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 베데스다 연못에서 기적 설화, 자율 타율 신률의 변증법
-요한 복음서 5장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①지난 30년동안 북미주 신학계에서 큰 논쟁을 일으켰던 학문적 담론을 <역사적 예수연구> 라고 부른다. <역사적 예수연구>란 초대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시킨 타원의 두 초점같은 것 을 밝히려는 것이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 모습>과 <부활절 이후 그리스도 고백>의 불가분리성을 인정하면서도 전자 곧 <부활절 이전의 역사적 인물, 유대인의 랍비>로서 예수연구를 먼저 철저히 하자는 취지였다. 그 후라야 메시야 그리스도(말씀의 화육자, 중보자 예수, 하나님의 아들등등) 신앙적 대상으로서 고백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② 역사적 예수 연구학자 마커스 보그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의 진면목은 '유대교 신비가'(Juwish mystic) 로서 당시 유대민중에게 받아드려졌으며, '유대교 신비가'로서 예수의 정체성을 다음 5가지 특징으로 정리했다: 영의 사람( Spirit person), 치병자(healer), 지혜교사(wisdom teacher), 사회적 예언자(social prophet), 운동의 선구자(movement initiator)가 그 것이다. 예수는 이 다섯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그는 당시 기존 종교권력체계와 정치체계에 의해 결국 희생당하게 된다.
③ 오늘 요한 복음5장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일어난 치병설화는 '치병자'로서 예수의 권능을 부각시키면서 전통유대교와 전통 자기 수양적 도덕종교 운동을 동시에 넘어서는 예수메시야 운동의 본질을 증언하려는 것이다.
④ 요한복음 5장의 본문은 두가지 중요한 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첫째, 기적적 치병사건이 어떻게 과학시대에도 가능하며, 그 때 자율 타율 신률의 변증법은 무엇인가? 둘째, 유대인 신비가 예수는 왜, 어떤 점에서 비슷한 수많은 유대신비가들을 능가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으며, 새로운 그리스도교 탄생의 '창조적 새로움'의 원천이 되었는가?
[2] 베데스다 기적 설화 강해에서 본 자율, 타율, 신률의 변증법
① 요 5:1-3.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있는 양문(羊門)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저는 사람, 혈기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니...
◈ 베데스다 못가에서 일어나는 기적설화를 증언하는 도입부문이다. <베데스다, Bethesda>는 히브리어 어원에서 파생된 말이며 <흐르는 물, 혹은 용천수가> 있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羊門> 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도시에로 진입하는 여러개 문들 중에서 가축 특히 제사용 혹은 도살하여 식품으로 사용할 양떼들이 들고나던 문을 말한다.
◈ 행각다섯이란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광선 가리우는 지붕있는 전각을 말한다. 많은 장애인들과 병자들이 자리를 펴고 기다리는 곳이었다. 행각다섯은 실재적 행각수량을 지시하면서도 동시에 간접적으로 모세오경이 상징하는 유대교의 한계를 암시한다. 마치 사마리아 수가샘터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지난세월 살았던 "다섯남편"의 간접적 상징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② 요5: 4-6.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 특별한 치유효과가 있다고 믿는 '기적의 샘'에 불치의 환자들이 모이는 사례는 굳이 제1세기 예수시대에 국한 된 현상은 아니다. 예들면, 프랑스 피레네 산맥의 시골마을 '로르드 샘'은 1858년 성녀로 추대된 베르나데르가 성모마리아의 현현체험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에 있는 샘인데, 카토릭교인들의 성지순례로 될만큼 유명하고, 수백만명이 다녀가고 수많은 사람들의 기적적 치유증거물이 전시되 있기도 하다.
◈ '기적의 샘' 효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학적으로 샘물의 성분 분석으로서 그 이유를 설명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네랄리 풍부하거나 활성산소나 수소성분이 평균치보다 더 많이 함유되어있다는 조사가 있지만, 기적을 물리화학적 성분분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잘못이다. 핵심은 인간존재가 <身心靈 복합체적 존재자>라는 점에 있고, 사건이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실재의 패러다임'은 근현대물리화학적 '인과율법칙'에 갇혀있지 않는 <열려진 실재>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③ 요5:6-9. 예수께서 그 누운것을 보시고 병이 벌서 오래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 38년된 환자의 원망과 타성은 그의 삶의 일부가 되고, 자율적으로 일어서려는 의지와 자아확신을 잃은지 오래다. "낫고자 진정 원하는 것이냐?". 환자는 '자율적'(自律的, autonomous)힘과 자기의지 로서 낫기를 포기한체, '타율적'(他律的, heteronomous) 힘이 자기를 지배하여 기적이 자기몸에 발생하기를 바란다. 예수의 치병기적설화는 환자의 의지와 간절한 염원과 믿음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자율(自律)과 타율(他律)이 동시에 극복되는 신율(神律, theonomy))의 상태에서 기적치유를 행사하였다.
