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느9:32-38
[우리 하나님, 위대하고 강하고 두렵고, 한 번 세운 언약은 성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 앗시리아의 왕들이 쳐들어온 날로부터 이 날까지, 우리가 겪은 환난을, 우리의 왕들과 대신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조상들과 주님의 모든 백성이 겪은 이 환난을 작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이 닥쳐왔지만, 이것은 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은 우리가 저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셨습니다. 우리의 왕들과 대신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은 주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타이르시는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세우고 주님께서 베푸신 큰 복을 누리면서도, 눈 앞에 펼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에 살면서도, 주님을 섬기지도 않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오늘 이처럼 우리는 종살이를 합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좋은 과일과 곡식을 먹고 살라고 우리 조상에게 주신 바로 그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습니다. 땅에서 나는 풍성한 소출은, 우리의 죄를 벌하시려고 세운 이방 왕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 왕들은 우리의 몸뚱이도, 우리의 가축도, 마음대로 부립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서운 고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돌이켜 본 뒤에, 우리는 언약을 굳게 세우고, 그것을 글로 적었으며, 지도자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그 위에 서명하였다.]
설교문
* 위기감 속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평화통일기도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북한과 미국이 날선 말을 주고받으며 한반도에 위기 상황이 고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착잡한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국제사회의 고립을 자초한 북한은 핵 보유국의 지위를 보장받고,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면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북한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이런 상황을 바라보고 있지만, 언제 어느 때 갑작스러운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 내심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분단국가에 산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입니다. 히브리 시인의 고백이 적실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시120:6-7)
최근에 미국 텍사스의 한 대형교사 담임목사인 로버트 제프리스(Robert Jeffress)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로마서 13장 1절을 근거로 삼아, "북한의 경우, 하나님께서 김정은을 제거할 권한을 트럼프에게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망언입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트럼프를 시켜서 그를 제거하라 하셨다는 말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쓰나미나 지진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던 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종교적 편견 혹은 그릇된 믿음에 사로잡힌 이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단호하게 평화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헨리 나웬 신부의 말이 참 크게 다가옵니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중심에 속해 있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헌신해야 할 의무이다."(헨리 나웬, <헨리 나웬의 평화의 영성>, 김정수 옮김, 성바오로, 2009년 8월 7일, p.31)
"우리가 평화 운동가로서 해야 할 일은 전쟁과 파괴를 일삼는 모든 세력에게 단호히 항거하고, 평화란 생명을 지지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실하게 선언하는 일이다."(헨리 나웬, <평화에 이르는 길>, 존 디어 엮음, 조세종 옮김, 성바오로, 2004년 8월 14일, p.80)
* 신실한 지도자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했지만 아직 온전히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고,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고, 또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느헤미야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늠해보려 합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을 따르는 관원이 되었습니다. 왕실의 신뢰가 깊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어느 날 예루살렘에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황폐하게 변한 조국의 현실에 대해 전해 듣고는, 그 참담한 현실을 아파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왕에게 청했습니다. 마침내 왕의 재가가 떨어지자 그는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에 유다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무기력한 절망감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설득하여 성벽 쌓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이는 한편,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귀족들과 관리들을 다독여 평등공동체의 꿈에 동참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비싼 이자를 받는 부끄러운 일을 포기했습니다. 제게는 이게 작은 일로 보이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이익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몰염치해지는지를 너무나 자주 목도했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은 총독의 솔선수범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십이 년 동안 총독으로 있으면서 총독으로서 받아야 할 녹의 혜택을 받지 않았습니다. 특권을 포기함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주변 나라들의 방해가 많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을 비롯하여 아랍 사람, 암몬 사람, 아스돗 사람들이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몰려와서는 성을 치려했습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국가가 다시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그들은 느헤미야를 모함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 대한 반역을 모의하고 있으며,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부추겨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은 느헤미야에 대한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온갖 방해 속에서도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무너졌던 성벽을 다시 쌓고, 문들을 제자리에 단 후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학자 에스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라고 청하였습니다. 성벽 건설이라는 외적 행위를 마친 후 필요한 일은 그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 내적 결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에스라가 임시로 만든 단 위에 서서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8:6)하였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이 낭독되었고, 레위 사람들이 그 율법의 의미를 설명해주면, 백성들은 울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고, 초월적인 힘이 그들을 놋성벽처럼 든든하게 감쌌습니다. 그들은 하나 됨의 기쁨을 깊이 누렸습니다.
