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면서 닮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은폐, 조작했던 지난 정부처럼 이 정권 역시 소성리 사드배치를 공권력으로 밀어 붙였고 온갖 궤변과 거짓으로 합리화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민심을 저버리고 종교인의 충정을 짓밟는 정부치고 좋은 끝이 없었음을 명심할 일입니다. 지지하여 탄생시킨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고통스러우나 종교인들은 옳기에 말하고 잘못되었기에 지적할 뿐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14장 10절과 11절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어느 날(수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와 함께 3년을 먹고 마시며 배우며 동거 동락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3년을 좇았으니 예수가 누군지를 알만도 했겠습니다. ‘주는 그리스도라, 살아계신 하느님 아들이라'는 고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누가 높은 가를 두고 다퉜고 예수에게서 유혈 혁명을 기대했던 유다 같은 존재도 있었습니다. 섬기는 자로 왔고 세상 죄를 홀로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예수를 이 순간까지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이렇듯 높고자 다투는 제자들을 예수는 장님이라 불렀고 폭력 혁명을 꿈꾸던 유다를 위험하다 여기며 지켜보았습니다. 급기야 예수의 길과 자기 소신이 다른 것을 알았던 유다는 실리를 택했습니다. 제국과 결탁한 대제사장에게 예수를 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영원히 저주받은 자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지요.
금번 소성리 참사, 종교인 기도처마저 내팽개치고 사드를 배치한 이 정부에게서 유다의 체취가 풍깁니다. 경찰청장 이철성의 폭력진압도 문제겠으나 이를 승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서 가롯 유다의 얼굴이 중첩되니 곤혹스럽습니다.
촛불혁명이 세운 정부였기에 시민과 국민의 뜻에 순종할 줄 알았습니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만들기를 기대했기에 주변국을 자극하는 사드배치를 폐할 줄 믿었습니다. 평화협정을 위해선 더 이상의 전쟁무기가 반입 되서는 아니 되었던 까닭입니다. 아름다운 제주, 강정의 해변이 전쟁기지가 되었듯이 사드배치 강행으로 순박한 원불교의 성지, 성주가 또다시 전장 터로 변했습니다.
확언컨대 사드배치는 이제 시작일 뿐 결코 끝이 아닐 것입니다. 향후 사드와 연계된 무수한 전쟁무기들이 거듭 이 땅에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들을 믿고 비폭력 평화의 길을 걸었어야 할 문재인 정부는 유다처럼 다른 길을 기웃 거리는 듯싶습니다. 사드배치는 촛불 혁명의 주역들에게 있어 폭력이자 배신을 뜻할 뿐입니다. 북쪽 역시 앞으로 더 센 무기로 위협하며 응수할 것입니다. 이렇듯 평화를 원했던 촛불혁명과 멀어진 현실이 참으로 걱정입니다. 폭력의 길로 나선 그 배신은 우리 종교인들에겐 예수에 대한 배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 돌봄이'(종교 Care)란 이름으로 천막 성소를 무참히 짓밟은 만행을 두고 두고 기억할 것입니다. ‘죽어야 사는 길'을 말하는 종교인을 밀쳐내고 ‘죽여야 산다'고 믿는 제국의 종노릇했으니 문재인 정권은 첫 단추를 크게 잘못 끼웠습니다.