신률이란 자율과 타율이 동시에 살아나는 자기초월의 은총체험이다. 기독교의 은총체험은 신률적 체험이다. 100% 인간의 의지와 결단이 요청되고 참여하면서도 100% "내 힘과 의지가 아닌 은총의 능력"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역설적 체험이라고 볼수 있다. 음악적 관현악의 조화음과도 같다.
④ 요 5:10-16. ...(16절)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7-18절)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위 본문에 따르면, 예수와 당시 유대교 권위(유대교 당국자)와의 충돌 혹은 갈등의 이유는 두가지 였다. 그 하나는, 유대교의 신성한 전통(안식일법 준수는 그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을 무시하거나 뒤집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신성불가침한 절대적 하나님을 마치 인간 가족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너무 가깝게, 너무 다정하게, 너무 긴밀하게 함부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두가지는 결국 <예수는 신성모독자>라는 것이다.
◈ 유대교 당국이 자기에게 퍼붓는 적대감과 비판에 대하여 예수의 입장은 전혀다른 관점을 보여주었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첫째, 유대교의 거룩한 종교전통의 권위는 본래성을 잃고 뒤틀리고 변질되어 도리혀 사람을 옥죄이고 죽이는 역기능을 하고 있으므로, 자기는 그 율법을 <정상적인, 본래적 의미> 에로 돌려놓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안식일 이해가 그 대표적 논쟁이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입장이다. 둘째, 하나님을 신성불가침한 권위적 타자로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외하는 맘으로 대해야 하지만, 두려운 폭군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이시므로, 가정에서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사랑하는 맘으로 자녀가 가까이 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3]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존재(being)가 행위(doing)를 낳는가 아니면 행위가 존재를 결정하는가?
① 신약성경 전체는 한가지점에서 공통목적을 지닌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갈릴리 예수, 그들가운데서 33년 살고간 역사적 예수가 메시야(그리스도, 구세주, 세상을 구원하는자)라는 고백적 주장이요 증언이다. 왜 그런 고백과 증언을 하는가? 그에 증언의 신앙적 담론을 학문적으로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른다.
② 초대 교회 공동체안에 크게보면 두가지 흐름이 있었다.
(A) 아래서 위로 그리스도론 :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입장: 영-그리스도론(pneuma-christology)
* 대표적 증언은 베드로의 처음설교(첫 케류그마, 사도행전 2:22-36)에 나타난다. 역사적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능력을 받아 각종 선한일을 행했고 그를 메시야로 삼아세웠다.
(B) 위에서 아래로 그리스도론 :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의 입장: 로고스-그리스도론(Logos christology)
* 대표적 증언은 빌립보서 2장에 나타난 '그리스도찬가'이다. "예수 그는 근본 하나님가 같은 본체이셨으나, 자기를 비워 사람같이 되셨고, 고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세주로 높임을 받게되었다.
③ 요한복음 5장에서 증언하는 요한신앙공동체 입장은 무엇인가? 로고스 그리스도론을 기본입장으로 바탕에 지니면서도 영그리스도론을 동시에 통섭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 로고스 그리스도론의 입장의 증언: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수 었나니(5:19절) /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심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었었고...(24절) /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하므로 내 심판을 의로우니라(30절)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43절)
* 영 그리스도론의 입장의 증언 :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주사 이루게하시는 역사(役事) 곧 내가하는 그 역사(役事)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37절)
④ 예수의 하나님체험의 특징:
예수에게서는 하나님(신성한 존재, the sacred)가 간접적인 믿음의 대상(the secondhand belief)이 아니라, 직접적 종교체험의 대상(firsthand religious experience)이었다. 그의 하나님 체험은 너무나 생생한 '체험적 실재'(experiential reality)였다. 그의 하나님과의 일치체험, 함께하시는 체험, 가까이 계시는 체험은 그에게 창조적 변혁의 능력을 주었고 세상을 세롭게 보는 눈을 주었다. 그 체험 때문에 예수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했고, 마치 하나님의 권위로 말하듯이 말했고 행동했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곧바로 하나님이라고(신격화)하기를 거부했고,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거나 가리우지 않았다. 자기를 투명한 렌즈기능처럼 비우고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흐르도록 도관(導管)처럼 하나님의 뜻과 사랑의 속성을 보여주었다.요한공동체는 그런 예수를 증언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