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5장 1-7절, 마태복음서 21장 33-46절
[수확의 계절]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여서 해동(海東)의 공자(孔子)라고 불렸던 퇴계 이황(李滉) 선생의 만보(晩步)라는 한시가 있습니다.
"자주 잊어버리는 것 괴로워 이 책 저 책을 뽑아 놓고서, 또 다시 이리저리 흩어진 책들을 정리하는데, 해는 문득 서쪽으로 기울고, 강엔 황혼 빛 번뜩이다 숲 그림자가 내려 않는구나! / 지팡이 짚고 앞뜰로 내려가 고개 들어 먼 구름 피어오르는 고개를 바라보니, 아득하게 밥 짓는 연기 일고, 들판에 부는 찬바람 으스스 쓸쓸하구나! / 농가의 가을걷이 가까워 방앗간 우물터엔 기쁜 빛 돌고, 갈까마귀 돌아와 계절은 무르익어 가는데, 바람 이는 가지 끝에 앉은 해오라기 자태가 훤칠하구나. / 내 인생은 홀로 무얼 하는 건지, 묵은 소원 오래도록 풀리질 않네. 마음속 이야기 나눌 사람 없어, 거문고만 둥둥 뜯으니 고요한 밤 깊어가는구나."(苦忘亂抽書, 散漫還復整, 曜靈忽西頹, 江光搖林影, 扶筇下中庭, 矯首望雲嶺, 漠漠炊烟生, 蕭蕭原野冷, 田家近秋穫, 喜色動臼井, 鴉還天機熟, 鷺立風標迥, 我生獨何爲, 宿願久相梗, 無人語此懷, 瑤琴彈夜靜.)
이황 선생은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대학자답게 여전히 학문에 매진합니다. 이전에 읽었던 것을 자꾸 잊어버리는 탓에 이 책 저 책 꺼내보고 다시 정리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덧 하루해가 갑니다. 잠시 저녁 산책을 나가서 가을날 지는 해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의 기울어지는 나이의 무게가 느껴지고, 농가의 촌부들과 아낙네들은 수확의 결실에 기쁜 얼굴 가득하지만, 자신이 이루어야 할 높은 학문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마음 가득 들어찹니다. 그런 자신의 마음 가눌 길 없어 친구를 찾아보지만 마땅하지 않아 예부터 선비들의 벗으로 불리는 거문고나 타면서 깊어가는 밤, 마음을 달래 보는 것입니다.
한해의 결실을 맺은 수확의 계절 가을이 되면 들판의 오곡백과들을 보면서 자신의 한해를 돌아보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은 예언자가 마치 떠돌이 노래꾼처럼 등장하여 노래 한 자락을 부르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포도는 매우 탐스럽게 열리고 그 맛 또한 달콤하기 때문에, 포도를 키우는 포도원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징으로 자주 쓰였습니다(아모스 8:12). 또 지중해성 기후에 매우 잘 익는 포도는 이스라엘의 주요 농산물이어서,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로 쓰입니다(이사야 27:2-5, 시편 80:8-13, 예레미야 12:10, 마가복음 12:1-12).
[들포도가 열리는 소리]
오늘 본문의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들려지는 이 노래는 사랑하는 이에게 들려주는 노래이건만 그 내용은 찬물을 끼얹듯 우리의 마음을 서늘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포도원 하나를 정해서 땅을 일구고, 돌도 골라내고, 애정을 듬뿍 담아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혹시 누가 자기 포도를 가져갈까 망대도 세우고, 좋은 포도 열리면 포도즙을 짜낼 장소도 마련하고 맛 좋은 상품의 포도를 기대했건만 열린 것이라고는 아무 수고 없이 야생에서 열리는 들포도였다고 한탄합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심판의 예언과 함께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경고의 메시지가 됩니다. 9월은 각 교단에서 총회를 열고, 각 교단의 중요한 사업과 교리 등을 정합니다. 우리 교단을 비롯해 예장 합동, 통합, 합신, 고신 등 다양한 교단들의 총회를 보고 있노라면 들포도가 열리는 소리들로 가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더욱 합리적이고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변해 가는데 오히려 교회가 갈수록 뒤쳐지고,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단은 개회예배를 마치고 회무처리가 시작되자마자 총대들 중에서 1,500만 원의 금품수수 의혹들이 제기되면서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을 벌이는 일들이 발생했고, 김승규 전 국정원장이 총회에 참석해서 김명수 씨가 대법원장이 되면 청년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갈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들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여성 목사 안수가 불가함을 재확인하는 교단이 있는가 하면, 주일학교 아이들 수가 줄어드니, 출산을 독려하기 위해 총회장의 명의로 다자녀 가구에 감사장을 수여하기로 하는 교단이 있고, 요가와 마술을 금지해야 한다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제 그 교단에 소속된 교회의 성도들은 요가를 해서는 안 되는 교단도 있습니다. 우리 교단에 대해서는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이 되어서 제 입으로 말하기가 매우 민망합니다. 총회 마지막 날인 9월 22일에는 총대 656명 중 남은 사람이 296명으로 회의 정족수가 모자라 폐회도 하지 못하고 정회하는 일이 발생했고, 목회자 성 윤리 규범 채택과 교회 성폭력 특별법 제정 등은 논의도 하지 못했습니다. 옳지 못한 진행과정으로 정당성이 확보되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한신대 총장의 인준이 통과된 것과 성소수자 교인 목회 연구위원회 구성이 무산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우리 교단의 수준이 아직 천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한신대 신대원의 학생 한 명이 다른 교단들의 총회와 우리 교단의 총회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남의 집에 불이 나서 신나게 불구경하고 왔더니, 우리 집도 다 타고 없더라."
