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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낯설지 않는 하나님의 얼굴

2017년 7월 16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욥19:21-29

[너희는 내 친구들이니, 나를 너무 구박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이 손으로 나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너희마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나를 핍박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 아,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으면!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 나는 너희가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고 있다. 너희는 내게 고통을 줄 궁리만 하고 있다. 너희는 나를 칠 구실만 찾고 있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칼을 두려워해야 한다. 칼은 바로 죄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분노다. 너희는, 심판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설교문

* 땅에 머무시는 주님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엉뚱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요?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여 저 푸른 창공이나 그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을 다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도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노자의 말도 비슷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민수기는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라"(민35:34)는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이 은유인 것처럼 하나님이 땅에 머무신다는 말도 일종의 은유입니다. 성서 기자들이 하나님이 땅에 머무신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땅에서 산다면 경거망동할 수 없습니다. 조심조심,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요 며칠 여러 가지 사건들이 우리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습니다. 과로에 시달리다가 분신한 집배원 이야기, 졸음 운전을 하다가 대형사고를 일으킨 버스 기사들, 어느 유력한 제약회사 회장의 갑질 막말, 게다가 정치인들의 막말. '을들'의 비애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이언주 의원은 학교 급식을 위해 수고하는 조리사들을 가리켜 '그냥 밥하는 동네 아줌마'라고 말했고, 파업 노동자들을 가리켜 '미친 X'라고 욕했습니다. 그 폭력적인 말을 들은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노동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다른 이들도 마치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을 겁니다. 왜 이런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것일까요?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 속에 깃든 뿌리 깊은 차별 혹은 계급의식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와 생각과 입장이 다르다고 하여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모욕을 고스란히 당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 두려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 친구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흠 없이 정직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던 사람 욥에게 닥쳐온 불행은 그 자체로 미스테리입니다. 삶은 가끔 이렇게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우리를 잡아채기도 합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은 데 이어, 악성 피부병까지 그를 괴롭혔습니다. 욥은 쓰나미처럼 닥쳐온 불행 앞에서 말을 잊었습니다. 슬픔이 지극하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법입니다. 욥의 말문이 열린 것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친구들 덕분이었습니다. 욥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불행도 없었을 거라며 탄식합니다. 그것은 현실로 복귀하기 위한 일종의 애도 의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의 푸념을 즉시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면서, 욥을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겪고 있는 모든 불행은 까닭없이 닥쳐온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정당한 보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의 이런 입장은 몇 차례의 논쟁을 거치면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욥은 부질없는 말, 온기 없는 말에 지쳤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위로자가 아니라 고통을 심화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욥은 애원하듯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 친구들이니, 나를 너무 구박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이 손으로 나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너희마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나를 핍박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21-22)

'어찌하여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듯이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구절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보다 더 괴로운 것은 변덕스러운 친구들의 우정입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E 106-43)는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는 벗들의 우정이 꼭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 간의 상호 선의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는 삶이 어떻게, 엔니우스의 말처럼, 살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자네가 마치 자네 자신과 말하듯 무엇이든 마음껏 더불어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갖는다는 것만큼 감미로운 일이 또 있겠는가? 자네가 번영을 누릴 때 자네 못지않게 그것을 기뻐해줄 누군가가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겠는가? 자네 자신보다도 더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다면 불운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된다네."(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숲, p. 117-118)

무엇이든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서로 선의를 가지고 바라보아 주기도 하고,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희덕의 시 '산속에서'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시인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시인은 산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어둑어둑해지는 산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시인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임을, 저 멀리 보이는 불빛 하나가 계속 걸어갈 힘이 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길을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모든 길 잃은 사람들을 찾는 불빛이고, 모든 외로운 이들이 마주잡을 손이십니다.

