대교회의 총회인 니케아 공의회는 사실상 세속영주였고 평신도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소집되었었다. 그리고 그 후 초대교회에서 일곱 번의 공의회들은 주교들의 합의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거기서 교리들이 결정되었다.

넷째 루터는 교황과 지도층들의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오류를 비판한다. 그들은 교회를 궁정국가로 만들어 수많은 추기경들로 관료체제를 두고 세속영주처럼 통치하여 정교통합을 내세워 그것들이 서로 구별되어야 할 성서의 가르침을 어겼다. 또 교황과 추기경들은 막대한 장원들과 토지들을 소유함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호사스런 생활로 과도한 재정을 낭비했다. 나아가서 두 차례에 걸친 라테란 공의회(1123, 1139년)의 결의에 따라 성직자들의 결혼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들과 추기경들은 비밀리에 아내와 첩들을 두었었다. 그들은 아내와 첩들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조카라고 속여서 재산을 나누어주거나, 교회의 고위성직이나 세속의 영주로 삼았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모순과 타락으로 가득 찬 가톨릭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이 원했던 세계통치의 목표와 방향 그리고 교회가 받은 위탁을 성서연구를 통해서 탐구했었다. 루터는 1513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학교수로 취임하여 첫 시편강해를 하면서 특히 "등극시편"(시편96-99)에 주목했다.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신 하나님은 뭇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며 정의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정의와 공평이 그 왕권의 기초다."(시편 97:4).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다. 주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다."(98:4).

첫째 야훼 하나님의 왕권통치의 기초는 강자의 억압이나 약자에 대한 착취가 없는 "정의와 공평"의 나라이다.(시편 97:2; 98:9). 둘째 하나님의 통치의 목표는 나라들과 개인들 사이의 정의와 공평을 통한 인간들 사이의 평화다.(시편 98:1-2). 따라서 하나님나라 혹은 하나님의 통치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과 진실, 평화와 정의가 지배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삶이다. "주의 구원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가까이 있으니, 주의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를 것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본다."(시편 85:9-11).

시편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 나라(통치)개념들은 8세기 예언자들의 메시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예언자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이 정의로운 통치가 실현될 때 "사람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사 2:4)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사 9:6-7).

마르틴 루터가 시편강해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통치의 핵심내용은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것(시편 85)이었다. 루터는 이러한 성서네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라는 핵심사상에 도달함으로써 개혁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분명히 하게 되었다.

복음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

마르틴 루터는 이어서 1515년 바울의 로마서강해를 하면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가 신약성서에 나타난 복음과의 상관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통해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하박국 2:4)한 것과 같습니다." 루터는 이 로마서의 말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복음의 관계해명에서 그의 종교개혁의 단초를 더욱 선명하게 발견한다.

첫째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약성서를 꿰뚫고 있는 하나님의 정의가 그리스도 사건, 즉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는데. 바울에 의하면 구약의 율법의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하는 복음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구약의 율법의 의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공로로 구원에 이르렀지만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통해서 거저 주시는 믿음과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경건하지 못한 사람(율법을 지켜서 공로를 세우지 못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 믿음이 의로움으로 인정을 받습니다."(롬 4:5). 이러한 바울의 메시지에서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인간의 공로주의에 기초한 구원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대표적 예가 가톨릭교회가 만들어서 팔던 공로주의의 상징인 면죄부사상에 대한 부정이었다.