세상은 매우 급변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처하는 한국 그리스도교 교계를 보면 오히려 후진하고 있는 느낌이 매우 강합니다. 교계의 결정은 비종교인들에게 교회의 대표 이미지를 형성하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 교회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관만 하고 앉아 있을 일은 아닙니다. 우리부터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만이라도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은 구원사적인 맥락에서 포도원 소작인들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포도원을 잘 가꾸도록 맡기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제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집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여러 예언자들을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 처형했음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이 버린 돌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시어 새로 짓는 집의 머릿돌로 삼으셨고, 새로운 자신의 백성을 세우셨으니 바로 그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은 43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첫 교회들을 구성한 이들은 이런 자부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했던 저 유대인들을 대체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또 어떤 면에서 비난 받을 만한 지점도 다수 있습니다. 이런 냉소와 조롱 속에서도 우리교회가 우리만큼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소금과 빛이 되는 새로운 신앙을 보여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
마태복음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떻게 소작인들, 즉, 세를 받고 일하는 농부들이 집 주인이신 하나님이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런 일들을 저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집주인의 종들과 그의 상속자인 아들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소작인들이 집주인이 계시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었거나, 집주인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집주인을 무시했을 경우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들도 이 소작인들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잊고 사는 경우가 있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 지금 개입하시거나 앞으로 개입하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거나, 마치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단에서 어떤 문제들을 풀어가고 결정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을 담당하는 이들이 과연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저 일들을 해 나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들려 드리는 글을 듣고 이것이 성경 어디 쯤 나오는 이야기일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나니, 그분은 살아 계시사 영원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다. 졸음도 잠도 그분을 엄습하지 못하도다. 천지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니 그분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중재할 수 있으랴! 그분은 그들의 안중과 뒤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그분이 허락한 것 외에는 그분의 지식을 아무것도 모르니라. 권자가 천지 위에 펼쳐져 있어 그것을 보호하는 데 피곤하지 아니하시니 그분은 가장 위에 계시며 장엄하시노라."
시편이나 율법서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 구절은 이슬람의 성경 꾸란에 나오는 왕좌의 절(2,255)로 무슬림들이 즐겨 새기는 구절입니다. 세상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한 하나님을 섬기는 세 종교 이슬람, 유대교, 그리스도교가 있습니다. 이슬람은 "내맡기다. 복종하다. 헌신하다"는 뜻의 아랍어 동사 이슬라마에서 나온 용어로 이슬람은 하나님께 대한 "내어맡김, 복종, 헌신"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무슬림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천명하며 하나님께 철저하게 복종하는 삶을 참된 신앙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세계 69억의 인구 중에 이슬람 인구는 16억 명으로 23.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천주교(11억)와 개신교(11억) 인구를 나누어서 표시한다면, 이슬람 인구가 제일 많습니다. 이슬람은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고, 헷갈림이 없는 신앙의 표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그 분의 사도입니다"라는 말로 고백을 하면서 의무적으로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사회에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고, 단식하고, 위대한 순례를 행합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로 요약되는 매우 명료한 이론과 실천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이슬람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은 자신의 교리체계 내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 복종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우리 개신교인들의 믿음은 때로 너무 세속적이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복잡하고, 때론 너무 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아니라 새롭게 생긴 기독교를 통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면, 만약 이슬람이나 또 다른 종교가 하나님의 열매를 맺을 때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신학과 신앙, 신앙과 실천의 일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일을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옳은 일을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울부짖는 자들의 울음소리뿐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저는 200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올해로 목사가 된 지 10년째 됩니다. 제가 목사의 자격이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저는 한편으로 목사로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목사가 된 이유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학과 신앙의 괴리를 줄이고 신앙과 실천이 일치되도록 하는 것, 즉,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바로 세우고, 그 믿음과 삶이 일치하도록 돕는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이 사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향린교회로부터 안식년을 얻어 약 8개월간 쉰 때를 제외하고 개신교인들의 잘못된 신학을 바로 잡고, 또 자신이 믿는 대로 살 수 있도록 돕는데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 삶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생명사랑교회에 목회계획서를 낼 때도 교육목회를 하겠다고 했고, 그 후 우리 생명사랑교회에 부임해서 보니 우리들에게도 신학과 신앙의 괴리가 존재하고, 신앙과 실천의 불일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8월에 했던 설문조사를 분석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더 자세히 성찰해야겠지만 담임목사인 제가 볼 때 그렇게 보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성서는 얼마나 자주 읽으십니까? 