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사렛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II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4. 아들의 하나님 이름 계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1)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이름

kimyounghan
(Photo : ⓒ베리타스 DB)
▲기독교학술원 원장 김영한 박사

하나님은 항상 그의 이름을 알리심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아브라함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창 17:1)으로, 모세에게는 '여호와'(출 6:2)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 그 이름을 알리셨다. 모세는 불타는 가시떨기에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신다.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을 드러냄이다. 하나님은 이름 계시를 통하여 그의 종 모세를 택하시고 그를 종으로 이집트로 보내셔서 압제 속에 있는 그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능하신 팔과 크신 권능으로 이끌어 내시고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하나님 이름의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 인격으로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과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쉐히나(Schechina, 피조물 안에 내주)를 나타내 보여주었다. 피조물 가운데 거하심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쉐히나는 그분의 내주로서 그가 창조하신 우주 과정과 인간 역사과정에 온전히 현존하시지만 동시에 이 과정으로부터 무한히 초월해 계신다.

다른 고대 세계에서는 신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신을 불러내거나 신을 깨운다는 식의 마술적인 사용의 경우가 나타나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라는 구약성경의 표현에는 이러한 마술적인 요소는 없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21).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요술, 복술, 신접, 초혼, 마술로 사용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셨다: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0-11).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성별할 것에 관한 많은 언급들이 있다. 자녀들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하나님의 성호를 욕되게 한다고 금하고 있다(레 20:3).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한다는 것과 같은 표현이었다(말 1:6-7).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기에 인간은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를 경험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인간 안에 두셨다.

여호와는 하늘에 거하시지만(신 4:36; 26:15), 이스라엘의 어떤 지역 안에 그의 이름이 거하실 처소를 정하셨다(신 14:23; 16:11).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처소에 거하신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신 12:11b). 하나님의 이름은 그것을 위해 지어진 건물인 성전 안에 계신다(삼하 7:13; 왕상 3:2; 5:17; 8:17). 그러므로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성전을 봉헌한 후에 드리는 솔로몬의 축사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내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왕상 8:16-20)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두신 성전에 계신다. 하지만, 쉐히나로서의 하나님의 임재는 열조들이 가졌던 장소에 매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앙을 성전이라는 공간 신앙으로 변질시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표현은 여호와께 예배할 때에 쓰이는 제사 용어(창 4:26; 12:8; 습 3:9)이며 축복과 맹세를 할 때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신 10:8; 6:13).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 자신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이름이다'(사 47:4; 51:15; 렘 10:16; 31:35; 46:18; 51:19)라는 표현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전능하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기념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말 3:16).

2) 하나님 이름의 새로운 해석: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됨

예수는 대제사장 기도에서 자신을 새로운 모세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 이름의 새로운 계시인 것은 그 자신의 신적 독특성에 입각하고 있다. 그 자신이 모세 같은 하나의 예언자임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에 관하여 증거하고 그의 율법을 전했다. 예수께서 이르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6-7). 예수는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b).

예수는 하나님 이름을 새롭게 해석하신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a). 이 말은 하나님의 특정한 한 이름(예컨대, "아버지")을 전달해 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깨우쳐 주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음을 뜻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요 17:6a).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누구에게나 나타낸 것이 아니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나타내신다.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신앙에는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나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이끄심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소유인데 하나님이 이들을 아들에게 주셨고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는 자들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b).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the consuming fire)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Immanuel, God with us)이 되시고 은혜의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의 법은 더 이상 정죄하는 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내면의 법이 되어 사랑과 순종을 유발하는 생명의 법이 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셨다. 이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다음 같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예수는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사랑을 저들 마음속에 보여주신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b). 예수가 주시는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오셔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믿음을 부어주신다. 내주하시는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가 신자들 속에 거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다. 이러한 신비적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법은 더 이상 외부에서 강제하는 법이 아니라 내면에서 즐거워하는 자유의 법이 된다. 아들이 보내시는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구약의 보이는 성전은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성전이 된다. 하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의 이름을 두고 있고 하나님은 신자들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5.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다

세상(κόσμος)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창조질서로서의 인간 세상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둘째 의미는 부패와 거짓과 폭력이 만연하는 세상이다. 이것은 까뮤가 말하는 이방인으로 느껴지는 "허무"(Nichtigkeit), 하이데거가 말하는 "비본래성"(Uneigentlichkeit)이라는 현존 세계와 마르크스가 말하는 "인간 소외"(Entfremdung)로 표현되는 사회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질서 안에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이란 두 번째 의미의 세상, 즉,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고 거스르는 패역하고 불의한 세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 세상이 신자들을 미워함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심으로써 이 본질 안으로 영입되었다. 이는 새로운 거룩한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고립과 이 세상의 미움을 이겨내야 하며 세상의 무신론적 풍조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신자들이 도피적이며 고립된 생활을 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살면서도 악과 타협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닮아 이 세상에 그 국적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6). 예수는 빌라도가 그를 심문할 때 그에게 말하였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예수는 명백히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6. 하나님 백성의 성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예수는 신자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거룩하다"는 히브리어는 카도쉬(qadosh)란 하나님에게 구별하여 넘겨드리는 것, 즉, 성별이다. 그것은 제물의 봉헌일 수 있고, 인간의 성별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출 13:2). 성직을 위한 제사장의 임명일 수 있다: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출 28:41). 성별된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초월적 영역으로 들어선다. 초월적 영역이란 하나님의 영역이다. 성별이란 하나님에게 구별되어 바쳐진 것이다. 그리하여 성별된 것은 다시 세상과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 예수는 대제사장 기도에서 성별의 3가지 차원을 말한다.