둘째 사도 바울의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한다."(사역)라는 구절에서 루터가 주목한 것은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면 사람들이 더 이상 공로가 아니라 믿음과 은총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통해서 나타나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에서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갔고, 그 아내 사라는 수태나이가 지났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아들을 낳았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으나 하나님이 친히 제물을 마련해 주셨다.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신뢰, 즉 신비주의적으로 표현하자면, 신과 인간의 "신비로운 일치" 혹은 "화해된 은총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다."(희 12:2)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믿고 화해하여 은총 가운데 평화롭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의를 통한 평화와 은총의 공동체를 요청했던 하나님은 그 구체적 내용들을 이미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백성들이 굶주릴 때 하나님은 만나를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셨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출 16:18). 12지파들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 토지를 정의롭고 공평하게 분배해 주었고 희년제도를 두어 불공평한 소유관계를 시정토록 했다.(레 25장).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사상은 초대교회에 재산의 공유제를 통해서 사회적 공동체를 지향했었다.(행전 4: 32-37). 이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하박국 2:4)에 잘 요약되어 있다.

여기서 루터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나타나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화해된 세계가 되면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구원받은 은총의 세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종교개혁의 목표로 삼았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 5:17-19).

오늘날 공로가 지배하는 세계체제

오늘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와 그 안에서 활동하는 교회의 처지와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 세계는 500년 중세기 말기에 가톨릭교회의 교황청과 초기 자본주의의 금권지배 사이의 결탁이 가져왔던 불의한 정치적 종교적 지배와 거기에 근거한 인간들의 노예화에 대한 루터의 염려를 더욱 첨예하게 보여준다. 당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주장하던 유태인들이 선봉이 되어 이탈리아의 북부 도시들 베니스와 피렌체, 제노아 등과 영국 런던과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점으로 성행했던 금융업자들의 과도한 이자놀이의 폐해를 루터는 잘 알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고리대금업자들에 반대하여 설교할 목사들에게"란 글에서 이러한 고리대금업을 "악덕, 죄악, 수치가 아니고 고상한 덕목이고 영예로운 것"이라고 주장했던 가톨릭교회에 대항해서 투쟁할 것을 요구했다. 루터는 고리대금업자들이 주던 폐해를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독일에서 고리대금업자들은 영주들뿐만 아니라 평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물가를 올리고 아무것도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삼킨다.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는 심해진다... 라이프치히에서 1백 굴덴을 가진 부자는 40굴덴을 이자로 먹어치워, 1년에 농부 1명이나 평민 1사람을 파멸시킨다. 만일 그가 1천 굴덴을 가졌다면 매년 4백 굴덴을 이자로 받고 그것은 한 명의 기사나 귀족을 삼켜버린다. 그가 만일 1만 굴덴을 가졌다면 매년 4천 굴덴을 이자로 남기는데 그것은 매년 백작 1명을 삼키는 것이다. 고리대금업자가 10만 굴덴을 가졌다면 그는 매년 40만 굴덴을 취하며, 그것은 부유한 영주 한명을 심키는 것이다. 만일 그가 100만 굴덴을 가졌다면 매년 40만 굴덴을 이자로 취하고 그것으로 왕 1명을 파면시킨다."

성서는 원칙적으로 이자취득을 금하고 있고,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뱅도 생계를 위해 돈을 꾼 사람에게서 이자 받는 것을 금했다. 다만 상업적 이윤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돈을 꿀 경우 3-4%의 이자를 예외적으로 허용했었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는 깨우침의 운동이라 할 수 있는 계몽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은 노동계급들이 산업자본주의의의 착취구조에 저항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었다. 이들 노동계급은 반종교적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를 멀리했고 특히 당시 기득권 세력과 결탁하고 있던 가톨릭교와 개신교에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의식 있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신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은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사회적 가르침에 기초하여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이른바 '기독교적 사회주의' 운동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적 사회주의 운동은 내적으로는 강고한 보수적 제도권 교회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외적으로는 노동계급들의 외면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었다. 칼 마르크스는 이러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운동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했고 자기가 주창하는 사회주의야 말로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었다.

