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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의 하나님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2:1-4, 로마서 4:18-25, 요한복음 11:2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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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붑니다. 한여름의 폭염이 물러가고 청명한 결실의 계절이 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희망'에 대해서, 특히 '기독교적 희망'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시대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듯합니다. 현실이 너무 암당하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우리는 희망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희망에 대해 말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희망은 무엇입니까? 어떤 희망이 희망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잭 캔필드(Jack Canfield)와 마크 빅터 한센(Mark Victor Hansen)이 쓴 책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Chicken Soup for the Soul)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중병에 걸린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둘 다 큰 병원의 같은 병실에 입원했습니다. 병실은 아주 작았고,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후에 한 시간씩 침대 위에 일어나 앉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의 침대는 창가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 앉을 때마다 바깥풍경을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환자는 하루 종일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창가의 환자는 매일 오후 정해진 시간에 침대에 일어나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바깥풍경을 다른 환자에게 일일이 설명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창을 통해 호수가 있는 넓은 공원이 보이는 모양입니다. 호수에는 오리와 백조들이 떠다니고, 아이들이 몰려와 모이를 던져주거나 종이배를 띄우며 노는 모양입니다. 젊은 연인들이 손을 잡고 나무 아래를 산책하고, 주위에는 꽃들이 많이 피어있는가 봅니다. 이따금 공놀이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호수 너머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선명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누워있는 환자는 창가의 환자가 이 모든 풍경을 설명해줄 때마다 즐겁게 들었습니다. 창가의 환자가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를 잘 하는지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이 지금 바깥풍경을 내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사로잡았습니다. 왜 창가에 있는 저 사람만 특권을 누리고 있지? 왜 저 사람만 혼자 바깥을 내다보는 즐거움을 독차지하고 있는가 말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창가에 있는 환자에게 질투가 났습니다. 침대의 위치만 바꿀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창가의 환자가 갑자기 기침을 하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버둥거리며 간호사 호출 비상버튼을 찾았습니다. 당연히 옆의 환자는 그 환자를 도와 비상벨을 눌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 환자의 숨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잠자는 척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침에 간호사는 창가의 환자가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용히 시신을 치워갔습니다. 적절한 시기가 되자 남아있던 환자는 창가 쪽으로 침대를 옮기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병원직원들이 와서 조심스럽게 그를 창가 쪽 침대로 옮겨주었습니다. 그들이 떠나자 그는 안간힘을 다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몰려왔지만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아 얼마나 보고 싶던 바깥세상입니까! 아 얼마나 그리던 아름다운 풍경이란 말입니까! 그는 얼른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창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건물의 회색 담벼락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충격과 반전의 감동이 있습니다. 창가 쪽 그 환자는 회색 담벼락에 가로막혀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그 아름다운 호수와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과 활짝 핀 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절망의 담벼락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고 서 있는데도 어떻게 그는 희망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도 그 창가 쪽 환자처럼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에도 희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절망의 담벼락이 가로막혀 있을 때에도 세상과 이웃을 향해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요즘 미국 괌은 북핵문제로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그 섬은 언젠가 대한항공 여객기가 거기에 추락했을 때 기적적으로 구조된 한 모녀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까맣게 숯으로 변한 시체더미 속에 엉켜 밤새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면서 어머니는 칠흑 같은 어둠 속 어딘가 가까운 곳에 누워 있는 딸이 행여 정신을 잃을까봐 계속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 밥 안 먹어 엄마 속 썩였던 이야기, 친구의 얼굴을 할퀴고 와 그 아이의 엄마에게 빌러갔다가 창피당한 이야기, 학교에서 상을 받아왔을 때는 너무나 기뻐 온 동네 자랑하고 다닌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사랑하고 그 순간 그토록 보고 싶던 가족과 친지들의 이야기... 어머니는 딸에게 쉬지 않고 이야기를 듣게 함으로써 살겠다는 의지를 계속 불어넣었고, 그 자신도 그렇게 말을 하는 동안 의식을 잃지 않고 생명의 불꽃을 계속 태울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그 모녀는 지옥 같았던 사고현장에서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생환하였습니다.