첫째, 하나님이 아들을 성별하신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니시면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가르치실 때 유대인들이 이를 신성모독이라며 돌로 치려고 하실 때 예수는 자신을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요 10:36a)라고 증거하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성별하심은 세상에 보내시기 위한 것이다. 성별과 보내심은 연결되어 있다. 이 성별은 아들의 성육신과 관련된다. 아들이 성별된 것은 패역한 세상을 구속하기 위한 대제사장이자 희생제물이 되기 위한 것이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께서 영생의 떡에 대해 가르칠 때 이해의 어려움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갔을 때 베드로는 예수에 대하여 고백한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9).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는 하나님이 세상의 대속을 위한 "어린 양"으로 성별하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를 보고 증언하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b). 예수는 하나님에 의하여 속죄제물로서 영원 전부터 어린양으로 성별함을 받았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 1:15),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 1:26).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분으로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예정이시다.

둘째, 아들이 자신을 성별함이다. 예수는 자신을 성별하신다고 기도하신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요 17:19a). 여기서 "성별한다"(hagiázó)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구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제자들을 대리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자 한다. 이것은 십자가 죽음에서 일어난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톰(St. Johannes Chrysostomus)은 이 구절에 대하여 "나는 나를 거룩하게 한다. 나는 나를 희생제물로 내어 놓는다"고 주석한다(Rudolf 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 Kritisch-exegetischer Kommentar über das Neue Testament, Bd. 2, 14 Auflage [Vandenhoeck & Ruprecht, Göttingen, 1956], 391). 예수의 존재는 세상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위한 존재다. 예수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의 구속을 위하여 성별된 대제사장이다.

셋째, 신자들의 성별이다. 신자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사람이며 본래 아버지의 소유다. 신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알며 그의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임을 이해하였으며, 그 말씀 자체를 지켰다. 예수는 신자들의 성별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b). 진리(άληθεία)란 학문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진리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109번 쓰이는데 그중 거의 절반이 요한문헌에서 나온다(김동수, 제 13장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신약성서 개론: 한국인을 위한 최신연구』, 449). 예수가 사용하시는 이 단어는 희랍의 명상적 진리보다는 그의 인격을 통하여 계시된 진리를 말한다. 진리는 예수를 통해서 열려진 하나님의 현실이며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열려진 현실이다.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요 17:17). 제자들은 전적으로 말씀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며 그 말씀의 진리가 인격적으로 마음과 정신과 실존에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불의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이 도피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도록 기도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예수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을 보전하고 지키셨으나 멸망의 자식은 그렇지 못했다고 기도하고 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여기서 예수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신다. 이 구절은 최후의 만찬 시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3) 하시고 한 조각을 찍어다가 가룟 유다에게 주시는 구절(요 13: 23-30)과 연관되어 있다. 유다의 배신은 마귀의 개입과 연관되어 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7). 요한은 예수의 귀신추방 사역에서 본 그대로 사탄의 실재를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사탄은 인간 이성을 마비시켜 인간 의지의 선택을 배후에서 조종한다. 인간 마음과 생각에 그러한 생각을 주입하여 인간 주체는 그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개입과 인간 의지의 선택은 실천적으로 조화된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가 있으며 이는 우리가 유한한 이성으로 미쳐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의 영역이다.

그리스도인의 성별은 자신의 수양으로 되는 것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신구약 성경은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진리의 규범이 된다. 천지의 규례(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4계절 등)가 바뀌지 않는 것 같이 항상 머무는 질서이다. 예수는 천지는 바뀔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영원히 있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하나님의 진리는 바로 인격자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 성경의 진리는 바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신약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읽고 복음의 도를 아는데 더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복음의 도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히 바라보고 매일 진리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7. 교회의 연합과 일치: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는 제자들의 일치와 앞으로 그를 믿게 될 교회 공동체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예수는 세 가지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연합과 일치를 청원하신다.

첫째, 신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아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신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신자들은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됨 같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신자들은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저들의 정체성이 보전된다.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적 연합과 일치를 말하면서 이에 대한 믿음으로 신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신자들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을 믿을 때 하나가 된다. 이것은 신앙에 의한 연합과 일치다.

둘째, 신자들은 예수의 영광을 받아 하나가 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아들은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신자들에게 주신다. 이 영광은 대속의 영광이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세상에서 선택하심을 받아 아들의 사람으로 구별함을 받은 영광이다. 아들로부터 받은 대속의 영광으로 신자들은 연합하고 일치한다.

셋째, 신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나가 된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8:23). 신자들은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성화를 이룸으로써 하나가 된다. 이러한 성화를 통한 연합과 일치는 제도적 연합이나 교리적 연합이 아니라 인격적인 상호용납과 존중과 섬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제자들 상호간의 하나됨은 미래의 제자들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하나됨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증거가 되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초대하는 제자들의 선포를 신뢰할 만한 것 그리고 매력적인 것이 되게 한다. 제자들의 교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하나이며 또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됨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구속의 사실에 근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러한 연합과 하나됨으로써 살며 또 서로 어울려 살면서 그러한 하나됨을 실현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인하며, 예수를 통해서 실현된 구원을 드러낸다. 예수는 세상에서는 잠정적인 영광이 제자들에게 언젠가 다가올 종말에 완전하게 그리고 다시는 잃어버릴 수 없게 부여되도록 기도하신다. (끝)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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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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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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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