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1. 오늘은 역사의식으로 깨어있는 교회라면,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고 천주교까지 해방절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일반사회 관공서에서는 내일 광복 72주년 기념식을 가질 테지요. 한국 교회가 8.15를 기념하여 해방절 기념예배로 드리게된 역사적 동기는 2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2. 첫째, 개신교 교회가 1884년 최초로 한국에 설립된 이후, 그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한일합방이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채결되었지요.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이야기가 먼 옛날 다른나라 이야기로서 들리지 않고 한민족의 해방을 예표하는 전조로서 성경을 이해하곤 했습니다. 3.1만세운동에서 본대로 한국 기독교는 민족의 독립운동과 해방을 꿈꾸는 애국 애족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3. 둘째, 언젠가는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이 오리라고 믿었지만, 36년의 식민통치기간 그 식민통치 수단방법이 인도를 지배한 영국의 식민정책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험난한 시련기였기에, 2차대전의 종언과 함께 해방이 그렇게 빨리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조선의 해방이 국제정치적 역학관계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45-48년 소위 해방정국은 아직 남북이 분단국가로서 서로 다른 정부가 세워지지 이전이기 때문에 좌우 이념갈등이 심했지만, 해방을 감사와 감격으로서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런 두가지 연유로 인해, 한국 기독교는 8.15를 해방절이라고 고백하고 기념예배를 드려왔습니다.
[2] 미완성의 해방, 해방의 3가지 차원
4. 오늘의 설교제목을 <사람이 겪는 3차례 해방>이라고 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질적으로 다른 3가지 차원의 해방을 이루어야 온전한 구원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첫째 해방은 <외부로부터 오는 압제, 멍에, 결박으로부터 해방>입니다. 둘째해방은 <안으로부터 해방, 다시말해서 자기자신의 이기심이라는 압제, 멍에, 결박으로부터의 놓임받는 해방> 입니다. 셋째 해방은 결국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고 무효화시키는 궁극적 위협, 곧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 그것입니다.
5. 첫째 해방은 겉으로보면 일본식민지배로부터 독립되었으니 해방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한민족이 외세로부터 진정한 자유독립국으로 해방되었는가요? 한민족은 남북 어느쪽이든지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진정한 주체적으로 외부세력으로 부터 독립되고 해방되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가요? 정직하게말하면 제1차적 해방도 아직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38선 분단자체가 우리한민족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진정 독립 해방된 민족이었다면 미국과 소련이 한민족 동의를 얻고서 분단선을 긋든지 말든지 했어야 옳은 것입니다. 일본 군국주의 식민지배만 외세는 아님니다. 소위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4강들이 한민족의 운명을 손에쥐고 놔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분단 70여년이 지나는 동안 동족상쟁이라는 전쟁까지 치루고, 좌우이념으로 남북은 갈라지고, 남과북 그 사회 안에서도 각종, 정치적, 경제적,사회적, 문화적 힘들에게 우리 백성영혼들이 결박당하여 갈등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요즘은 핵전쟁 위협에까지 노출되고 있는 형국이며, 우리 맘대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하고 주권국가라면서 국군통수권마져 다른 나라 사람에게 맡겨놓는 형국인데 어떻게 제1차적 해방이 완결되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는 백성이라면, 부끄럽고, 분하고, 통한의 심정을 가져야 마땅한 일입니다.
6.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게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기독교라는 종교는 철저히 해방과 자유를 위한 종교라는 점을 다시한번 다짐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민족이 당하는 새로운 위장전입형의 신식민지적 결박과 압제와 멍에로부터 민족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지않는다면, 하나님은 한국기독교가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선교부흥과 교세자랑을 헛된 금식행위라고 내쳐버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비극은 어디있는고 하니,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민족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7. 둘째 해방은 첫째 해방보다 사실은 더 어렵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해방입니다. 그것은 나를 옥죄고, 내 영혼을 결박하고 멍에를 지우고 억압하는 실체가 나의 밖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묘하게도 내가 나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착각하게 만드는 이기심인 것입니다. 법정스님처럼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살고간 분도 고백하기를 이기심이라는 위장된 폭군은 가장 나를 위한다는 착각을 갖게하면서 실제로는 내 영혼을 노예로 붙잡아두는 눈에뵈지 않는 위장된 지배자라는 것입니다. 그림자처럼 끝까지 자기를 따라붙는다고 진실고백을 했습니다.
