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故 현홍주 중앙정보부 차장과 한국 교회 통일운동

서광선 목사 (이화여대 명예교수)

편집자 주] 현홍주(77) 전 주미대사가 5월27일(토) 별세했다. 현 전 대사는 노태우 정부 시절 한미동맹 강화와 북방 정책 추진에 기여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북한교회와의 대화를 시도한 "도잔소 회의"가 성립되도록 막후에서 원조한 인물이다. 서광선 박사가 그를 회고하는 글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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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본지 논설주간)

"원래 평화협상이라고 하는 것이 전쟁 중에 하는 거 아닙니까? 한참 전투 중일 때 그만 끝내자고 협상하는 거지, 전투 끝내고 하는 건 아니지, 전투 끝내고 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군인들은 총 쏘고 싸우지만 위에서는 몰래 협상하는 거죠. 밑에서는 지금 데모를 하는데 우리 직원은 나가서 막고 있겠죠. 그런데 우리는 22층에 앉아서 평화협상하는 거 아닙니까?"

이 말은 1983년 가을 서울시청 건너편에 있는 플라자 호텔 22층에서 현홍주 당시 중앙정보부 제3차장이 제네바 소재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위원회 직원인 대만계 미국인 빅터 슈(Victor Shu)와 캐나다인 에릭 바인가트너(Eric Weingartner)를 대동하고 방문한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오재식 부총무 앞에서 한 말이다. 오재식 부총무는 친구인 나(당시 이화여대 해직교수)의 소개와 주선으로 WCC의 계획과 요청을 전달받고 논의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회동했다.

1983년이면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신군부가 5.18 광주 민주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수많은 학생들과 언론인과 지식인과 종교인들을 투옥하고 해직시키며 제5공화국을 독재하고 있을 때였다. 이들이 회동한 플라자 호텔 22층의 객실은 정보부 고위 간부들이 사용하는 정보 "아지트"였다. 현홍주 정보부 차장은 호텔 앞 시청 앞 광장에서 대학생들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소리 지르며 데모하는 광경을 내려다보며 위처럼 말했다.

오재식 부총무와 외국 손님들은 WCC 주최로 일본에서 남과 북의 교회 지도자들이 회동하여 평화통일 운동을 전개하는 회의 개최 계획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한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에 가서 세계기독교지도자들과 한반도의 남북 분단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북한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함께 평화회의를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 당시 남한의 목사들이 북한의 목사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 국제회의의 취지를 설명하고 정부의 허가를 얻어 내기 위해서는 정보부 책임자와 접촉해야 했었다. 오재식 부총무는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 한국 기독교의 선교적 사명이 남북의 분단과 대립과 적대를 해소하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굳히고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각종 통일협의회를 개최하면서 교회 안의 통일 논의를 확산시키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국제회의나 남북의 기독교지도자들이 함께 회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WCC 주최로 일본에서 남북교회 지도자 회의를 계획했던 것이다.

현홍주 차장은 시청 앞 광장의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의 시끄러운 함성을 들으면서도 유연하게 WCC가 주최하는 일본에서의 남북 교회지도자 회의에 협조할 것을 약속하였다. 다음해인 1984년 10월 일본의 후지산(富士山) 동남쪽에 위치한 도잔소(東山莊)에서 그 유명한 "도잔소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남한의 교회지도자 10여 명과 일본, 홍콩, 대만, 필리핀의 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동북아시아회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대회의 주제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교회의 역할"이었다. 이 회의 주제강연은 당시 WCC 총무 필립 포터(Philip Potter) 박사가 했고, 지한파 학자인 부르스 커밍스(Bruce Cummings) 교수가 발제강연을 맡았다. 북한의 교회지도자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회의장소를 제3국인 일본으로 정했는데, 북한에서는 대표가 올 수 없었다. 북한교회는 조총련을 통해서 축전만 보내왔다.

고 현홍주 차장이 주선하다시피 한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의 한반도 평화회의, 도잔소회의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WCC와 함께 한반도 분단 극복과 평화 정착을 위하여 기획한 모임은 1986년 제네바에서 개최하고 남북한 교회 지도자들이 세계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성찬식을 올리는데 까지 진전하였다. 그리고 NCCK는 오랜 논의와 연구 끝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1988년 올림픽 서울 개최의 해, 2월 29일 NCCK 총회에서 만장일치와 기립박수로 채택했다. 그리하여 현홍주 정보부 차장은 한국의 기독교가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통일 운동의 물꼬를 트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 2017년 5월 30일, 현홍주 전 주미 대사의 부음을 접하면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한국교회의 몸부림과 호소에 응답하고 행동한 그의 숨은 공헌을 기억하고 감사하고자 한다. 그의 깊은 기독교 신앙과 나라 사랑이 새삼 그리워진다. 그의 명복을 두손 모아 빈다.(이 글은 오재식, 『나에게 꽃으로 다가 오는 현장』[대한기독교서회, 2012], 260-63쪽 참조)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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