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나 3:1-10, 고린도전서 13:9-12, 요한복음 9:39-41 -
<J.J.>
눈은 마음의 창이요 거울이라고 합니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감성과 지성까지도 들여다보인다고 합니다. 어떻게 탁구공만한 크기의 작은 눈에 인간의 마음이 들어 있을까요? 의학적으로 보면 눈은 뇌의 연장입니다.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며 뇌의 일부가 밀려나와 생긴 것이 바로 눈입니다. 그래서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눈을 가지고 '밝게' 보길 원합니다. '확실히' 보길 원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눈은 0.1mm 이하의 물체는 보지 못합니다. 만약 눈의 해상력이 현재의 100배~1000배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공기 중 떠다니는 각종 먼지와 세균, 그리고 냉면 국물에 떠있는 대장균까지 다 보여 맘 놓고 숨을 쉴 수도, 맛나게 음식을 먹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눈이 곤충의 더듬이 수준으로 낮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저기 부딪혀 우리의 몸에서는 시퍼런 멍이 떠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밝지도, 지나치게 어둡지도 않은 눈을 주신 창조주의 섭리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 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모든 물체를 '거꾸로' 보고 있는데 '바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외부에서 들어온 빛은 투명한 수정체를 지나면서 뒤집혀 망막에 맺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물을 똑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구나무를 한번 서보십시오. 그 때 보이는 세계가 실제 우리의 망막에 맺히는 세계입니다. '똑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거꾸로' 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눈에 관해 중요한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지나치게 신뢰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한국인들처럼 '보는' 것을 거의 모든 것으로 간주하는 민족도 드문 것 같습니다. 한국말을 살펴보면 '보다'가 참 많습니다. 살아'보다,' 늙어'보다,' 아파'보다,' 죽어'보다' 등 인간의 생로병사도 모두 '보다' 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먹어'보다,' 입어'보다,' 자'보다' 등 일상의 전반도 '보다'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들어'보다,' 냄새 맡아'보다,' 맛'보다' 등 심지어 다른 감각의 기능까지도 모두 '보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많이 속고 살아서인가 봅니다.(여기도 '봅니다' 입니다.)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든가 봅니다. (또 '봅니다' 입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는 것을 중시하다보니 우리 민족은 자연히 감성이 풍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끈끈한 정과 예술적 감성이 풍부해졌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논쟁을 하다가도 '글세, 내가 봤다니까!' 이 한 마디면 논쟁이 끝납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보고' 난 이후에 그것을 절대화하여 그 외 다른 것들에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가 - 기독교를 포함하여 - 배타적인 근본주의로 흐르는 현상이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실성,'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곧 '배타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요한복음 9장에는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 연못에서 씻게 하니 그의 눈이 '밝아졌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도무지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예수'라는 사람이 일으켰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눈멀었던 사람을 두 번이나 불러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에 그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압박합니다. 거절하자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 사람의 제자지만 우리의 모세의 제자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 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입니다. 아마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39절). 바리새인들이 당연히 발끈했습니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40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차라리)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확실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41절). '너희가 지금 확실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무슨 말씀일까요?
지금 예수께서는 세상을 '확실히'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만이 세상을 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준 율법에 따라 무엇이 '정결한'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 것인지 자기들만이 구별할 줄 아는 눈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들 방식대로 세상을 보아야만 한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나면서부터 눈멀었던 사람이 기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눈으로 자기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과 같이 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논쟁을 벌이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지금까지 끈질기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당신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를 확증하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실성'을 눈으로 보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 표적을 보여주기만 하면 그 나라를 받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이미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경계하라"(마태 6:12).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성서의 누룩을 좋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좋지 못한 성향'을 가리키실 때 이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즉 그들의 '좋지 못한 성향'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확실히 보여주면 믿겠다는 요구였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든지, 천사가 눈에 나타난다든지 하는 식의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자기들에게 익숙한 말로 설명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습관과 전통에 친숙한 이미지로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들이 이미 알고 있는 '기존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었습니다. 낯선 것은 익숙한 것으로 번역되어야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그것이 예수께서 경계하라고 가르치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확실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너희 방식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려 하니 너희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너희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려 하니 너희에게는 구원이 없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이사야 55:8-9, 새번역). 이사야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 위를 삽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우리의 생각대로, 땅의 방식대로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행동하실 거라는 착각과 또 그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시대의 요나라는 인물도 예외가 아니었나 봅니다.