"모든 백성은 배운 바를 밝히 깨달았으므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며,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서, 크게 기뻐하였다."(8:12)
큰 뜻에 접속되지 못할 때 사람은 자기의 욕망 주변을 맴돌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꿈을 되찾았습니다.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말씀 앞에 설 때 사람은 겸허해집니다.
* 역사 반성
느헤미야 9장은 죄를 자백하는 백성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잊고 있었던 자기들의 역사를 되짚어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객관적인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해석된 역사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1934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성서조선>이라는 잡지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글을 연재했습니다. 역사를 성서의 눈으로 읽겠다는 의지가 제목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그 글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뜻'이라는 렌즈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독일말로 객관적 사건 중심의 역사를 일컫는 말은 'Historie'입니다. 그런데 해석자의 관점이 반영된 역사는 'Geschichte'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초점을 맞춰 역사를 해석하는데 이것을 구속사(Heils-Geschichte)라 합니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면 세속의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들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고, 그 반대도 성립됩니다. 구속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했느냐 여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속한 느헤미야 9장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을 찬양한 후에,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상기한 후에,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광야에서의 보살피심, 시내산에서 맺은 계약에 대해 말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돌아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찬미하던 그들의 어조가 변합니다. 값없이 베푸시는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성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은 거만하여, 목이 뻣뻣하고 고집이 세어서, 주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9:16).
아픈 고백입니다. 스스로 빚진 존재임을 알지 못하면 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누리고 사는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아픈 자각에 당도한 것은, 자기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깨달음에 지속성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 이전의 감격이나 감사의 마음은 간데없고, 불평만 떠오릅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일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워진 의무는 단번에 완전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의 마음을 회오(悔悟)와 뉘우침 속에서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다. 회오는 자아(self)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비롯된다. 우리의 실패를 뉘우치는 것이 스스로 완전한 줄 알고 만족하는 것보다 더 거룩하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161).
부끄러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은혜의 통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만하면, 주님께서 보고 계시는데도, 또다시 못된 일을 저질렀고, 지키기만 하면 살게 되는 법을 주셨건만, 오히려 그 법을 거역하며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9:28, 29). 아무리 타일러도 귀를 기울이지 않자 하나님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다른 나라 백성에게 넘기셨다는 것입니다.
* 새로운 나라의 꿈
그들은 앗시리아와 바벨론으로부터 받은 억압과 착취는 백성들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죄의 대가였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큰 복을 누리면서도, 주님을 섬기지도 않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도 않은 결과 조상들에게 주신 바로 그 땅에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깨달음은 이렇게 늦게야 오는 것일까요? 세상의 중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우리의 버릇 때문일 겁니다.
"우리 조상에게 주신 바로 그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습니다"(9:36)라는 고백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정신이 더 풍요로워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혹시라도 찾아올지 모를 나그네를 위해 이불 속에 밥 한 그릇을 묻어두던 그 정겨운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경쟁심과 시기심, 의구심과 혐오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재벌의 눈치만 봅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마음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힘이 정의처럼 여겨집니다. 언론인들이 삼성의 고위층에게 인사 청탁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징조가 보여 다행입니다. 힘 있는 이들의 '갑질'에 대한 분노가 깊어가면서 그동안 숨죽인 채 지내고 있던 '을들'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만이 미덕이 아니라는 사실에 사람들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여성들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학벌사회를 해체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확장되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힘으로 누군가를 제압하고, 자기 뜻을 다른 이들에게 강제하는 저열한 재미에 빠지지 말고, 섬기고 나누고 돌보는 일을 통해 우정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로 작정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좀처럼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절망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을 피하는 길은 하나입니다. 자기 문제에만 골똘하지 않고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통회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언약을 세우고, 그것을 글로 기록한 후 지도자들의 서명까지 받았습니다. 죄의 종살이, 돈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살겠다는 다짐이 절실한 나날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 나라가 평화의 나라, 생명의 나라로 변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