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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火)

2017년 7월 23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채수일 목사

성경본문

잠언 12:16

미련한 사람은 쉽게 화를 내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모욕을 참는다.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 5:21-22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설교문

chaesuil
(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1. 연령층에 관계없이 한국인 10명 가운데 1명이 걸리는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화병'이라고 합니다. 화병에 걸리면 뇌졸중, 부정맥에 걸리고, 면역력이 떨어지고 호르몬과 자율신경계 균형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화병이 한국인 특유의 질병으로 알려져 영어로 HWABYUNG으로 표기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한국인이 급하고 화를 잘 낸다고 해도 화는 한국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보편적 특성이 아닐까요? 평생을 '화'를 연구한 로버트 서먼은 '화'가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도 드러나는데, 테러와 전쟁이 그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조직화된 화'라면, 테러는 '정치적으로 조직된 화'라는 것이지요.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화'가 얼마나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지는, 세계의 종교들이 모두 '화'를 문제 삼고 있다는데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화'를 지옥에 떨어질 대죄로 여겼고, 불교도 시기, 절망, 미움, 두려움 등 우리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독들을 하나로 묶어 '화'로 규정했습니다.

웹스터 사전(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에 따르면 '화'는 '불쾌함을 강력히 표시하는 격정 혹은 감정, 그리고 적대감이며, 일반적으로 상처나 모욕감으로 인해 일어난다. 동의어로는 격노(ire), 격분(rage), 광분(fury), 분개(indignation), 분노(wrath) 등이 있다. 이 단어들은 격렬한 불쾌함으로 야기되는 감정적 흥분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화'는 상처를 받거나 모독을 받을 때 불쾌함을 강력하게 표시하는 감정이나 적대감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화'가 꼭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화'를 아주 정상적인 마음의 반응이며 정신적 태도라고 생각하면서, '화'가 두려움을 쫓아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는 것들을 처리할 자신감을 가져다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특히 '공분'은 사회변혁의 원동력이 되기고 합니다. '화'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지만, 마땅히 '화'를 내야할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요.

성서도 '화'를 꼭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에 서서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화'를 내시는 처벌자이자 심판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성전 앞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격분하시어 채찍을 휘두르셨습니다. 또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말씀하셨습니다.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책망하면서 '화있을진저 고라신아, 화있을진저 벳새다야'(마태 11,20-21)라고 외쳤습니다. 또 눈 멀고 말 못하는 병자들을 고치신 것을 예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고친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마태 12,34)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아무튼 '화' 자체는 그 원인과 대상, 폭발하는 형태에 따라서 성격이 규정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화는 불과 같아서, 화를 내는 나 자신을 태우고, 화를 불러일으킨 다른 사람도 태울 때'입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때로는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칫 자신과 타인을 같이 태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그래서 신경의학이나 상담학, 종교들도 저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 혹은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붓다는 화를 다스리는 유용한 도구들을 전해주었는데, '의식적인 호흡', '의식적으로 걷기', '화를 끌어안기', '그와 나의 내면과 대화하기' 등이 그것입니다. 베트남 출신 승려이자 시인, 평화 운동가이고,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명상센터 '플럼 빌리지'를 세운 틱낫한 스님은 우리가 '눈과 귀와 의식을 통해서 화를 우리 몸 안에 받아들이고, 음식을 통해서 화를 먹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적게 먹는 법', '보행명상', '성난 얼굴, 거울에 비춰보기', '애써 태연한 척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 등 구체적으로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화'를 극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산상설교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예수님은 '화'(angry/Zorn)를 '살인'(murder/toeten)과 같은 '심판받을 죄'와 동일하게 규정하십니다. 심지어는 형제에게 '라카'(Raca/Nichtsnutz/얼간이/쓸모없는 놈)라고 말하는 자는 공의회에 끌려가게 되고, '바보'(fool/gottloser Narr/머저리/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하는 바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 불 속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어떻게 '화'가 '살인죄'와 동일시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형제자매에게 '얼간이', '바보'같은 놈이라고 욕 좀 한 것이 어떻게 재판정에 끌려갈 일이란 말입니까? 물론 요즘 같으면 이른바 '명예훼손죄'가 있으니 이 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아니 그런 욕 좀 한 것이 '지옥 불에 들어갈' 정도의 일이라는 말씀은 정말 너무한 것이 아닐까요? 도대체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예수님은 '화'를 '살인'과 동격으로 놓으심으로써, 생명파괴의 뿌리가 분노임을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살인이라는 '행동'의 근원에는 '화'를 내는 '감정'이 있고, 이 감정은 성을 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살인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간음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태 5,28)고 말씀하심으로써 드러난 인간적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의 밑바닥에 있는 '마음'을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자를 음욕을 품고 보지 않는 남자가 많이 있겠지만, 만일 '마음의 간음'까지 처벌하는 실정법이 있다면, 과연 우리 가운데 살아남을 남자가 몇 명이나 될까요? 오해를 많이 불러일으킨 이 말씀은 여성을 사랑의 파트너가 아니라, 위험한 물건으로 여겼던 유대 사회의 가부장주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위험하기 때문에 당시 경건한 남자는 여자가 가까이 오면 눈을 감아 버렸다고 합니다. 죄를 범하기보다는 길바닥에 넘어지는 것을 택한 것이지요. 인사는커녕 악수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사회의 혼인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독신자나 비유대인과 성적 관계를 맺으면 간음하는 것이지만, 결혼한 남자가 같은 일을 하면 간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남자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간음을 경계하는 곳에서도 여성의 권리가 문제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위험성이 문제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간음을 문제 삼음으로써 여자에 대한 인간적 눈길을 경고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와 삶 자체를 침범하려는 탐욕스러운 눈길, 곧 가부장적 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르침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율법은 오직 드러난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제약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위 이전에 행위의 근거가 되는 '마음'을 보게 하심으로써, 오직 드러난 행위에 따라 자신을 의롭다고 평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오만함, 드러난 행위에 따라 타인, 특히 병자와 여성, 어린이, 이방인 등 사회적 약자를 죄인이라고 규정하여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유대 사회체제를 동시에 성찰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생각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태복음 15,11)이고,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데', 이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라는 말씀으로 뒷받침됩니다(마태복음 15,18-19).

