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열왕기상 3:10-12
주님께서는 솔로몬이 이렇게 청한 것이 마음에 드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스스로를 생각하여 오래 사는 것이나 부유한 것이나 원수갚는 것을 요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재판하는 데에, 듣고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을 요구하였으므로, 이제 나는 네 말대로,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준다. 너와 같은 사람이 너보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없을 것이다.
로마서 8:28-3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 13:44-46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설교문
1. 오래된 영화지만, 1959년에 킹 비더 감독이 만든 '솔로몬과 스바의 여왕'을 아직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율 브린너가 솔로몬 왕 역을,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스바의 여왕 역을 했지요. 영화는 솔로몬과 스바의 여왕을 성서와 역사가가 평가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열왕기상 10장 1절-13절과 역대지하 9장 1절-12절)에 따르면,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으로 그를 시험하여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찾아왔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온갖 것들을 다 물어보았는데, 솔로몬이 모든 물음에 척척 대답하자 넋을 잃었다고 합니다(역대지하 9,4). 감동한 스바의 여왕은 금 120달란트와 아주 많은 향료와 보석을 왕에게 선사하고 신하들과 함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고 간단히 보도합니다(역대지하 9,12).
그런데 역사가들은 스바의 여왕의 방문이 가졌던 경제적인 목적에 주목합니다. 아라비아 남부, 오늘의 동부 예멘에 위치한 스바(Sheba) 사람들은 원래 유목민이었는데, 낙타를 이용한 통상확대로 특산물인 조미료와 향료를 수출했습니다. 솔로몬의 해상 무역이 스바 사람들의 대상 무역과 경쟁하게 되자, 스바의 여왕이 자신의 이권을 확대하고, 당시 솔로몬 왕이 통제하고 있었던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솔로몬을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교류는 단지 지혜의 교환과 확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두 나라에게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킹 비더 감독은 영화 '솔로몬과 스바의 여왕'에서,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솔로몬을 '지혜의 군주'이자, '평화의 왕'으로 각색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솔로몬의 지혜가 돋보이는 배경을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나, 스바 여왕과의 로맨스, 또는 권력유지와 국가운영을 위한 솔로몬의 정치적 판단력에 두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은 오히려 전쟁터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아도니야 연합군에게 밀려 패배하기 직전, 솔로몬은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진군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을 역이용해서 반짝이는 방패로 태양빛을 반사시켜 적군을 전멸시킵니다.
두 번의 잔혹한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후, 냉전체제가 고착되어가는 1950년대 말의 현실을 반영한 것일까요? 헐리우드의 킹 비더 감독은 솔로몬이 지혜를 이용하여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를 이루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물론 지혜는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전장에서도 승리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포함합니다. 지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호크마'(chokma)도 '통전적인 이해력', '전문적 지식', '기술'을 의미합니다. 전쟁수행의 능력과 법적인 판단력, 통치능력, 외교능력뿐만 아니라, 옷 만들고 집 짓는 기술을 비롯한 생존 기술도 지혜, '호크마'입니다.
2. 솔로몬 왕(주전 971년-931년)도 막강한 정적들을 제거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보아, 이런 지혜를 갖춘 통치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솔로몬은 비록 다윗의 총애를 받은 밧세바의 아들이었지만,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희박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차례로 경쟁적 적대자들을 빠르고 잔혹하게 제거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왕상 2,46). 뛰어난 정치적 판단과 단호하고 신속한 행동으로 통치기반을 확고하게 한 것만이 그를 위대한 군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 후, 솔로몬은, 그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평화'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통치했고(왕상 11,42), 이스라엘을 역사상 가장 크게 번영시킨 군주였습니다.