라는 설문문항에 매일 읽는다는 분이 10분, 월 1회 미만이 15분, 월 1-3회 읽는 분이 9명, 매주 한 번 읽는 분이 16명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아마도 예배 시간에 읽는 것을 뜻한다고 보면 성경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혹은 그 미만으로 읽는 성도가 40명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성경을 읽고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성경은 지금-여기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되어 있지만 원래 그때-거기, 우리가 매우 알기 어려운 시대와 장소에서 쓰인 문헌입니다. 그래서 사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면 많은 배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바르게 읽도록 도움이 되는 신앙서적들은 또 얼마나 읽으실까요? 신앙서적을 포함하여 독서량이 얼마나 되십니까라는 질문에 우리 교우들은 34명이 월 1권 미만의 책을 읽는다고 답했습니다. 독서량이 매우 적지요! 신앙 서적의 분량은 훨씬 더 적어집니다. 그러면 혹시 교회라도 나와서 열심히 배울까 하고 봤더니, 생명사랑교회에 예배를 포함하여 어느 정도 나오시느냐는 질문에 주일만 나오시는 분이 31명이고 그것보다 더 적게 나오시는 분들이 8명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과 대답으로 미루어 볼 때, 만약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진리에 대하여, 신앙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물어 왔을 때 우리 교인들의 60-70%는 제대로 답변해줄 수 없다고 정직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매일 성경을 읽는 10분과 매주 1권 정도의 책을 읽으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 분들 모두가 참 하나님의 충실한 백성으로 살고 있는지는 또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곧 사는 것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런 분석에 대하여, 기독교는 신앙의 종교이니, 잘 몰라도 믿음으로 가능하지 않겠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저를 불러 주시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서 교회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와 성경 관련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게 됩니다. 그럴 때 제가 느끼는 것은 교인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이나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의 본뜻에 대하여 매우 무지하거나 왜곡되게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여기에서 칭찬을 받고 있는 베뢰아 사람들을 가리키는 '고상하다'는 헬라어는 '가문이 좋다,' '존귀하다,' '기품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가장 필요한 교인들 중에 한 사람은 바로 기품이 있고 존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기품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칭찬받은 베뢰아 사람들은 어떠했나요?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 하면서 성경의 깊은 뜻을 날마다 검토하고 조사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종종 말씀 드렸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인간의 언어입니다. 즉, 성경은 양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온전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하고 시대와 공간에 제한적인 인간의 언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구현해내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나름대로 분명히 애쓰고 노력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로 알고, 저 세상의 가치관에 맞서 그것을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세상을 이끌어갈 실력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1-2년 전보다 더 활발해졌습니다. 월요아침 묵상과 논어 함께 읽기, 화요기도회에서는 출애굽기의 말씀이 들리고, 수요기도회에서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에는 석류나무회가 우리 교단의 구역공과 교재를 가지고 함께 성서 나눔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금요일에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임들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게 만나셔야 합니다. 목사의 입을 통해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만큼 스스로 그 말씀을 곱씹고 되새기며 사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말씀대로 살아내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체험이 쌓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그 한 가운데 망대도 파 놓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것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다. 너희는 어떤 포도를 들고 나에게 오겠는가?" 여러분이 들고 오는 포도가 들포도가 아니라 참포도이길 빕니다. 여러분이 참 포도를 들고 오는 날이 너무 늦어지지 않기를 빕니다. 나태함으로, 게으름으로 뒤로 미루기엔 벌써 추수의 계절 가을이 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교회에서 회개의 기도와 남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끊어지지 않게 하소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언제나 들리게 하시고, 젊은이들의 노랫소리가 점점 더 커지게 하소서. 우리 교회에서 서로 발을 씻어주는 물소리,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랑의 속삭임이 메아리치게 하소서. 무엇보다 우리 교회에서 세상을 깨우치는 하나님의 복음의 소식이, 예언자의 소리가 드높이 울리게 하소서. 저 문으로 들어올 때 복을 받게 하시고, 저 의자에 앉을 때마다 은혜 충만케 하소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서가 있기를,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에게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성가대의 찬양이 천사의 음성이 되어 상한 영혼을 어루만지고, 말씀의 능력으로 거듭나서 슬픔의 상복을 입고 들어 왔던 이가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무거운 짐에 눌린 자가 독수리의 날개를 얻게 하소서. 우리는 영원히 하늘의 시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오니 길이길이 당신 품에 품으시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기적들과 멋진 사건들과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피어나게 하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7.09.24.)
* 여기에 들어가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oulLoveCommunity/UkVO/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