구약성서에 요나서가 있습니다. 분량이 두 쪽밖에 안 되는데, 알고 있으면 이보다 더 코믹한 책이 없습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니느웨라는 이방인들의 큰 도시에 가서 회개하라고 외치라 명령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배를 타고 니느웨의 반대편으로 도망칩니다. 그 배는 큰 풍랑을 만나고, 그것이 자기 탓임을 안 요나는 선원들에게 자신을 바닷물로 던져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준비해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합니다.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낸 요나는 니느웨 쪽 뭍에 뱉어집니다. 결국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회개를 선포합니다.
요나는 내심 니느웨성이 멸망당하기를 바랐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그 성이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구원하신다는 그의 편협한 선민사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안했습니다. 혹시라도 그 이방인들이 회개하라는 자신의 말을 듣고 진짜로 회개할까봐 였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니느웨 반대편으로 달아났던 것입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억지로 하나님에게 떠밀려 니느웨에 가기는 했지만 그는 정말로 그 성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3:3)을 딱 한 번 통과하면서 아주 무성의하게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3:4)고 한마디 외쳤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무성의한 말 한마디를 듣고 성서를 보니까 니느웨 백성들 전부가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고"(3:5) 회개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소문이 왕에게까지 전해지니, 그도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 이렇게 명령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3:8-9).
결국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닥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니느웨인들이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자신의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 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신 것입니다(3:10). 요나의 염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는 극도로 못마땅하고 화가 났습니다(4:1). 그래서 신속히 행동을 취합니다. 그는 니느웨성 밖에 나가 그 성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을 내려 그 도성을 멸망시키는 것을 보기 전에는 결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연좌농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문자로 기록된 첫 번째 연좌농성, 그것도 신 앞에서의 연좌농성입니다. 요나가 이렇게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다시스[스페인]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4:2). 이윽고 요나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3). 그는 지금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하나님과 담판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박 넝쿨을 자라게 하여 그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십시오. 하지만 다음날 일부러 그 박 넝쿨을 죽게 하십니다. 찌는 더위에 화가 난 요나는 '그까짓 그늘이 뭐가 아까워 거두어 가냐'며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다시 한 번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이들을]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 귀환한 유대사회가 극단적인 순혈주의와 선민사상에 빠져있을 때 이를 꾸짖으며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 그리고 구원을 증언한 책입니다.
요나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에 감염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언어와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과 행동을 재단(裁斷)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확실성'의 노예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선민은 구원하고 이방인은 기계적으로 심판하는 결정론자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신 앞에서의 농성을 통해 발견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뜻도 돌이켜 이방인도 구원하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셨습니다.
'확실성,'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투명하지 않은 이 세상을 투명하게 비추어주는 어떤 색안경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더욱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불투명한 이 세상을 환히 보여주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은 참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확실성,'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 진리를 가로막는 '배타성'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독일의 과학자들이 땅속 50미터를 파고 들어가 작은 구리조각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독일정부는 이렇게 확신에 찬 발표를 합니다. '고대 독일인들은 2만5천 년 전에 이미 전국적인 전화망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영국정부가 발끈했습니다. 영국정부는 과학자들에게 더 깊이 땅을 파볼 것을 종용했습니다. 1백 미터 깊이에서 영국의 과학자들은 조그만 유리조각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기쁨에 찬 영국정부가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고대 영국인들은 3만 5천 년 전에 이미 전국적인 광통신망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일랜드 과학자들이 격노했습니다. 그들은 땅속 2백 미터까지 파고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찬 발표를 합니다. '고대 아일랜드 사람들은 5만5천 년 전에 이미 휴대전화를 갖고 있었다.'