솔로몬은 견고한 동맹, 특히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의 결속과 활발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부를 기반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화려한 궁전을 건축했습니다. 성전은 솔로몬 재위 제4년(주전 959년)에 시작하여, 칠 년 후에 완공되었고(왕상 6,37-38), 솔로몬의 궁은 건축하는 데 13년이 걸렸다니 그 호화로움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왕상 7,1). 또한 누구도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군사시설을 건설하고 병거 부대를 증강함으로써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고 침략을 예방했습니다(왕상 9,19; 10,26). 문화도 꽃을 피웠습니다. 음악과 지혜문학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잠언, 전도서, 아가서, 시편의 저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떨쳐, 스바의 여왕이 지혜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오게 한 현자(왕상 10,1-13), 성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재산에 있어서나, 지혜에 있어서나, 이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훨씬 뛰어난 왕'(왕상 10,23)이었습니다.
3. 그러나 솔로몬 왕국의 균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대규모 건설공사와 국가 행정은 큰 규모의 관료 제도를 필요로 했습니다. 지출은 늘어나는 반면 조공으로부터 생기는 수익은 늘지 않고, 무역 역조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선택은 과중한 세금과 국가노역에 강제로 백성을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왕상 9,15). 효과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행정구역을 12개로 재편했고, 각 구역은 일 년에 한 달씩 궁중의 식량을 공급해야 했습니다(왕상 4,7). 이런 조치는 백성의 원성을 샀습니다. 지파 동맹 형태의 결속과 하나님의 백성의 자유라는 전통을 기억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국가조직과 강제노역은 지파의 독립과 자유를 훼손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결과는 반란과 정치적 소동이었습니다. 에돔 출신의 왕손 하닷(왕상 11,14),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왕상 11,23), 그리고 여로보암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왕상 11,26-40). 선지자 아히야의 선동으로 시작된 반란은 진압되고 여로보암은 이집트로 망명하여 비록 소동은 가라앉았지만, 불만의 근본적인 원인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왕국의 균열은 혼인을 통한 외교정책에서도 강화되었습니다. 혼인을 통한 외교, 특히 이집트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아 이집트와의 관계와 국경이 안정되기는 했지만, 반대로 이방신 제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의 딸 외에도 솔로몬은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과 에돔 사람과 시돈 사람과 헷 사람에게서 많은 외국 여자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였고(왕상 11,1/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을 두었다고 함), 이방신 제의는 더욱 활발해졌습니다(왕상 11,3-8).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떠난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다른 신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당부하시지만, 솔로몬은 듣지 않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솔로몬의 아들 대에 이르러, 나라가 갈라질 것을 선언하십니다(왕상 11,12).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로, 솔로몬 사후(주전 922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재위 기간에 왕국은 분열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손에 넘어갔고, 남왕국 유다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남겨졌습니다. 남북으로 분열된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남 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주전 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4. 왕정체제의 강화로 자유로운 지파동맹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이방신 제의의 도입, 과중한 세금과 강제노역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고, 왕국 분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지혜로운 지도자였다는 평가에는 다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이 즉위 후, 기브온 산당에서 드린 첫 번째 기도가 '지혜를 구하는 기도'였다는 것도 그런 평가를 뒷받침 합니다: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큰 백성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왕상 3,8-9).
왕이 자신을 백성 가운데 하나로 고백하는 겸손함에 더해, 통치자로서 백성을 바르게 재판하기 위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는 솔로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다고 합니다(왕상 3,10). 그리고 지혜를 구한 솔로몬은 덤으로 부귀와 영화와 명예까지 얻습니다(왕상 3,11-13; 4,29-34).
솔로몬을 위대한 지혜의 지도자로 알린 유명한 재판 이야기는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창녀 두 사람이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하면서 왕에게 판단을 요청한 사건이 그것입니다. 두 여자가 거의 동시에 아기를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잠을 자다가 그만 잘못하여 아기를 깔아뭉개어 죽였는데, 자기가 깊이 잠든 사이에, 아이를 바꿔치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여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살아 있는 아기가 자기 아기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하던 솔로몬은 신하에게 칼을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 칼로 살아있는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나머지 반쪽은 다른 여자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한 여자는 '모정이 불타올라' 왕에게 '제발, 임금님,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어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안 될 테고, 네 아이도 안 될 테니, 차라리 나누어 가지자'하고 말했습니다.