희망은 의지였습니다. 희망은 결심이었습니다. 살겠다는 확고한 의지였고 살아야 한다는 확고한 결심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도 희망을 움켜쥐겠다는 의지가 바로 희망입니다. 결국 희망은 선택입니다.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희망을 선택했을 때 절망을 삼키고 찾아오는 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저 자신도 희망이 선택이고 의지라는 것을 청소년 시절에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학교에서 강가로 여름수련회를 떠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중3 때였을 겁니다. 강가에 도착하자 저는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여학생들의 탄성소리에 더욱 신이나 보란 듯이 강 가운데로 헤엄쳐 들어갔습니다. 강 중간쯤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몸에 부딪치는 물살의 힘이 다르고 강바닥도 보이지 않아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어서 돌아가자' 생각하고 뭍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 위해 몸을 세우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름 강에서 헤엄을 쳐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한여름 강물의 윗부분은 미지근하게 데워져 있어도 조금만 아래 내려가면 거기에는 차가운 물이 흐릅니다. 그 물에 제가 걸렸습니다. 뭍으로 나오기 위해 몸을 세워 뒤로 도는 순간 저는 저의 허벅지 밑으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무나 섬뜩했습니다. 온 몸이 빳빳하게 굳기 시작했습니다. 헤엄을 쳐야 하는데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가위에 눌리는 꿈을 꿨을 때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헤엄쳐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 뿐 저는 벌써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언뜻 뭍 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바로 저기인데! 조금만 가면 되는데! 저기까지만 가면 살 수 있는데!' 그 짧은 2-3초 사이 저는 생명과 죽음 중간에 있었습니다. 희망과 절망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저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허벅지 밑을 휘감고 도는 차가운 물에 넋을 빼앗겨 그대로 가라앉을 것인지, 아니면 저 앞에 보이는 뭍만 생각하고 거기를 향해 사력을 다해 헤엄을 칠 것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허벅지 밑의 차가운 물을 의식하면 할수록 엄습해 오는 것은 공포와 절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땅만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하니 저의 손과 발이 서서히 움직여주었습니다. 저는 사력을 다해 뭍으로 헤엄쳐 나왔습니다. 그 때 저는 희망이 선택의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의지의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행동의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가 있습니다. 독일계 유대인인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 시기에 『희망의 원리』라는 긴 철학적 에세이를 썼습니다. 한국에서도 완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이 우리를 맞이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 속에서 이렇게 시작하는 책은 곧이어 단도직입적으로 "문제는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블로흐는 희망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희망을 꿈이나 관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필연적 특성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직 아닌 존재'입니다. 이러한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을 향해 나아갈 때 그 존재의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인간의 '기본적 충동'이고 인간 '존재의 필연적 특성'이라고 블로흐는 규정합니다. 그는 이러한 희망의 가장 친숙한 형태를 '낮 꿈'에서 찾았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밤 꿈'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찾은 것과 달리 블로흐는 대낮에 꾸는 꿈, 즉, 백일몽(白日夢)에서 그것을 찾으려했습니다. 하지만 블로흐는 낮 꿈을 꾸는 자가 반드시 그 꿈에서 일어나 그 꿈의 실천을 통해 그것을 구체적으로 창조해낼 때에 비로소 희망이 존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행동하는 희망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렇게 블로흐는 인간의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원리로의 희망을 제시한 유명한 희망의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희망의 철학에 자극을 받은 같은 독일 출신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1926- )이 유명한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읽고 몰트만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그리스도교 신학이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희망은, 원래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주제가 아닌가?" 몰트만은 그의 책에서 '희망의 상실'을 죄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그가 행하지 않는 선이며, 그의 악행이 아니라 그의 태만이다"라고 말하는 몰트만은 '희망의 상실'이 바로 이 태만의 죄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지옥은 희망을 잃어버린 곳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희망에 의존합니다. 신앙이 먼저 오지만 희망은 신앙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 이 희망이라는 동반자가 없으면 기독교 신앙은 무의미해지고 약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몰트만은 '기독교적 희망'이 무엇인지 찾는데 몰두합니다. 그는 기독교적 희망은 '희망에 저항하는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로마서 8:24-25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합니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희망은 이렇듯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적 희망은 지금 보이는 희망과 지금 경험할 수 모든 희망을 넘어선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본문 중 로마서 4:18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라고 번역합니다. 새번역은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라고 번역합니다. 셋 다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영어성경들을 살펴보니 "Against all hope"(NIV) 혹은 "In hope against hope"(NASB) 등으로 번역합니다. 좀 나은 것 같습니다. '모든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 혹은 '희망에 저항하는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희망을 거스르는 희망' 혹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희망'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몰트만은 한마디로 기독교적 희망은 '부활의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활의 희망이 '모든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 혹은 '희망에 저항하는 희망'(hope against hope)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희망 안에서 생명은 죽음과 갈등하고, 영광은 고난과 갈등하며, 평화는 다툼과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으로부터 시련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위로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억압과 굴종에 맞서는 '하나님의 저항'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우리의 '마지막 원수'(고전 15:26)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부활의 희망은 죽음의 원수요, 또한 죽음과 함께 사는 세상의 원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의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갈등구조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희망이 저항이 됩니다. 세상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억압과 굴종에 맞서는 저항이 됩니다. 그래서 부활의 희망은 우리를 평안하게 만들기보다 불안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미래가 아무 것도 스스로 변하지 않고 죽음 안에 머무르려는 현재를 향해 무섭게 도래(advent)하기 때문입니다. 몰트만의 표현을 빌린다면, "약속의 미래라는 가시가 현재의 살 속으로 가차 없이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희망은 현실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보이는 것에 우리의 희망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 희망은 미래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미래'를 보게 합니다. 그 미래는 약속의 미래, 부활의 미래입니다. 때문에 기독교적 희망은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 이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미래에 집중하게 합니다. 몰트만은 성서가 말하는 '희망의 하나님'(로마서 15:13)이 '약속의 하나님'이며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라고 잘 정리하였습니다.