8. 비판적 지성과 이성의 분별력으로써 어느정도 밖으로부터 오는 지배와 억압을 물리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중심적 이기심의 덫에서 해방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것은 생명체들의 공동특징으로서, 생물학적 존재로서 자기본존 본능, 자기 확장본능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기심은 자기영혼을 혼탁하게 만들고 마취시키며 구원받지못하게 가로막는 핵심인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물과 상령으로 가듭나지 않으면 가망 없다고> 하십니다. 이기심은 자기의 맑고 순수한 영혼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영혼과 생명에 상처를 주고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둘째번 해방, 곧 자기중심의 이기심으로부터 해방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도 받지못하고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고 회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9. 오늘 봉독한 창세기 4:10절에 가인과 하나님 야훼와의 문답이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쳐 죽여서 황량하고 적적한 땅 속에 은폐 매장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가인은 시침떼고 당당하게 항변조로 말합니다. "내가 알지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 입니까? 가인의 이 파렴치한 대답은 인류사회의 모든 이기적 갑질자들, 힘없는 아우를 직간접으로 살해한자들이 자기를 변호하면서 내뱉는 말입니다.
하늘과 땅을 속이고, 자기양심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말을 당당하게 계속합니다. 밥술 께나 먹고, 재산께나 갖고, 사회직장에서 꽤 높은 직책을 가진 오늘의 카인의 후예들도 하나님께 대들 듯이 응대합니다. "내가 청년실업자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왜 임시직 기간제 노동자들의 차별받는 인격상처에 신경써야 합니까? 그들도 경쟁해서 돈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왜 더 이상 노동력도 없고 쓸모없이 소비만 하는 노인층 복지문제를 위해 더많은 세금을 내야 합니까? 내가 그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10. 인간의 이 무섭게 뻔뻔하고 자기기만적인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변명의 뿌리가 자기중심의 이기심에 있는데, 성경은 그것의 본체를 '인간의 원죄성'이라고 부름니다. 원죄는 선악과 따먹은 처음죄가 죄가 아니라 원죄의 실체는 '자기중심적 이기심'이라고 어거스틴부터 라인홀드 니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은 지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중심적 이기심>은 인간생명체가 자기를 지키고 보존하려는 근원적 본능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듭시다. 요즘 여름 과일이 한창 출하될 때입니다.
모든 과일엔 씨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자두나 복숭아를 생각해봅시다. 자두나 복숭아의 속살을 다 먹고나면 한 가운데 의의로 단단한 씨가 나옵니다. 그 씨는 자기 안에 속씨배아를 간직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망치로 깨어도 잘 깨지지않게 속씨 배아를 지킴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심도 알고보면 <속사람 영혼>을 지키고 영생하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지키려는 자기보존의 방어책입니다. 그러나, 씨앗껍질은 결국 땅에 묻혀 죽고, 자기를 버려야 속씨배아가 싹이 틈니다. 속씨배아를 지킨다고 계속 버티면 새 생명은 탄생하지 못합니다. 이치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11.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이 겪는 마지막 세 번째 해방 <죽음의 쏘는 가시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겪어야 하는 문제에 대면함니다. 인간의 죽음을 자연질서로서 이해하고 모든 생물체가 생노병사하듯이 인간도 그렇게 살다가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질서라고 담담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모든 종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도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흙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흙으로부터 나서 흙에로 돌아가는 것이 창조질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씨앗, 성령이 내주하는 속사람으로서 영적존재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죽음에 예속 당하시지 않듯이, 인간영혼도 죽음에 예속당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고전15:26절에서 바울은 선언합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인간영혼 깊은 곳에 죽지않고 영원히 오래오래 살고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하고 경이로운 창조세계 안에 인간 속사람 까지를 완전 무화시켜버리는 죽음이 권세를 휘두르는 것은 '정상태'가 아니라는 영혼의 저항과 절규가 있습니다. 속사람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 주권, 자비의 속성과도 어울리지 않는 비정상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합니다. 인간은 세 번째 해방 곧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받기까지 온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12.사회, 정치,경제적 온갖 외적 조건과 억압으로부터의 일차적 해방, 그리고 인간을 내면에서 옥죄이고 영혼을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내 영혼을 결박하고 있는 참나를 위한척 기만하는 동물적 이기심으로부터 제2차적 해방이 필요불가결 합니다. 그러나, 그 두가지 해방은 중요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첫째와 둘째 해방의 의미가 반감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구원은 3번째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까지 완성해야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13. 어떻게 이 세가지 근본적 해방이 가능하게 됨니까? 인간스스로 깊은 자기 성찰, 반성과 회개, 사회제도적 개선과 인간화 운동, 그리고 절제훈련과 영적수행이 필요하고 절실함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구원의 길들입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생명으로 부활한 그리스도 예수를 보라! 그분을 진정으로 만나라! 그 분 인격과 대면하고 대화하고 그분을 네 생명 안방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옛사람은 없어지고 새사람이 되었도다!> 바울의 승리의 찬가입니다. 예수님을 더 가까이 모시고 순명하면서 살아갑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더 많이 생각하고 섬기며 사랑합시다. 주님이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우리로 하여금 삼중적 해방을 받도록 함께하시고 도우실 것입니다.