가톨릭교회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도전에 직면하여 자본과 노동의 권리와 책임을 다룬 교서에서 사실상 자본주의를 공적으로 승인했었다. 1891년 교황 레오 8세는 교리교서(Rerum novarum)에서 오늘날 박혜정부가 추진하는 성과급제와 같은 의미의 "보완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를 내세워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인정했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도 루터의 소명론에 근거한 직업윤리와 칼뱅의 예정론에 기초하여 기독교와 자본주의는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본주의를 추동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특히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칼뱅의 예정론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선택의 징표를 지상에서의 부유한 삶에서 보고와 청빈과 근면으로 재산을 모은 것이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경우 이러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도전에 대한 비교적 적절한 복음적 응전은 통일된 독일제국의 초대총리였던 보수적 정치가 비스마르크(1871-1890)에 의해서 이루어졌었다, 그는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에 반대하고 그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조치로 노동자들을 달래고 그들의 삶의 개선을 위한 의료보험(1883), 산재보험(1884), 퇴직연금법(1889) 등 세계최초의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했었다. 이러한 사회보험제도는 사실상 가난한 노동자계급의 분노를 달래고 그들을 사회주의운동에서 떼어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러지만 역으로 그것은 사실상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청하는 결과를 가져왔었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사회보험제도를 통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응답은 오늘날 독일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복지국가로 가는 기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남침례교 목사인 월터 라우셴부쉬(1861-1918)가 "사회복음주의 운동"을 통해서 산업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착취에 저항했었다. 그리스도의 사회적 가르침에 근거해서 그는 산업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적 조건들을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 일에 나섰었다. 그러나 초기의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장로교 등 보수적인 개신교회들의 방해와 무관심을 겪어야 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러시아와 유럽에서 레닌 등이 주도하던 과격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환멸과 함께 신학적으로는 바르트 등 신정통주의의 신학의 등장으로 그 동력을 상실한다. 그 결과 미국은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빈부의 격차가 극에 달했던 1920년대 말 대 공항을 맞아 자본주의가 큰 위기를 처했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체제가 등장하면서 세계는 본격적으로 돈(맘몬)이 지배하는 금융자본주의 체제로 들어섰다. 1987년을 넘어서면서 물건생산으로 얻는 이윤보다 돈놀이로 얻는 이익이 더 많아졌다. 세계적으로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택한 나라들의 소득격차가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 2008년 미국 뉴욕 금융 중심가인 월스트리트에 있는 거대 투자은행 레만 브라더스가 파산함으로써 산업자본주의 위기 이후 100여년 만에 금융자본주의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도 이러한 위기는 남유럽국가들과 제3세계의 후진국들에서도 진행되고 있고 점차 심화되어 가는 현상이다.

이러한 세계적 현실에서 우리나라의 예를 보자. 2008년 한국은 소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서민들의 경제사정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한국은 현재 OECD 국가들 중 소득격차가 가장 심각한 나라다. 부유한 상위계층 10%가 현재 전체 소득의 44.9%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부유한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0%이상을 차지하는 나라는 일본(40.5%)과 미국(45.8%)뿐이다. 그런데 유럽의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택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그리고 독일이나 프랑스 등에서는 소득불평등이 점차 감소하는 추세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조세부담률 추세를 보자. 그동안 한국의 부자(연소득 12억 5000만 원 이상)의 조세부담률은 1980년도 58%에서 2011년에는 34.6%으로 하락했다.(경향신문 2016년 9월 5일자). 유럽의 사회적 민주주의 국가들은 고소득자들의 조세부담률을 높여서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50% 이상,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스웨덴과 노르웨이) 65%에 달하는 나라들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이명박정부는 대기업의 법인세는 감면해주었고 박근혜정부는 부자들의 법인세는 그대로 둔 채 서민들의 세금과 공과금들은 올리고 있다. 그리고 서민들의 가계부채는 2016년 현재 무려 1300를 넘어선지 오래고 그것은 점정 더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다 국가부채, 공공기관부채, 공기업부채 등을 더하면 대한민국은 가히 파산 직전의 부채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한국의 현실을 "헬조선"이라고도 하고 그 타개책을 가로막는 "장벽"을 빈부의 대물림에서 보고 "금 수저와 흙 수저" 등 새로운 계층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이리하여 정치, 경제, 교유 등 각 분야에서 무제한적 업적을 요구하는 경쟁사회에서 국민들은 지쳐가고 있다.