일찍이 함석헌은 분단극복을 민족 최대의 과제라 보았고 이는 대한민국 뿐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도 필히 그리되어야 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세계가 흘러 보낸 온갖 하수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창녀의 자궁처럼 욕망의 배설물들로 가득 찬 현실이 바로 한반도 분단의 실상이라 했습니다. 그럴수록 분단극복을 세계를 정화하고 세계를 구원하는 지름길이라 믿었습니다. 이 땅의 통일을 세상을 구원하는 길로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주변국 어디도 통일을 원치 않고 방해하며 오히려 어렵게 합니다. 통일을 반대하는 국내외 세력들이야말로 적폐이자 평화를 해치는 적그리스도입니다. 분단을 고착시키는 사드배치, 그래서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실상이자 현현이겠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차원에서 다음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는 남북을 하나로 품는 동족애입니다. 이방인 사도 바울이 자신을 비방한 유대인 동족을 포기치 않고 기도했듯이 북쪽 만행이 도를 넘을 지라도 그들을 미국처럼 원수로 내몰 수 없습니다. 러시아 방문 중에 푸틴에게 북한에 원유중단을 구걸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처신은 숨은 뜻이 있다하더라도 품위를 잃는 일이었습니다. 대화를 요청해도 들은 척 않는 북한, 수소폭탄까지 쏘아대는 김정은이지만 외세를 등에 없고 북한과 맞서 대적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둘째로 상대적 약자인 북한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사일을 쏘아 올리지만 그것으로 이들은 자신들 약함만을 만천하에 들어내고 있습니다. 오로지 그것밖에 내세울 것 없는 북한, 그들은 약자이지 결코 강자일수 없습니다. 무기 앞세워 살 길 찾는 김정은 체제, 날로 진화해가는 그들 무기가 무섭지만 그 속에 감춰진 약함을 보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할 일입니다.
독일 메르켈 총리까지도 미국을 향해 역지사지의 지혜를 요구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북한을 상대로 무기를 팔아 경제적 잇속을 챙기려는 미국의 속셈이 보였던 것입니다. 끝으로 어느 경우든 남과 북 모두에게 비폭력적 평화의 길만이 살길이란 사실입니다. 미국의 선제공격이 필요하고 우리들 핵무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적폐 정치인들이 있으나 무기는 공히 무기를 부를 뿐입니다. 이 땅이 전쟁터로 되는 것만은 죽을힘을 다해 막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할 일은 전쟁노름이 아니라 비폭력적 통일운동입니다. 다시 함석헌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약 북한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우리 오천만 백성 모두는 3.8선에서 그들을 맞으며 함께 죽자고 했습니다. 폭력을 이기는 길은 비폭력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겠습니다. 예수 생애 마지막 일주일에 그의 발걸음이 예루살렘을 향했던 것과 뜻이 같습니다. 죽여야 사는 세상에서 죽어야 사는 현실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지요. 지금도 외세에 의존해 북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자는 가롯 유다 같은 적폐 정치인들이 문재인 정부를 많이 흔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급기야 대통령마저 가서는 아니 될 그 길을 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종교인들, 기독교 신앙인들은 현 정부가 지속되는 내내 세월호 리본과 함께 파란 나비를 가슴에 달고 살아갈 것입니다. 내손으로 뽑은 대통령에게 속은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성주 소성리 할머니의 절규를 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종교인들의 예배 처마저 무참하게 짓밟은 이철성 경찰청장, 그것으로 지난 정권에 빌붙었던 자신의 오점을 씻고자 했겠으나 당신은 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을 또다시 가롯 유다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권력으로 종교인들을 내쳤으나 우리들 신앙인들은 그 폐허된 공간에서 다음 날 다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불행히도 현장에 함께 하지 못했으나 페이스 북을 통해 그 광경을 본 순간, 온몸이 전율했습니다. 실패가 결코 실패가 아닌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부활 체험이었습니다. 우리 종교인들은 실패 속에서도 거듭 기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인들과 달리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 종교개혁 500년을 맞는 지금, 우리는 2년 후인 2019년 3.1 독립선언 100주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건국절을 폐하고 상해 정부를 국가로 인정했다면 헌법에 명시된 대로 남과 북은 분명 하나이고 동족입니다. 2019년 3.1 선언, 100년 되는 그해에 남북이 하나 되는 꿈을 문 대통령과 함께 실현시키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촛불의 힘과 체제 밖을 상상하는 종교인들의 믿음을 헛되이 말아야 할 거십니다. 우리는 유다의 최후와 대통령이 마지막이 전혀 다르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촛불혁명으로 세워진 이 정권이 광장민주주의에 좀 더 익숙해지길 바랍니다. 성소를 폭력으로 진압한 이철성 경찰청장의 앞날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