'확실성,'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신앙은 물론 확신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간편하고 부담 없는 확신이어야 잘 '팔린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방식에 익숙한 것이라야 잘 '사간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구원을 이야기하셨지만 '예수천당,' '예수축복'이면 충분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순례의 길을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을 믿어라. 그러나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은 의심하라"(Believe those who are seeking the truth; doubt those who find it). 조지 버나드 쇼도 이렇게 말합니다: "가짜 지식을 조심하라. 그것은 무지보다 더 위험하다"(Beware of false knowledge; it is more dangerous than ignorance). 토머스 제퍼슨도 비슷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무지가 과오보다는 낫다. 그릇된 것을 믿는 자보다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자가 진리에 더 가깝다"(Ignorance is preferable to error; and he/she is less remote from the truth who believes nothing than he/she now believes what is wrong). 무엇보다도 성서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전 8:2).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보통 큰 빛, 확실한 빛, 의심 없이 믿어지고 틀림없이 문제가 해결될 그러한 커다란 빛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희미한 빛, 아주 작은 빛으로 다가 오십니다. 그것이 아주 작고 희미해서 자칫 그 빛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9-11, 새번역).
언젠가 한 방송사에서 '존재의 소리'라는 프로그램을 방연한 적이 있습니다. 산과 들, 바닷가를 무대 삼아 계절별로 일어나는 생태계의 움직임을 소리에 담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런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노루가 풀 뜯는 소리, 실베짱이 우는 소리, 기러기 떼 소리, 그리고 눈 내리는 소리... 아무리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그 프로그램은 대형 집음기로 잡아냈습니다. 지금까지 영상에만 의존하던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소리로 넓힌 작품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 제작자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아무리 큰 소리도 신경을 쏟지 않으면 들리지 않고, 아무리 작은 소리도 들으려는 사람에겐 들리더군요."
참 빛이 오셨습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우리 모두를 비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보려는 마음입니다. 믿음은 들으려는 마음입니다. 보려 애쓰는 마음이고 들으려 애쓰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만 듣지 않고, 진리의 말씀과 생명의 빛을 애써 보려는 열린 눈과 귀가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럿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그분을 떠나갑니다. 그런데 떠나가는 군중을 예수님은 전혀 붙잡지 않으십니다. 대신 제자들에게 이렇게 한마디 툭 던지십니다. "너희도 떠나가려느냐?"(요한 6:67) 예수께서는 그들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쉬운 것을 찾는 무리, 편한 것을 추구하는 무리, 익숙한 것에서 한발작도 나아가지 않는 무리,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무리를 그 분은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게 하셨습니다. 대신 그 분은 창조적인 사람들을 키우셨습니다. 변화의 고통을 감내하려는 자들을 길러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의 세계와 교회는 다시 이런 창조적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수가 가지 않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 아직도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한국 속담에 주저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분들께 한 예화를 말씀드리며 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부임했습니다. 험한 정글을 오가며 부락을 찾아다녀야 하는데 도무지 불안하여 현재 안내인 한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안내인에게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아무리 따라가도 길이 아닌 곳만 골라 가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물었습니다. '길을 아는 거요, 모르는 거요?' 그러나 안내인이 말합니다. '허허, 선교사님 정글에는 길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곧 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정글과 같은 우리의 삶, 불확실성과 위기로 가득한 이 시대에는 길이 따로 없습니다. 그냥 주저앉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길을 만들며 나아가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앞서 가시는데 그 길이 어렵다고 떠나시겠습니까? 그 분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곧 길입니다. 그 분이 바로 길입니다. 그를 따라 가십시다. 아멘. <S.D.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