플로렌스 채드윅(Florence Chadwick)이라는 여성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 영국해협을 왕복으로 헤엄쳐 건넌 최초의 여성입니다. 34살의 나이에 그녀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워 미국 LA 앞에 있는 카타리나 섬에서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수영으로 횡단하기로 했습니다. 1952년 7월 4일, 바다는 얼음같이 차가웠고 안개는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몸은 차갑게 얼어왔고 그녀의 형체를 알아본 상어 떼들이 그녀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백만 명이 넘은 사람들이 TV 생중계를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벌써 16시간 가까이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해변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배 위에서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그녀는 TV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육지가 제 눈에 보이기만 했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를 포기하게 만든 것은 추위가 아니었습니다. 피로도 아니고, 무서운 상어떼도 아니었습니다. 안개였습니다. 안개 때문에 자신의 목표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목표가 안 보이니 무서움이 그녀를 엄습했던 것입니다. 두 달 뒤 그녀는 재도전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짙은 안개가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마음속에 자신의 목표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 앞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는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해변을 상상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해변 생각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만 향해 앞으로 헤엄쳐 나아갔습니다.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카타리나 해협을 헤엄쳐 건넌 세계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남자들이 세운 기록을 두 시간이나 단축시키면서 말입니다.

희망은 선택입니다. 희망은 의지입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어떻게 자신이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나왔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는가는 내 선택에 달린 일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선택하기로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어떤 것을 정해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내 아내에 관한 생각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녀의 손을 한 번만 더 잡아보고 싶었습니다. 단 한 번만 더 아내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한 번만 더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것이 내 생명을 일 초 일 초 연장시켜주었습니다." 프랭크 박사는 아우슈비츠의 다른 포로들보다 더 건강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 배급되는 음식이라곤 수프 한 그릇에 완두콩 한 알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들에 절망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대신 단 한 가지 목표를 정해 거기에 온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것이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이사야 42:1-4은 '하나님의 종의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새번역).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갈대가 상했다 함을 무슨 말입니까?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 효용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것의 가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흔한 들풀 하나도 하나님의 고유한 창조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등불이 꺼져간다 함은 무슨 말입니까? 연료가 떨어져 가는 등잔의 최후의 모습을 말합니다. 생명이 꺼져가는 마지막 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최후의 순간에서도 결코 희망을 거두시는 법이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새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희망, 모든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거대한 회색 담벼락이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창가에 있던 그 환자처럼 절망의 담벼락 앞에서도 아름다운 호수와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과 화사한 꽃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이야기를 창밖을 볼 수 없는 다른 환자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혹 항공기 사고를 당하여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처해 있습니까? 기적적으로 생환한 그 모녀와 같이 그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는 쉬지 않고 희망을 속삭여야 합니다. 그렇게 생명의 불꽃을 이어가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혹 허리 밑으로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고 온 몸이 굳어 계십니까? 거기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힘을 내어 용기를 내어 내가 헤엄쳐가야 할 저 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약속의 땅, 하나님의 미래, 부활의 소망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경제적 어려움도 가난도 불확실한 미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희망의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의 포기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의지입니다. 희망은 결심입니다. 희망은 선택입니다. 장밋빛 청사진이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명기 30:19). 생명을 택하십시오. 희망을 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미래만 바라보십시오. 약속의 미래, 부활의 희망에 집중하십시오. 성서의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 절망 속에 눈이 어두워 물속으로 빠져가는 우리를 구하시려 성큼성큼 오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절망을 희망으로 갈아엎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7.8.27.)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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