물론 이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까지 규제하고 다스리는 법(율법)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법이 있다면 아마 우리 가운데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마지막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노하는 마음'도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고, 형제자매에게 '쓸모없는 놈', '하나님을 모르는 바보'라고 욕한 사람들도 심판을 받거나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쓸모없는 놈', '하나님을 모르는 바보'라는 비난은 누가, 누구에게 한 것일까요? 유대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은 여자, 어린이, 병자였고, '하나님을 모르는 바보'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런 비난을 한 사람들은 자신을 쓸모 있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유대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대에 서게 될 사람들,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물으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행위 이전에 행위의 근거가 되는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제자들을 세움으로써, 제자들의 의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커야 한다고 요청하셨습니다(마태 5,20). 예수님은 '이같이 한 즉,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마태 5,45)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면 '화'를 극복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과 행위가 마침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도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는 것에 윤리적 기준을 두라고 요청받은 것입니다. 모든 율법적 행위 혹은 마음의 완성은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는 것',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온전함', '거룩함'은 윤리적 완전성, 무결함이 아니라, '구별됨'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이라는 단서는 이 구별이 '수평적 구별'이 아니라, '수직적 구별' 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구별하여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윤리적으로 흠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들은 성(聖)과 속(俗)을 구별하여 사람들을 차별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어깨 높이에서, 수평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여, 자기보다 낮은 사람은 쓸모없는 놈들이라고 경멸하고,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아부하거나, 하나님을 모르는 바보라고 경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을 '수직적으로 구별'하도록, 하나님처럼 온전하라고 요청받습니다. '수직적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여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잠재력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온전하라'고 할 때 쓰인 '텔레이오스'(teleios)라는 형용사는 '텔로스'(telos: 끝, 성취, 완성, 종말)에서 유래된 말로, '구분하지 않고, 나누지 않는 전체성', 곧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거나,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데서 자신의 우월성을 찾지 않습니다. '화'라는 것도 결국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다름을 참을 수 없고, 긍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를 참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처럼 온전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또 실패해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힘입어 끊임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가면 언젠가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용납과 무한한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용서하지 못할 자신과 타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안에서 끊임없이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면 죄인인 우리의 의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보다 더 크다는 것, '마음'이 '율법'보다 더 크다는 것,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우리의 힘든 현실보다 더 크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여전히 죄인인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증거 하실 것입니다.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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