자, 사태는 이제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누가 살아있는 아이의 진정한 엄마인지 분명해진 것이지요. 솔로몬은 '살아있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아이를 양보한 저 여자에게 주어라. 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다'(왕상 3,16-27)라고 명했고, 판결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왕이 재판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공정하게 판단한다는 것을 알고 왕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왕상 3,28).
그런데 솔로몬의 이 재판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입니다. 이 재판을 위대한 판결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지혜롭지 않은 재판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알기 쉬운 민법' 등 다양한 법률서의 저자인 최재천 변호사는 '아이를 두 어머니에게 안기거나 젖을 물려 반응을 살필 수도 있고, 주변 탐문을 통해 목격자를 찾거나 친척들의 진술을 듣는 방법도 있으며, 두 어머니가 1주일씩 번갈아 육아를 하는 조정안을 낼 수도 있을텐데, 칼로 아이를 자르는 벼랑 끝 방법을 선택한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떤 입장에서 판단하든, 그러나 저는 이 재판 이야기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재판의 배후에는 정의와 사랑 사이의 긴장이 있습니다. 만일 정의가 공평한 분배에서 실현된다고 생각한다면, 아기를 칼로 둘로 나누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지요. 그러면 정의는 실현될지 몰라도, 아기는 죽습니다. 한 여인은 어차피 내 아기가 아니니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정당화했겠지요. 왜냐하면 정의는 평등한 기회, 공정한 분배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다른 여인은 아기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정의를 포기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지요.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하고, 정의 없는 사랑은 무력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타인의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능력, 아니겠습니까!
5. 하나님의 지혜가 빛나는 재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지혜의 히브리어 뜻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번역성서'는 솔로몬이 '지혜로운 마음'을 구했다고 번역했는데, '해설판공동번역'은 '명석한 머리'로, 영어성경(NIV)은 '통찰력 있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discerning heart)으로, '수투트가르트 해설성경'은 '순종하는 마음'(ein gehorsames Herz)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뜻에 가장 가깝게 번역한 것은 '개역개정판'으로서, '듣는 마음'(ein hoerendes Herz)으로 번역했습니다. 지혜가 통찰력, 분별력, 명석함과 관계된 것도 사실이지만, 지혜는 '듣는 마음'(ein hoerendes Herz)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서, 탈무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입은 하나, 귀는 둘을 주신 이유는 말하는 것보다 두 배 들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한 '말이 입 속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그 말의 주인이지만, 입 밖으로 나간 후에는 자신이 그 말의 노예가 된다'는 말도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하라는 경고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이 위대한 것은, 그가 약한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정의보다 사랑, 죽음보다 생명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혜, '듣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지혜는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축적되고, 불러낼 수 있는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지식이나 총명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지혜문학과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성서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잠언 9,10; 1,7)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근본'으로 번역된 단어는 본래 '시작'(beginning/anfang)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슬기의 근본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다른 모든 지식에 통달하는 핵심이라거나,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거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 외에 세상 지식은 다 쓸모없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슬기의 '시작'이라는 것은 시간이나 질에서 첫째 되는 것, 출발점이지 종착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경외는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경외는 지혜, 곧 '듣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 그 놀라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결국 왕국이 분열되고 멸망의 길을 가게 된 것은, 그가 더 이상 '듣는 마음'으로서의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자기 백성의 외침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아니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니, 어찌 하나님의 말씀인들 귀에 들어왔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지요.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고. 그러나 천심 아닌 민심도 있습니다. 천심을 담은 민심도 있지만, 욕심, 악심, 수심, 탐심, 무지심, 군중심, 사행심 등 오히려 천심에 역행하는 민심도 있습니다. 게다가 민심은 하나가 아닙니다. 스스로 천심이라고 주장하는 민심이 언론매체 수만큼이나 많은 SNS시대, '거짓 뉴스'의 시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시대, 오만함과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는 시대, 종교마저 타락한 시대의 지혜, 그것은 '천심인 민심'과 '천심이 아닌 민심', '민심인 천심'과 '민심이 아닌 천심'을 분별하는 지혜일터인데, 이런 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의 소리를 함께 들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