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명재 목사(김천 덕천교회)
책 출간 소식은 들었지만 마음을 두지 않았다. 출판되는 수많은 책 중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출판사 대표에게서 그 책을 선물 받았다. '도서출판 토닥토닥'에서 낸 ·『분해(分解)』,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을 낸 출판사에 대한 배경 지식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시골에 있는 출판사다. 경북 예천 유일의 출판사가 아닌가 싶다. 이름이 '토닥토닥,' 순수한 우리말에 향토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의태어다. 명사가 지배하는 자리에 부사를 출판사 이름으로 정한 그 용기란!
올 초, 출판사 등록을 하고 첫 번째 낸 책이 유경호의 『분해』라고 한다. 이 책의 부제를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라고 했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이별을 떠 올리게 하고 나아가 죽음과 연결된다. 어쩌면 슬픈 단어인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많다.
맞다. 이 책은 암 세포에 점령당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思父曲)이다. 우리 사회에 노령화가 급격히 진행됨에 따라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이 옅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치자. 그렇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유경호는 사랑과 정리(情理)를 매개로 해 아들로서 지키고 싶은 속내를 가감하지 않고 나긋이 속삭이고 있다. 암 환자 아버지의 아픔을 함께 느끼면서 안타까움을 글로 정리하고 있다. 시종일관하는 경어체도 아들로서의 겸양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책의 최종 주제를 뭘로 하면 좋을까? 나는 '아버지 사랑'으로 정의하고 싶다. 물론 여기서의 아버지는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 중 한 분인 아버지다. 허나 늦게 예수를 영접하고 믿은 전능자 하나님으로 봐도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겠다. 중의적 의미다.
이 책 『분해』는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나뉨의 기준이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떤 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 다른 글은 공간적 이동에 따라 아버지에게 느끼는 마음을 따뜻하게 엮어낸다. 여느 유명 인사의 글에서 느낄 수 없는 감동을 맛본다.
글은 장르가 있다.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을 글의 5대 장르라고 한다. 이런 글을 통일해 정리해 놓은 것이 '~집(集)'이다. 유경호가 쓴 『분해』는 과연 어디에 속할까? 읽고 또 읽어봐도 특칭하기가 쉽지 않다. 장르를 무시한 글쓰기라고나 하면 될는지.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이란 부제의 '여행'에선 기행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니다. 또 1부 앞의 몇 개 글을 읽으면 '장편(掌篇) 수필'로 여겨진다. 그것도 아니다. 어떤 글은 본격 수필의 영역에 속하기도 하고 시와 기도문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을 포스트모던 시대라고들 한다. 인터넷 강국을 자랑하는 우리는 스피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글도 긴 건 관심 밖이다. 짧은 문장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 받을 수 있는 글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유경호의 글은 이런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한다.
나는 이 책을 즉석에서 다 읽었다. 150쪽이 채 안 되는 부피 때문이 아니다. 단문(短文)에 진정성이 뒷받침되어 있는 울림이 큰 글이기 때문이다. 글의 생명은 진실성에 있다. 거기에 약자 사랑의 따뜻함이 농축되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아만자(암환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20대 초반에 아이를 낳아 평생 '자신의 삶'이 없었던 아버지가 암 세포의 공격을 받는다. 길지 않은 시한부 삶을 이어간다. 아들로서 그런 아버지를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고 위로하며 간병하고 있다.
지은이 유경호는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평범함 속에 감춰진 진주를 발견하려는 모습니다.
"이름날 업적도, 사회적 명망도 없는 필부요, 평범한 아버지이셨지만, 나(지은이)와 동생들에게는 귀한 아버지이셨기에, 그 평범하고도 특별한 이야기를 적어 보고자 합니다."(6쪽)
지은이는 탄탄한 문장력을 갖고 있다. 문학적 감성도 풍부하다. 다음과 같은 표현들에 눈길이 간다. "아침 식탁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오늘도 죽음의 세포들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부르는 노래였습니다"(39쪽). "그러면 아버지도 건강하셔서 다른 사람들 좀 섬기고 가셔야 하나님 앞에 면이 서지 않겠습니까?"(62쪽).
"아픈 아버지와 살아가느라 틀니도 많이 아팠나 봅니다"(64쪽). "심지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촛불은 불이 아닙니까? 말기 암 환자의 목숨은 존엄하지 않다는 말입니까?"(74쪽). "옆에 있는 누구라도 나를 안고 '토닥토닥' 한 번 해줬으면 하는 저녁이었습니다"(91쪽).
이 책을 시골에 있는 출판사에서 낸 첫 번째 책이라고 소개했다. 그렇다고 얕잡아 봐서는 큰 코 다친다. 중앙에 있는 유수의 출판사 책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글의 주인공인 아버지의 얼굴을 넣은 표지 띠지도 책을 한층 세련되이 보이게 만든다.
적재적소에 넣어 이해를 싱그럽게 만드는 삽화(박세영 작가), 평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들을 가지고 있는 13명의 독후감, 무엇보다도 오탈자 전무(全無), 완벽한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볼 때 지은이와 출판사의 정성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책이 양서이다.
이 책의 제목 "분해(分解)"는 프랑스 예수회 신부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성시 "분해"에서 따 왔다. "그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와 저를 하나님께로 데려가기 위해 조금씩 '분해'시키는 과정임을!"(106-107쪽).
지은이 유경호의 아버지는 이 육체 분해의 과정을 거쳐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육신의 분해를 제1의 죽음이라고 한다면 기억의 분해와 소멸을 제2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다며 이 글을 쓰고 책으로 남긴다고 했다.
부모와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좋은 아버지와 거기에 부응하는 자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꼭 이 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순정의 마음으로 겸손한 삶을 희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관계를 사랑으로 맺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필독서이다.
유경호는 목회자다. 그의 글 곳곳에 주님에 대한 고백이 서려 있다. 그렇지만 글에서 목사 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다. 그리스도인은 말할 것 없겠거니와 믿지 않는 자가 읽어도 마음의 울림이 적지 않을 책이다. 독자 제현의 관심 속에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경구 하나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하면 좀 어색할는지. 전한(前漢)의 한영(韓嬰)이 시경(詩經)의 해설서로 지은 '한시외전(韓詩外傳)' 9권에 나오는 말이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공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