결론: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 산다.

이제까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개혁사상인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명제를 오늘날의 세계적 차원에서 역사적 현실들과 대화하면서 다루어 왔다. 개혁자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지향했던 공로와 업적으로 산다는 반성서적이고 비인간적 가르침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은총의 공동체적 삶을 종교개혁의 대명제를 제시했었다. 그런데 그가 비판했던 가톨릭교회의 업적주의에 기초한 맘몬정치 특 금권지배(Plutocracy)로 오늘날의 세계현실은 너무나도 어둡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구원받는 삶을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교회는 우리나라를 살만한 믿음과 은총이 넘치는 공동체적 사회로 개혁하기 위해서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할까? 왜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선택한 미국과 일본 및 한국은 경제가 발전되고 부가 축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빈부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는가? 왜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정교회와 가톨릭국가들,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오늘날 유럽에서 유독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을까? 왜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택하고 있는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오늘날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가?

필자는 신학자와 사회윤리학자로서 그동안 50여 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얻은 나름대로의 신학적 결론을 간략히 소개함으로써 결론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필자는 유학중에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경제체제"에서 교회가 주는 장학금 외에도 독일정부의 사회보장제도가 주는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었다. 거기서는 초중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은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무상으로 실시된다. 많이 버는 사람들이 많은 보험료를 매기 때문에 대학생들의 경우 약 3만 원 정도만 내면 무료의료혜택을 받는다.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수입의 정도에 따라 주택보조금도 받아서 인간다운 주거공간에 산다. 자녀양육보조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그들이 취직을 돈을 벌 때까지 일정액수가 지급된다.

이러한 복지혜택은 독일이 헌법에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 20조에 1항에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적이고 사회적(sozialer) 연방국가다."로 명시되어 있다. 이 조항은 시장의 무제약적 자유와 사회적 책임의 포기에 반대하여 사회적 정의를 위한 국가적 책임을 명기하고 있다. 독일헌법28조는 독일연방공화국은 "사회적 법치국가"(sozialer Rechtsstaat)라고도 규정하고 있다.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서구 유럽 국가들 중 독일이나 프랑스 등은 사회민주당은 물론 보수적인 기민당들도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독일개신교회(EKD)는 1983년 총회에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제도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백서를 채택했다. 왜냐하면 이 제도야 말로 개인들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를 담고 있는 기독교 정신에 가장 '근접한' 정치제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행위의 과제는 자기보존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적 삶에 대한 고려와 결합되는 구조들을 만들어 가는데서 성립된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고려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러한 독일의 처지를 고려할 때 그동안 미국 등에서 기독교가 일방적으로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지원하고 사회주의를 적대시한 것은 역사적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감히 자본주의는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공로와 업적주의에 기초한 비인간적이고 반 공동체적 경쟁체제이며, 사회주의는 마르틴 루터가 주장한 은총에 기초한 인간적이고 공동체적 협력의 체제라고 본다. 그래서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스위스의 사회민주당의 당원으로써 스위스를 은총이 지배하는 인간다운 사회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했었다. 그의 제자인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골비처 교수 역시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정의로운 독일과 분단된 동서독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문화성장관을 역임했던 아돌프 그리메(Adolf Berthold Ludwig Grimme)의 말 "사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는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가톨릭의 공로주의의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종교개혁의 믿음과 은총의 경제체제인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택할 것인가? 최근 한국의 진보정당인 정의당이 당명을 "민주적 사회당"으로 바꾼다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시도를 환영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하에서 빈부의 격차가 심각해지고 노동자들에게 성과급이라는 업적주의의 족쇄를 물리려는 박근혜정부에서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려는 사회당의 출현은 루터의 종교개혁정신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맘몬을 섬길 것인가 기로에 서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말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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