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2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공식일정으로서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하여 비정규직 문제를 임기 중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대통령은 그 약속이 한 사회를 사는 인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에 바탕을 두고 있음도 밝혔다: "이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돼 고용이 제대로 안정된 가운데 처우도 개선해, 더 당당하게 자부심을 갖고 근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정규직 제도가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의 열풍에 따라 도입된 것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약속은 세계관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비용절감 효과 등 효율성을 추구하던 기존의 원칙을 탈피하여 인간의 노동 그 자체의 신성함을 인정해야 할 당위성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의 2017년 3월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은 한시적 근로자, 기간제 근로자, 시간제 근로자, 비전형 근로자 등을 포함하여 615만 명을 상회하며 전체 임금근로자의 32%를 점유하고 있다. 이들은 고용의 지속성을 기대할 수 없거나 열악한 근무조건을 감내해야 하거나 차등임금을 감수해야 하거나 복지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등의 차별을 받으면서도 세계 수위 규모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경제를 견인하는 산업현장의 역군으로서 활약해왔다. 그러나 이 제도는 효율성을 우선하는 가치관에 따라 실행되는 과정에서 근로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뿐만 아니라 인간을 도구화하는 관행, 소위 '갑질'이 횡행할 공식적인 공간을 만들어주는 등 인간성을 압박하며 심지어 말살하는 폐해까지 발생시켰다. 대통령의 약속은 우리의 산업현장이 근로자를 도구가 아니라 신성한 노동을 수행하는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계상황에 와 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 동안 치켜세워진 효율성의 기치는 평등을 도외시한 방종을 자유로 둔갑시켜 인간의 본질인 신성한 노동마저도 도구화하며 인간성을 압박하는 지경까지 초래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라는 분야 자체가 효율성을 전제한 영역인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려는 노력은 수많은 난관과 반대에 봉착하게 되어 있다. 자유를 중시하던 패러다임에 따르면, 능력 있는 자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세습하며 더 공고하게 삶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니까 소위 '가진 자'들의 저항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소위 '가진 자'들의 '우선 파이를 크게 키워서 함께 나누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공평분배의 주장이 비논리적이며 근시안적인 발상으로 비춰질 수 있다. 당장에 정규직으로의 전환에 소요될 비용, 피해를 예감하는 기존 정규직들의 반대, 위축될 노동시장의 유연성, 더 어려워질 청년들의 구직문제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공평분배가 경제이론상 기대효과가 없는 것도 아닌데다, 무엇보다 인간의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며 동등한 인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통합의 시너지 효과까지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역사적인 실패를 거울삼아야 하는 과제는 명심해야 하겠지만, 경제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므로 그 혜택을 받을 인간의 범주를 확장하는 것이 그 궁극의 목적을 실현하는 길인 것은 자명하다.
이와 같이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하여 묵상해볼 만한 비유가 성경에 나온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비유 중에 인력시장을 드나들며 노동자를 고용하여 포도원에서 일하게 한 포도원 주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마태복음20:1-16). 그 주인은 아침에 일찍 와서 열심히 일한 노동자와 저녁에 늦게 온 노동자가 동일하게 1데나리온의 임금을 받도록 조처했다. 먼저 온 노동자는 당연히 자신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반발했다.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주인은 "나중에 온 일꾼에게 자네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가 선한 것이 자네 눈에 거슬리는가?"(우리말성경 마태복음20:14-15)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주인의 뜻은 능력우선, 효율추구, 형평성 등과 관련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하루 생계와 관련되어 있다. 당시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서,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값이었던 것이다. 주인의 '선한' 뜻은 노동에 실린 인간의 가치를 고려하고 있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그 노동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신성한 활동이므로 노동의 양적 가치가 인간의 질을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세기의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이 비유로부터 사랑이 없는 경제학은 인류를 패망의 길로 인도한다고 주장했다(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생존의 조건을 채워주지 못하는 경제라면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세대가 지나면서 형평성의 가치를 우선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고, 또 그렇게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시기가 오기도 하겠지만, 그런 때에라도 효율성이 인간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금도는 지켜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