욥은 길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금 욥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비난하는 친구들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무 뿌리를 뽑듯이 그의 희망을 뿌리째 뽑아 버리시자, 그렇게 다정하게 굴던 사람들도 다 싸늘하게 등을 돌렸습니다. "나를 아는 이들마다, 낯선 사람이 되어 버렸다. 친척들도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구들도 나를 잊었다"(19:13-14). 나그네는 물론 종들까지도 그를 '없는 사람'(non-being)으로 취급했습니다. 냉랭함과 고독이 그를 괴롭혔고, 삶의 무의미성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 무의미의 심연을 넘어

그래서 그의 절규는 더욱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아,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으면!"(23-24)

세번씩이나 반복되는 '누가 있어'라는 표현은 그의 외로움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혼자입니다. 외로움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무의미성입니다. 자기의 괴로움과 무관하게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간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줍니다. 욥은 지금 자기의 절통한 사정이 망각의 강물을 따라 흘러가버릴까봐 두렵습니다. 무의미한 고통처럼 견디기 어려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는 욥과 같은 이들이 참 많습니다.

역사는 대개 승리자들의 기록입니다. 오늘 누가 힘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과거는 달리 해석되곤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강자들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의 피라미드 체제의 맨 밑바닥에서 살아가던 이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 말씀을 자꾸 읽고 묵상하는 까닭은 약자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은 성경을 지배자의 관점이 아니라, 민중 그리고 여성의 눈으로 읽자고 제안합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텍스트는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줍니다.

욥은 지금은 자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언젠가 때가 이르면 자기의 억울한 이야기가 경청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희망을 품고 시련의 시간을 견디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힘겹더라도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류 사회에 의해 불온시되는 사람들, 꺼림의 대상이 된 사람들, 멸시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사상가인 파커 J. 파머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상대방을 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적대감이 점점 늘어나는 까닭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경계선을 허물고, 낯선 이들에게 다가서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세상은 한결 안전한 곳이 됩니다. 파커 파머는 종교적 신념이 때로는 모든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신념을 '적'에게 돌처럼 던지는 대신 고통의 근원을 서로 나눌 때, 우리는 마음을 열고 커다란 분리를 연결하는 통로를 찾을 수 있다."(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2-12년 3월 26일, p.37, 38)

욥의 친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욥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릇된 확신 때문에 그들은 공감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욥은 철저히 외롭습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전환이 일어납니다. 외로움은 욥을 새로운 확신으로 인도합니다.

* 하나님을 뵈올 날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25-27)

이것은 그야말로 절망의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은 마치 공허와 혼돈과 흑암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처럼 찬란합니다. 16장 19절에서 욥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내 증인', '내 변호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원자'라고 뚜렷하게 말합니다. 구원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엘'입니다. 레위기의 성결법전은 어떤 사람이 빚에 몰려 종으로 팔려가면 그의 살붙이 가운데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여 빚이나 몸값을 지불하여 속량해주어야 했습니다(레25:39-50). 그런 의무를 진 사람을 일러 '고엘'이라 했습니다. 대속의 개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자기의 고엘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깊은 신뢰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의 이유는 다 헤아릴 길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시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욥은 확신합니다. 살갗이 다 썩은 후에라도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는 말은 얼마나 강력합니까? 지금 하나님은 그에게 낯선 분처럼 되셨지만,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도 시련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주님과 같은 분이 누굽니까? 주님은 약한 사람을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며, 가난한 사람과 억압을 받는 사람을 약탈하는 자들에게서 건지십니다. 이것은 나의 뼈 속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시35:10)

비록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지만, 약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칠 수 없다는 것이 시인의 확신입니다. 그는 그런 확신이 자기 뼈 속에 새겨졌다고 말합니다. 덧거친 세상에서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확신이 필요합니다.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지금 고통 당하고 있는 이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이들은 하나님의 엄한 추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대변자가 될 때 기뻐하시는 게 아니라, 형제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쓸 때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가장 약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주님을 외면하지 않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진한 jhkim@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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